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야기하는 공동체, 이야기가 있는 공동체 - 사도행전 20장 7~12절[정용택 목사]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7-07-15 18:01
조회
8801
2017년 7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이야기하는 공동체, 이야기가 있는 공동체
정용택 목사

본문: 사도행전 20장 7~12절[새번역 성경]

7 (그) 주간의 첫 날에,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다. 바울은 그 다음 날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신도들에게 강론을 하는데, 강론이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8 우리가 모인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9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하였다.
11 바울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12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의 본문은 일반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청년 유두고의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죽은 사람도 살려낸, 어쩌면 예수님 못지않은 기적을 일으킨 바울의 사도적 권능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많이 소개되고 있는데요. 사실 신약학자들에겐 유두고라는 인물의 정체나 기적을 일으킨 바울의 능력보다도 이 본문의 7절에서 “그 주간의 첫 날”(안식 후 첫 날: μιᾷ τῶν σαββάτω)이라는 어구가 나타나는 것이 더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유대교처럼 그 주간의 마지막 날인 안식일, 지금으로 치면 금요일 저녁 해가 진 뒤부터 토요일까지의 시간이 아니라, 한 주간의 첫 날, 지금으로 치면 일요일에 “빵을 떼는”(κλάσαι ἄρτον) 성만찬을 거행했음을 알리는 최초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리는 성만찬을 거행했다는 것은 유대교로부터 그리스도교가 갈라져 나오는, 즉 거룩한 시간의 개념이 달라짐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종교적 삶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유대교 회당체제 하에서의 시간 구조와는 전혀 다른 시간 구조를 살아가는 공동체, 즉 예수라는 이름의 메시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시간을 살아가는 메시아 공동체의 탄생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교회라 불리는 공동체가 탄생하던 최초의 역사적 시간대에 일어난 사건, 그리고 그때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유대교 공동체가 아닌 그리스도교 공동체, 즉 교회의 원초적인 성격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답변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 읽었다시피, 이 본문 어디에서도 우리는 “교회는 ~이다”라는 직접적인 서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본문에는 그저 형성 과정 중에 있는 교회를 배경으로 한 짧은 에피소드만 나타날 뿐, 교회에 관한 논설이나 이론, 주장 같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교회는 ~이다(church is ~)”라는 식의 규정보다는, “교회는 ~을 한다(church does ~)”라는 관점에서 교회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분들과 함께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교회를 그것이 소유하고 있는 본성이나 특질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능적이고 수행적인 차원에서 접근해보려는 것입니다.


교회의 탄생: 성만찬과 강론

자,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처럼 새로운 시간의 구조를 살아가는 메시아 공동체, 즉 교회의 탄생을 알리고 있는 이 중요한 본문에서 바울과 그가 만났던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교회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겠지요. 이 본문은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 가운데 특히 많은 성과와 더불어 적잖이 충격적인 소동까지 겪었던 에베소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상황에서 겪은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16절에 따르면, 바울은 그 해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자 시간을 최대한 아끼려 했고, 그래서 이미 2년 이상을 머물렀던 에베소도 다시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 바울이 왜 일주일 동안이나 드로아라는 곳에 머무르게 되었을까요?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 시리아를 거치려고 했다가 그곳에서 자신을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와 마주하게 되어 계획에도 없던 드로아라는 장소에 머물렀던 바울이, 무엇보다도 진작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 거기에 갔다가, 로마에도 꼭 가 보아야 하겠다”(19:21)고 마음먹은 후 여행에 속도를 내고 있던 바울이 왜 드로아에서 일주일이나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바울은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바울은 무엇을 하면서 교회를 세운 것일까요? 다시 말해, 바울과 그의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함으로써 그들의 모임을 교회로 완성시킨 것일까요? 바울이 한 일을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앞서도 말했듯이 일단 그 주간의 첫 날,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일요일인 주일에 바울은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빵을 뗐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그것을 몸에 새기는 성만찬 의례를 수행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성만찬은 유대교나 다른 종교적 공동체와 완전히 갈라져서, 예수를 따르는 메시아 공동체, 즉 교회를 탄생시키는 근본적인 활동에 해당했습니다(행 2:42). 그런데 이 드로아에 모여서 함께 빵을 뗐던 사람들 가운데는 적어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그리스에 이르렀을 때부터 그와 동행하다가 바울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한 일곱 명의 제자(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20:4)나 바울과 계속해서 동행하다가 그와 함께 드로아에 나중에 도착한 사도행전의 화자인 ‘우리’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20:5-6). 드로아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 즉 원래부터 드로아에 살고 있었던 ‘그들’(신도들: αὐτοις)이 등장하고 있습니다(20:7). 즉, 바울이 그 모임을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조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드로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이 자체적으로 모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바울 일행을 포함한 그 모든 이들이 드로아의 모처에서 주일에 함께 성만찬을 거행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둘째, 바울은 그들을 대상으로 밤이 깊도록 강론을 진행합니다(20:7). 즉, 신도들은 바울에게 강론을 들었습니다. ‘강론하다’(διαλέγετο)로 번역된 단어는 복수형태로 사용될 때는 ‘논쟁하다’(διελέχθησαν: 막 9:34)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가 바울과 관련되어 나타날 때는 언제나 단수형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강론을 했지, 그들과 상호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17:2, 17; 18:4, 19; 19:8, 9). 오늘날에야 설교와 강의를 엄격히 구별하지만, 아마도 그때는 강론이 곧 예배 중에 이루어지는 설교와 유사한 것이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들에게 오랜 시간 강론 혹은 설교를 했다는 것은 그가 신도들과 말을 대등하게 주고받았다는 것(tell)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울은 그들을 상대로 하나님 나라의 ‘도(道)’를 긴 시간 동안 가르친(teach) 것입니다.

