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평화, 반드시 가야 할 길 - 이사야 2:1~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8-06 20:16
조회
8520
2017년 8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평화, 반드시 가야 할 길
본문: 이사야 2:1~5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평화로운 이스라엘의 미래, 아니 세계의 미래를 선포하고 있는 예언입니다. 국제연합(UN) 본부 앞에도 새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오늘 세계 현실에서 그 의미가 회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바로 오늘 세계 현실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민족이 바라는 이상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라는 이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하면서 더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말씀을 구성하는 앞 뒤 문맥이며, 그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에 우리는 먼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앞부분은, 우리가 바라는 바 그 희망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질지에 대해 시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만국의 백성이 이렇게 말하리라고 합니다. “자, 가자. 우리 모두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백성의 사명을 말합니다. 약소민족으로 주변 강대국의 시달림을 늘 받아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도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며 그 위에 군림해 보고 싶은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봐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너희의 신들을 물리쳤다. 이제 모두 우리 앞에 굴복하라!’ 이렇게 다른 민족들에게 힘을 자랑하며 떵떵거려 보고 싶은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예언이, 시련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 소망의 말씀으로 바로 그와 같은 내용을 선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 사회의 어떤 실상을 나타내는 지표나 통계를 대할 때, 일본과 비교해보는 버릇도 사실은 그와 유사한 심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했으니 어떤 것으로든 이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기대입니다. 스포츠 경기 한일전이 유난히 뜨거워지는 것도 같은 심리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예언의 말씀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다시 말해, 경제력을 강화한다든지 무력을 강화해서 국위를 떨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움으로 세상의 만백성이 그 길을 따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가올 소망의 미래가 분쟁으로 얼룩진 오늘과 전혀 다르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동시에 그 미래를 이루어 가는 방식 또한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이 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질서의 진정한 역전, 곧 “칼이 보습으로 되는” 일은 그 방법에서부터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칼’은 경쟁과 갈등 그리고 죽음의 파멸을 의미하지만, ‘보습’은 화합과 평화 그리고 살림의 공존을 의미합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4세기경 로마제국의 군사 저술가 베게티우스(Vegetius)의 격언입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구가하던 로마제국은 그 격언에 충실했습니다. 그 로마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해야 했던 로마제국은 결국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그 역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지배자들은 그 격언을 따라 군사적 우위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에 충실합니다. 역사가 입증하듯, 그 결과는 참혹한 전쟁의 연속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무엇일까요?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그 믿음을 따르는 길입니다. ‘로마의 평화’가 정점에 이른 바로 시기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길은 세상이 따르는 길과는 전혀 상반되는 길입니다. 통상적인 가치의 전복을 동반해야 가능한 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몇 세기(기원전 8~6세기) 앞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인식의 전환은 중대한 세계관의 변화를 뜻합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성서 말씀의 위대성, 성서적 통찰의 위대성은 바로 이와 같은 정신사의 변혁에 있습니다. 전국시대를 경유하면서 위대한 사상이 분출하는 현상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문말씀은 혼란과 갈등의 시대를 경유하면서 이뤄진 사상적 전환, 그 전환을 뚜렷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강(强) 대 강(强)의 논리가 아니라, 그런 차원에서 대비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차원을 발견한 데 그 통찰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말씀은 단순히 세상의 심판과 그에 이어 오는 새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2의 창조’를 함축하고 있다고, 주석가들은 주목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것을 이루는 길의 시원은 경제력이나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너라, 야곱의 족속아! 주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이 말씀은 지금 이 선포를 듣고 있는 백성이 여전히 기존의 논리에 매여 있는 현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힘에는 힘으로, 군사력에는 군사력으로 대응하는 그 세계 안에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자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이 격언을 따르는 길이 아니라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는 격언을 따르는 길의 의미, 그 의미를 사실 오늘 한반도의 현실에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군사적 동맹을 강화하고, 최신 무기를 도입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함으로써 긴장과 갈등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북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광폭질주 하고 있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하였을 때 평화적 해법에 대한 기대를 안게 되었고, 사실은 지금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싶지만, 지금 당장의 국면은 불안하기 짝이 없고, 정부의 대응책 또한 갈팡질팡인 것으로 보입니다. 느닷없는 사드 추가 배치는 사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관된 평화적 해법이야말로 지금의 사태를 타개해가는 실질적인 방법이 될 것이며 국민의 불안을 떨쳐내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북한이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속내가 대화를 하자는 것 아닐까요? 평화적 해법은 우리의 운명이 걸린 문제요, 또한 긴장이 고조된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타개할 유일하고도 실질적인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바로 오늘 우리들이 처해 있는 사태 한 가운데서 오늘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정말 절절하게 새기기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본문말씀이 지향하는 그 뜻과 너무나도 거리가 먼 현실을 깨닫게 되지만, 거꾸로 그러기에 더욱 절실한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예언을 선포한 이사야와 동시대 예언자 미가는 오늘 본문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선포하면서 거기에 더하여 또 하나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말씀에 연이어 미가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미가 4:4)
농사꾼 출신다운 예언자의 선포입니다. 자기가 흘린 땀의 결실을 맛보며 평화로운 일상의 삶을 누리는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평화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지 전쟁없는 상태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평화를 이루는 것, 일체의 폭력과 강요,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와 불안이 사라진 삶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평화를 이루는 길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함께 생각했습니다만,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그 성서의 말씀을,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데 위기의 핵심이 있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끝마다 달고 다니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운전사를 종 부리듯 한 회장님, 공관병을 역시 종 부리듯 한 장군님이 모두 장로님이라고 하지요. 더 훌륭한 기독교인, 더 훌륭한 장로님들이 있다고 믿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에게 비친 기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목소리 높여 외치는 기독교와 그 기독교인들은 별개가 아닙니다.
그런 정신과 그런 입장으로는 오늘 이 세계에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새기면서 진정으로 평화의 길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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