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흐르는 강물처럼 - 요한복음 7:37~39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28 14:47
조회
5695
2017년 5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흐르는 강물처럼

본문: 요한복음 7:37~39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거룩한 영의 역사를 생명의 물이 강처럼 흐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뿐만 아니라 성서에는 물과 관련된 비유적 표현들과 상징이 자주 등장합니다.

물은 때때로 혼돈의 상징이요 두려움의 대상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노아의 대홍수라든가, 출애굽한 무리들 앞에 가로놓인 홍해는 그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쓰나미나 홍수와 같은 현상에 대한 경험은 물을 두려운 대상으로 기억하게 만든 계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적 경험에서 물은 그렇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절실히 필요한 대상이었습니다. 물은 사실상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특히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에서 물은 삶 그 자체, 생명 그 자체로 여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샘물을 두고 경탄했습니다. “이제 주께서 우리가 살 곳을 넓히셨으니, 여기에서 우리가 번성하게 되었다.”(창 26:22) 우물이 삶의 터전의 근본이었던 것입니다. 두려웠던 홍해를 건넌 출애굽 백성들에게도 물은 언제나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말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왔느냐? 자식들과 집짐승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출 17:3)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바위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어 그 백성의 갈증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갈증으로 애 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유대인들의 3대 명절(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초막절)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 마지막 날 선포하고 계십니다. 초막절은 가을걷이가 다 끝나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절기입니다. 아마도 포도원에 초막을 쳐놓고 연일 포도와 과일을 추수했던 데서 이 명절의 이름이 기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명절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살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절기로 그 의미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일주일간 계속되는 이 명절 기간중에 행한 독특한 의식 가운데 하나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 성전에 바치는 의식이었습니다. 초막절은 일종의 물의 축제였습니다. 그것은 추수가 끝난 바로 그 절기 직후부터 우기가 시작되는 팔레스타인의 자연환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기 곧 겨울에 충분한 비가 내려야 밀과 보리가 잘 자랄 뿐 아니라, 포도와 그 밖의 과일 농사도 풍작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물을 긷는 의식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비가 충분히 내리기를 기원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의식의 의미 역시 역사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바로 광야 생활에서 목말라했던 조상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었던 그 우물을 재현하는 것으로, 그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로 바꿔 이해한 것입니다. 한 해의 농사와 살림살이, 아니 삶 자체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절실한 것을 구하는 기원이요 동시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성서가 전하는 이스라엘 신앙의 독특한 한 측면이 있습니다. 자연적 순환의 현상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연적 순리를 역사적 순리로 전환시켜 이해했다고 할까요? 초막절은 분명히 농경축제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앙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가나안 지역에 있던 풍습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역사적 기억을 결부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전환은, 자연의 순리에서 역사의 순리를 터득하고 인간 삶의 방식을 터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고도의 윤리적 성격을 띤 신앙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자연의 순환 현상을 보며 그저 경외감만을 갖고 있을 때 많은 경우 자연의 순환은 그 자체로 맹목적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바알 종교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현상을 인간의 역사적 경험, 역사적 사건과 결합시키면서 인간이 취해야 할 적극적 태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목마름을 해결해 주었던 구원의 사건과 결합된 물의 의미는, 인간의 삶의 태도를 깨닫게 해 줬습니다. 그것은 주술을 통해 그저 물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태도에서 나아가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물과 같은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로의 전환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삶을 유익하게 하는 역사의 순리를 터득하게 해 줬습니다. 자연현상과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결부시켰다는 것은 자연현상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의 방식을 생각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의미를 기리는 초막절 축제의 현장에서 예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날 것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초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스스로 생명의 물이 된다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그 생명의 물을 마신 사람 또한 생명의 물을 내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물은 예수의 삶으로 역사화됩니다. 또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으로 역사화됩니다.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가 된다는 것이 그야말로 인간의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순전히 육체적인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영양소가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신앙의 초보자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양식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인간의 삶에 기쁨을 주는 포도주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물이 되신다고 한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태도와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사람들 사이에 끼치는 영향을 말합니다. 생명의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신다는 것은 그 삶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 물을 마신 사람이 그 배로부터 생수를 강물처럼 흘러내리게 할 것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다른 모든 생명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의 역할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시점에서 지금 새 정부의 역할을 보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가장 잘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정규직 대책, 국정교과서 폐지, 검찰개혁, 재벌개혁과 공정거래 정책, 주변국가와의 조율, 전시작전권 회수 계획, 남북관계 조정, 인권 가치기준 확립, 4대강 수문개방,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중단, 인사정책, 탈권위적 회의와 소통... 아, 이제 나라다운 나라꼴이 만들어지겠구나 하는 기대를 하면서, 생수를 마시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인만큼 촛불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는 일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강물이 흐르듯 마땅한 일들이 마땅히 이뤄지도록 하는 조치들입니다.

물론 4대강 보들의 주요 수문 개방이 상징하듯, 아직 근본적 개혁조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수문을 개방하는 것만으로는 녹조와 오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바닥에 이르기까지 오염물질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보 자체를 철거하는 것이 4대강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해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보면, 지금 촛불 정부의 초기 조치들은 그저 수문을 개방한 수준에 불과한 일들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근본적 개혁이 요청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조치들로 그 근본적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반길 수 있는 것은 물줄기의 방향을 제대로 돌려놓는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물줄기가 제대로 흐를 때 모든 생명체들이 그로부터 기운을 얻고 저마다의 생명을 온전히 누린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정치사회적 현실 가운데서 그 진실을 확인하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또 하나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생명ㆍ윤리위원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매년 선정하는 ‘녹색교회’에 선정되어, 지난 25일(목) 미리 앞당긴 환경주일연합예배에서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교회가 50번째 녹색교회가 되었습니다. 서울 관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신양교회에서 있었는데, 그 교회는 우리보다 한술 더 떠 아예 3면 전체가 유리창이어 교회당에 들어서면 완벽하게 관악산 숲으로 둘러싸인 게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짤막한 수상소감을 밝혔습니다. 원래 ‘적색’(노동, 사회정의 운동)에 관심을 기울여왔는데, 어쩌다 ‘녹색’(생명, 환경운동)으로 상을 받은 것은 아마도 제가 적ㆍ록을 잘 구분 못하는 적녹색약인 탓이 아닌가 싶은데, 뭔가 심오한 뜻이 있는 것 같아 앞으로는 ‘보라색’(여성운동)도 내걸고 하나하나 색깔을 더해 아예 ‘무지개빛’을 내거는 교회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다소 치기어린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소외되고 배제되고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살림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3시간 넘게 걸린 예배를 마치고 정국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그 생각이 더 깊게 들었습니다. 지금 새 정부가 취하는 조치들을 환영하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간 우리가 바라왔고, 또 어떤 면에서는 외람될지 모르나 우리가 선취해 온 어떤 것들이 국가사회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을 보면서 공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의 경험도, 생각하는 것도, 삶의 스타일도 비슷한 사람들이 국정을 주도하게 된 것에 대한 일체감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기조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정말 나라다운 나라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기조가 정상적인 궤도로 안착하게 되었을 때, 교회가 한 걸음이라도 앞서 나가지 않는다면 정말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제대로 흐르기 시작한 강물이 정말 온전히 제대로 흐를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우리 교회가 ‘녹색교회’로 지정된 것이 그 가치를 이미 온전히 실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그 가치지향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격려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고, 정작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 가치를 온전히 실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는 다짐도 새겼습니다.

그렇게 부단히, 소외되고 배제되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헌신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생명수를 맛보게 되는 셈이며, 더불어 우리 주변의 모든 생명들에 생명수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정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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