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지요? 우리 교회에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니까, 그 차이를 금방 아실 것입니다. 특히 어떤 ‘언어’를 가르쳐본 분이라면 언어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과 언어 자체를 가르치는 것의 차이를 쉽게 아실 수 있을 텐데요. ‘가르치다’라는 말은 상대방이 나와 원활한 대화를 위하여 먼저 일정한 규칙성이나 문법, 혹은 패턴을 배운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반면에 ‘말하다’의 경우 상대방은 그런 규칙이나 문법을 배울 필요가 없거나 아니면 이미 ‘말하고 듣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정한 규칙을 가르침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결국 ‘말하고 듣는’ 것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논리적으로 선행합니다. 바울은 드로아의 신도들과 신앙에 관해 대화를 하기 전에 그들에게 대화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대화의 문법, 대화의 규칙부터 가르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관점에서, 복음의 진리는 서로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서 터득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그랬듯이(“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고전 15:3), 그 진리의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수영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모르는 상대방에게 수영할 때의 느낌을 아무리 말로 전해줘도 상대방은 알 수 없고, 자신이 직접 수영을 배워야만 수영한다는 것의 느낌을 알 수 있듯이, 복음 역시 그 내용을 정확하게 가르쳐서 배우게 해야 하는 것이지 복음을 믿을 때의 느낌을 말로 서로 주고받는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확장하자면, 복음의 진리는 보통의 말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선 도달할 수 없는 것, 오로지 외부에서 나에게 강제로 선포되어 나에게 주입되는 객관적인 차원에 있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복음의 진리는 공감적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주입식 교육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것을 복종하고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내가 말을 보태서 그 내용을 변경시키고 그래서 상대방과 내가 대화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그 내용에 관해 새로운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드로아의 신도들에게 “가르치다”라는 의미에서의 강론을 수행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교회는 성만찬과 더불어 바로 그와 같은 복음의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을 통해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바울에게서 단 한 번도 디알레고마이가 복수형태로 사용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복음은 토론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선포와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확고한 신념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을 강조하니까 왠지 권위적으로 들리고 제가 목사이니까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을 꼭 복음의 진리에만 적용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일상적 삶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가르침 받고 배워야 할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지극히 사적인 차원의 언어, 예컨대 타인의 주관적이고 실존적인 고통과 관련된 이야기는 내가 상대방과 대화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철저하게 배우고 들음으로써, 비록 내가 상대방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에 대하여 ‘타자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초월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복음의 언어와 가장 내재적이고 가장 특수한 (주관적) 고통의 언어는 이렇듯 “가르치고 배운다”는 의미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의 완성: 다양한 이야기가 교환되는 공통의 세계

