설교

고통에의 공감과 연대 - 욥기 21:1~6[세월호유가족과 함께드리는 주일예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22 10:48
조회
5608
2017년 5월 21일(일) 오후 5:00
제목: 고통에의 공감과 연대
본문: 욥기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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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말씀을 맡았습니다만, 어찌 저의 짧은 말로 감히 위로를 드릴 수 있을까요? 다만, 성서의 말씀에 의존하여 그 말씀의 의미를 나누는 가운데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생각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을 겪은 가족들과 과연 무슨 말씀을 나눌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저는 금방 욥기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가족들의 이야기를 언론이나 지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접할 수 있었던 기회는 지난 해 7월 유예은 양의 어머니 박은희 전도사님의 이야기, 그리고 올해 3월 바로 이 자리에서 문지성 군의 어머니 안명미 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기회, 두 번이었습니다.
그 참담함을 겪은 가족들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참담한 상황을 어찌 헤쳐 나오셨는지 그 내밀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조금이나마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로부터 오히려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뼈아프게 남아 있고, ‘내가 왜?’ 라고 항변할 수밖에 없었지만 스스로의 아픔 때문에 절규하고 호소한 것이 모르는 사이에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오늘 욥기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생각한 것도 저 나름대로 바로 그와 같은 공감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욥기 하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라는 구절부터 떠 올리고, 또한 욥은 인내와 순종의 표상으로 간주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편견일 뿐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경구는 사실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면서 던진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세상 이치인데, 그러지 않은 걸 보니 욥에게 틀림없이 잘못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대목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욥이 까닭 없이 겪는 고통이 욥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던져진 말로써 고통을 겪고 있는 욥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욥은 현실에서 통용되는 인과의 법칙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항변하며, 심지어는 신성모독에 이를 경지까지 도발을 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기존의 법칙, 그 법칙을 용인하는 하나님에 대해 순종하며 인내한 것이 아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그런 법칙을 용인한다면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항변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겠다고 나선 주인공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진 재산을 다 잃은 욥은 이어 사랑하는 자녀들을 모두 잃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참담한데, 몸까지 몹쓸 병에 듭니다. 가진 것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데다, 자신의 품격과 인격마저 완전히 손상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를 보고 달려온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겠다고 나서지만, 한결같이 위로는커녕 아픈 상처를 덧내는 말들만 뱉어놓습니다. 앞서 말한 그 경구로 집약되듯이, 그것이 마땅한 이치이거늘 그렇지 못한 걸 보니,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보라는 이야기들뿐입니다.
욥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항변하면서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 몸부림칩니다. ‘내가 왜?’라고 절규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가장 기쁜 생일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3장). 하나님마저 그 날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어머니는 어쩌자고 자신을 낳았는지 절규합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다는 탄식이요 절규입니다.

애초 고통을 겪는 욥을 위로하겠다고 달려오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알고 믿는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의 잘못을 추궁합니다. 네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이 벌 주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지겨운 이야기가 반복될 때 욥은 더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에 이르러 욥은 친구들을 향하여 자기 이야기를 정말 제대로 들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은 거기까지입니다만, 이로부터 욥의 이야기는 중대한 반전에 이르게 됩니다.
