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선택하신 뜻 - 신명기 7:6~12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7-23 15:37
조회
8592
2017년 7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선택하신 뜻
본문: 신명기 7:6~12

오늘 우리는 신명기의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신명기는 이른바 모세오경의 맨 마지막 책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앞두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모세가 일종의 설교 형식으로 선포한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는 ‘가장 중요한 명령/사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새로운 땅에서 지켜나가야 할 기본 법도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책은 구약성서 율법의 근본 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관점이 들어 있는 구약성서를 꿸 수 있는 근본적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성서적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정신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오늘 본문말씀의 내용을 환기하겠습니다. 본문말씀은 먼저 6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대전제를 내걸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당신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오늘 본문말씀에 한정해 보면 대전제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그 앞선 내용을 해명하는 문맥에서 등장합니다. 새로운 땅, 곧 약속의 땅에서 거주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은 기존의 주민이 따른 것과 같은 우상숭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 까닭으로서 이 말씀이 제시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은 그에 걸맞게 마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의 초점은 이어지는 7~8절에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이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이다.”
이 말씀은 성서의 밑바탕을 형성한 일관된 동기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뜻은 그 민족이 강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 꾀나 쓰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약해서 강대한 나라에 붙잡혀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였고, 거대한 정치권력에 붙잡혀 억압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약한 자를 선택하신다는 이 말씀은 성서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구약성서 곳곳에서 재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더더욱 뚜렷하게 재확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인의론을 통해서 그 정신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자격을 갖추고 업적이 있기에, 그래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좋은 조건에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조건과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인의론의 핵심 요체입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구약의 율법은 자격과 업적을 요구하는 반면 신약의 복음은 그 모든 것을 폐기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사도 바울 역시 끊임없이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 그 열쇠입니다. 본래 율법의 정신은 사람들을 옭아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말씀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선택하신다는 말씀의 뜻, 그것이 율법의 정신을 형성한 기초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구약성서의 정신과 신약성서의 정신은 상통하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동기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또한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약한 백성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동기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천 대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지키며 사랑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0절 말씀에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당장 벌을 내려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간단히 이해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푸는 반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는 대조이지만, 그 대조방법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천 대에 이르게 하겠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벌은 바로 그 사람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땅히 복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벌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성이 폐기되지 않았지만, 추상같은 공정함보다는 무한한 자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본문말씀의 근본 뜻입니다. 약한 백성을 선택하신 뜻, 자격과 업적을 보고 선택하지 않고 그것과 무관하게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말씀을 통하여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의 마지막 구절 12절 말씀은 재삼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 자비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너희의 하나님도 너희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계명을 잘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뜻, 곧 율법의 근본 정신이 그 백성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데 있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자 동시에 성서의 정수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 지당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자격과 업적 이전에 오직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사람을, 백성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는 오늘 말씀의 핵심은 자격과 업적에 매인 세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바로 앞에서 기존의 풍요종교와 그 풍요종교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은 그렇게 이해할 때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종교적 배타성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지만, 단지 어떤 종교와 단지 어떤 이방 민족을 배격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우상숭배로서의 그 종교, 그것이 우상숭배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그 종교적 믿음 아래서 정당화되는 삶의 양식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요의 종교에서 정당화되는 것은 인간의 업적입니다. 업적의 논리로 정당화되는 권력, 그리고 끊임없이 그 업적을 내도록 몰아붙이는 권력의 힘, 과정의 중요성보다는 그 결과에 집착하는 믿음, 그리고 더 많은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지금의 불공정함과 불평등은 도외시해도 좋다는 생각, 그리고 마침내는 그러한 삶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격이 없다고 배제하는 삶의 질서가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존속되는 사회가 풍요종교가 지배하는 세계의 실상입니다. 본문말씀은 그런 세계를 문제시하고 온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세계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말씀은 현대적 인권과 정의의 기초가 되는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배타성의 논리, 타자를 악마시하고 정죄하는 적대와 증오의 논리를 극복하고 가장 연약한 사람, 가장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고 당당하게 한 구성원으로서 몫을 다하는 세계에 대한 희망을,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또한 가지지 못한 이들을 경원시하고, 불편한 것을 거부하고 정죄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히려 드러내고 있는 종교, 기독교가 득세하는 오늘 현실에서 본문말씀은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지를 또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성장주의를 신조로 여겨온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그 성장주의와 더불어 반공주의를 자신들의 정체성의 근거로 삼아 왔습니다. 그 반공주의가 설득력을 잃게 되고 직접적인 정치적 의제가 스스로를 결집하는 데 그 효과가 다했다고 판단할 때 그 다음 슬로건은 뭐가 될까요? 이미 그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아마도 성적 소수자에 대한 공격이 되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불행한 사태입니다.
낯설고 불편하다고 해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이들을 돌보시고 약한 이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백성으로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깨닫고, 그 진실을 구현하는 이 공동체,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수가 미약하다고 하여 그 진실을 구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진실을 온전히 새기고 그 진실을 이루기 위해 더욱 신실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미약한 것이 우리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현하는 데서 유보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은 가속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재삼 새기며, 그 진실을 구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거듭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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