이제 바울이 드로아에서 신도들과 함께 한 세 번째 행위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바울의 상황으로 보건대, 사실 그의 계획은 드로아에서 신도들과 성만찬을 나누고, 그들을 대상으로 강론을 진행한 후 곧바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려고 했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행 20:16). 그런데 바울로 하여금 성만찬과 강론만 하고, 즉 예배만 하고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등불이 많이 켜진 3층 방에서 바울의 강론은 밤이 깊도록 이어졌는데, 그러던 중에 유두고라는 이름의 청년이 강론 시간에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결국 창밖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유두고를 청년이라고도 했다가(20:9) 소년이라고 하는데(20:12), 짐작컨대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있는 나이쯤 되었을 것입니다. 추측컨대, 요즘의 청소년들 나이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아무튼 유두고가 창문에서 떨어진 이유는 명확합니다. 바울의 강론이 야심한 시간까지 이어질 정도로 지루하고 길다보니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지요. 사고의 원인은 본의 아니게 강론을 길게 한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한데 성서는, 그래서 유두고가 추락하여 즉사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절했다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도록 모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3층 건물의 높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유두고가 피를 흘렸는지, 뼈가 부러졌는지, 그의 부상 정도가 어떠했는지 등에 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그가 죽어 있었다고 말했다가(20:9), 곧 이어 바울이 내려가서 그를 살펴 봤을 때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그의 영이 그 안에 있다; φυχὴ αὐτου ἐν αὐτῳ)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20:10). 최종적으로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20장 12절에서 분명히 ‘살아난’ 청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어쨌든 죽기는 죽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죽은 사람을 두고 왜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고 말했을까요? 단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죽었지만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요? 역시 성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울이 그런 말을 하고 그 청년이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는지, 아니면 계속 죽은 상태로 있었는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 청년을 그곳에 그대로 두었는지 아니면 3층으로 다시 옮겼는지 등에 관해서도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성서는 그 후에 이어진 상황에 관해서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20:11-12) 자, 다시 한 번 사건을 경과를 짚어보지요. 바울과 그의 일행이 방문하여 함께 성만찬을 나누고 바울이 직접 신도들을 대상으로 밤 늦도록 강론을 진행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그 공동체의 어린 청년이 추락사하는 충격적인 사고가 났습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많이 놀랐을 것이고, 바울 자신도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 청년은 확실히 “다시 살아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 일로 인해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큰 위로를 받았다고 전하는 것으로 짐작해 보건데, 청년이 잠시 기절했다가 곧바로 깨어났던 것은 아닐 듯 싶습니다. 유두고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체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바로 살아났다면 안정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즉시 청년을 집으로 데려가지 바울과 함께 위층으로 다시 올라가서 빵을 떼어먹고,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진 않았겠지요. 오히려 그 청년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그 시간 동안 바울과 드로아 공동체의 신도들이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개연성 있는 추측일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빵을 떼어 나누어 먹었다는 것은 그들이 예배를 진행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청년의 영(생명)이 아직 그 안에 있다고 했던 바울의 말을 믿고 함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앞서 바울은 신도들을 대상으로 긴 시간 동안 강론을 했었습니다만, 예기치 못했던 사고가 발생하고 다시 예배를 진행한 후에는 그들과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합니다.”(20:11) 11절에서 ‘이야기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원어는 앞서 나온 강론하다(διαλεγομαι)와는 전혀 다른 단어인 ‘호밀레오’(ὁμιλέω)라는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바울이 신도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대화를 나누었음을 가리킵니다. 앞서의 강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다. 강론만 하고 서둘러 드로아를 떠날 생각이었던 바울이 예상치 못한 사고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그곳의 신도들과 마주 앉아 차분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데 이번에는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저렇게 쓰러져 있는 청년은 누구이고, 그는 어떤 삶을 살아 왔는가, 오늘 그는 무슨 일을 하고 왔는가, 유두고와 신도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다른 신도들은 어떻게 드로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동안 어떻게 신앙을 지켜 왔는가, 드로아의 공동체에는 어떤 이들이 있고, 공동체 안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바울은 어떻게 예수의 사도가 되었는가, 사도가 된 이후로 그는 어떤 일을 겪었는가, 그와 그 일행은 드로아에 오기 전에 에베소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가 등등의 많은 사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를 밤이 새도록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입니다. 즉, 교회는 무엇으로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일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구조를 배경으로, 세례와 성만찬과 강론(혹은 설교)로 구성된 예배를 통해 탄생하지만, 그것이 곧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의 완성은 아닙니다. 교회는 공통의 세계, 즉 신앙으로 바라본 우리의 세계에 대해 다원적이고 복수적인 관점에서 말해지고 들려지는 그 다양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담긴 주체들 서로 간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마침내 완성됩니다. 정통교회와 이단교회의 차이를 말할 때, 신학자들은 이단, 즉 “다를 이(異) 끝 단(端)”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에 입각하여 이단은 교리의 궁극적인 결론이 다른 집단으로 규정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집단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교리적인 것보다는 그 안에 단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데 있습니다. 이단적 집단 안에는 강론이나 예배는 있어도 대화나 토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카리스마적인 교주 한 사람의 목소리만 존재하며, 그가 집전하는 예배나 의식에 모든 시선이 집중될 뿐, 신도들과 목회자가 서로 평등한 위치에서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복수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단 하나의 목소리, 단 하나의 관점만이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통을 자처하는 기성 교회들 역시 제가 보기엔 이단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 건강한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을 가르치고, 복음을 배우고, 또한 성만찬을 함께 나누는 곳이지만, 그러한 것들은 교회가 시작되는 기초적인 활동일 뿐, 현실적으로 교회가 교회로서, 즉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완성되는 최종적인 활동은 아닙니다. 교회를 교회로서 완성시키는 것은 이야기, 곧 대화입니다. 교회 안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교회는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공공적인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동체를 그 외부의 사회나 세계로부터 닫혀 있는, 어떤 동질적인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들끼리의 폐쇄적인 집단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신앙의 공통성에 기초한 동질적인 공동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단수가 아닌 복수의 목소리들이 존재하고, 그 목소리들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말해지고 들려지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닫혀 있는 폐쇄적인 공간이 아닌 외부로 열려 있는, 혹은 외부를 품고 있는 세계적 공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영상을 한 편 보겠습니다.