욥이 그 다음부터 하는 이야기는,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거꾸로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숱한 사례들입니다. 자 봐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 착한 사람이 복 받고 악한 사람이 벌 받느냐, 그 반대이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욥이 이렇게 항변한 것은 스스로에게 크나큰 반전이요 각성에 해당합니다. 이제껏 욥은 친구들 앞에서 제발 자신의 고통을 헤아려달라고 했을 뿐이지만, 이 순간부터 욥은 타인의 고통에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나만이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아니 세상을 가만 보니, 세상 자체가 그렇게 잘못되어 있고 곳곳에 그렇게 억울하게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정의하는 기준 가운데 다른 어떤 것보다, 고통의 체감 범위를 그 기준으로 하여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사람들이 자신이 고통을 겪지 않고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훨씬 살만해집니다. 한동안 자신의 고통 때문에 탄식하며 절규하며, 어쩌면 고작해야 자기연민에 빠져 있던 욥은 이제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며 기존의 허구적 논리에 항변하기 시작합니다. 더 큰 목소리로 더 자신 있게 세상의 부조리, 그 부조리에 매여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합니다. 이제 그 항변은 단순한 항변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항변이요, 따라서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만큼,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희망의 언어가 됩니다. 이 점에서 지지치 않은 욥의 항변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잘못된 믿음을 바꾸는 우렁찬 희망의 함성이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욥의 뒷 이야기를 더 장황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결국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세상을 잘 알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다는 친구들이 아니라, 세상이 온통 부조리로 가득하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느냐 물음을 던지며 그런 세상을 정당화해주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 항변한 욥이었습니다. 욥이 재산을 회복하고, 새로운 자녀들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욥기의 진정한 결론이 아닙니다. 이미 잃어버린 자녀들을 새로운 자녀로 대체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 뒷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욥기의 진실은 세상의 부조리와 잘못된 믿음을 무너뜨린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친구들이 욥에게 사과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용서해주겠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통쾌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우리의 가족들이 그런 몫을 감당해 왔다고 믿습니다. 전적으로 예기치 않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지만, 게다가 그 고통이 치유되기보다는 고통에 고통이 더해지는 과정의 연속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외친 가족들 덕분에, 오늘 우리는 그나마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쁜 생일날을 거꾸로 원망하며 살아왔지만 그래서 여전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지만, 마음으로부터 공감하는 넉넉한 품에 안길 수 있는 위로를 얻은 주인공, 어쩌면 갖가지 부당한 일로 상처 받고 고통을 겪은 모두, 세월호로 고통을 겪은 가족, 더불어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 모두 그 주인공이 된 듯하지 않았습니까? 5월의 광주를 끊임없이 기억하였기에, 5월 광주와 세월호가 만나 한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는 공감과 연대가 있었기에 우리는 그나마 위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공감과 연대가 있었기에 우리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침 광주 37주년을 맞아 <소년이 온다>가 재조명되어 작가의 동기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세상은 어쩌면 그렇게 폭력적이며 또한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세월호희생자 가족들의 여정에 대해서도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그 체감하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뿐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온갖 험한 말들로 고통을 가중시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끝내 포기하지 않은 그 고통의 절규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내 세상을 움직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진실이 환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단원고 고창석 선생님과 허다윤 양이 돌아왔지만, 단원고 남현철·박영인·조은화 학생, 양승진 선생님, 여섯살 혁규와 아빠 권재근씨, 이영숙씨가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제 다시는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참담한 일을 겪고 고통스러워해야 할 일은 없을 것이라 안도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여전히 노동 현장에서는 매년 1,800~2,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산재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매년 6건의 세월호 사건이 반복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 3년 넘도록 외친 가족들의 절규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확인하며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이 바로 위로인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 더 큰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치기를 바랍니다. 그 진실이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 그리고 나아가 평범한 모든 사람들이 그야말로 사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평화롭게 살게 되는 그날까지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 416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드리는 주일예배 기도문>17. 5. 21
박은경(천안살림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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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를 죽여서 묻어버렸지만예수님은 그대로 묻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진실은 숨긴다고 힘으로 묻어 버린다고결코 그대로 묻혀버리지 않음을 저희는 믿습니다. 세상의 왜곡된 힘을 이기고 부활함으로써진리가 승리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예수님처럼,이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가 지켜지며 국민으로서의 기본적인 보호를 원하는우리의 소박한바램은 결국 승리하리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아프고 억울한데도 미안해 하지도 어느 누구 책임지려 하지도 않는파렴치한 저들의무리가여전히 버티고 있는이 사회가 이 국가가어린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그 아이들은대신 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를 보고 있다 했습니다. 어제까지 우리는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자괴감에 괴로웠지만이제 우리는 그 아이들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 못 다한 얘기 대신 해주고 못 다한 꿈을 이루어주는 숙제를 해야 합니다.
차가운 물속에서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에 지난 3년간 편히 눕는 것도 죄스러우셨을 유가족분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기다리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유가족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 주세요.
해마다 4월이면,해마다 5월이면 아무 잘못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간 얼굴들을 기억할 것입니다.그리고 잘못된 사회가 준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것을 다시 돌려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지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지고 또 다질 것입니다.
저들은 기다리라 했지만 기다리고만 있어선 안 됨을 이제 알았습니다. 기다리라고 참으라고만 하고는 아무 것도 해 주지 않아 결국 기다리다 다 잃고마는 힘없는 이들은 예수님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셨던 그들입니다. 잃어버린 사람, 버림받은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찾아내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포기하지 말라.”
오늘 우리의 예배가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한발자국 움직일 수 있는 위로가 되고 약속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움직임이 미약하여도 지치지 않고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믿기 힘든 현실의 하나하나를 생생히 기억하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게 해 주세요. 그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고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말씀, 사람과 생명과 정의를 사랑하셨던 그리고 그것을 직접 삶으로 보여 주셨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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