제가 아주 인상 깊게 봤던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시청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여자주인공과 서브남자주인공의 연애를 방해하는 민폐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드라마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신 드라마에선 당신이 주인공이겠지만 내 드라마에선 내가 주인공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그녀와 서브남자주인공의 인연이 훨씬 길고 깊고 극적인 것으로 암시됩니다. 어릴 적에 고아원에서 같이 자랐고 오랜 세월 헤어져 있으면서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해온 사이였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난 이후로 저는 더 이상 드라마를 주인공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떤 이가 돋보이는 무대 혹은 장면이 있고, 그 무대에 내가 조연 내지는 엑스트라로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관점에서 본 드라마이고, 내 관점에서 본 드라마는 다른 곳에서 다른 형태로 펼쳐지고 있으며, 그곳에선 바로 내가 주인공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드라마가 비극이건 희극이건 간에 말입니다. 결국 세계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때론 ‘내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때론 ‘네 인생의 이야기’의 조연으로 등장하고 사라지는 그 각각의 드라마들이 서로 교차하고 교환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유대계 여성 철학자는 공통의 이념이나 세계관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닫혀 있는 집단이 되지 않고 그 자체로 공공적인 공간, 즉 세계가 되기 위한 조건을 두 가지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첫째로,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잃지 않는 것, 둘째로 사람들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라고 하는 본질적인 것 외에 정치적인 사안이나 경제적 현안, 문화적 취향, 예술적 기호, 그 외 모든 삶의 이슈에 대하여 저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의 문제와 연관시킬 때도 해석상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해 있는 조건이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가 다르며 삶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화와 토론을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대화와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 자원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차이를 확인하고 대화하는 방식도 한 가지만 고집해선 안 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형태로 서로의 목소리가 말해지고 들려질 수 있는 공간을 교회 안에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그 자체로 공공적인 세계의 공간이 되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고 들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것들에 대한 관심을 놓쳐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들 각자가 교회 바깥에서 마주하고 있는 그 세계에 대한 관심을 우리의 공동체 안으로 다시 끌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공동체가 공동체 내의 문제만을 다루는 데 몰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다루고 있는 중요한 사안이 정말로 공통의 문제인지 아니면 목회자나 교회에서 발언권이 높은 직분자의 관심사인지 짚어볼 필요도 있습니다. 각자의 목소리, 각자가 살아가는 세계의 이야기가 교회 안에서 자유롭게 들려진다면,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 역시 그만큼 더 커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역시 아렌트에 따르면, 세계 속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탁자가 그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사물의 세계도 그것을 공동으로 소유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둥근 탁자 주위에 사람들이 둘러앉을 때 우리는 탁자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게 됩니다. 탁자는 사람들을 서로 관련시키는 동시에 다른 이들과 분리시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냅니다. 한 개의 탁자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둘러앉는 것은 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공간과 거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지만, 동시에 탁자는 그 자체로 공간을 채우고 사람들이 그 사이 공간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탁자를 통해 텅 빈 공간이 하나의 세계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지역에 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것도 동일한 과정입니다. 교회가 신앙 공동체로서 더 커지고 더 깊어지는 과정은 정확히 그 교회가 그 구성원들 개개인의 목소리가 들려지는 다양한 과정과 공간을 적극적으로 보장함으로써, 공동체이되 공동체를 넘어선 세계가 되어가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우리 천안살림교회 안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말해지고 들려짐으로써 우리의 공동체가 공동체를 넘어서 세계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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