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 출애굽기 13:20~22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12-31 14:10
조회
9051
2017년 12월 31(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본문: 출애굽기 13:20~22

2017년 한 해의 마지막 주일, 게다가 오늘은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때이면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 맞이할 시간을 예비하며 삶의 자세를 가다듬기 마련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어떻게 살아 왔고, 앞으로 맞이할 시간 어떻게 살아갈까요?

바로 그 물음을 던지게 되는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출애굽기 본문말씀을 함께 마주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 범위로 한정할 것 같으면, 그 내용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백성이 광야 사막의 여정을 나서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길을 비추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먼저 그 전후 문맥을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에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은 이집트의 최고권력 파라오와의 질기고 질긴 투쟁 끝에 이집트를 탈출하게 됩니다. 드디어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자유의 여정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의 바로 앞부분에서는 심상치 않은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집트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이르는 길은 최단거리로 말하면 지중해 연안을 따라 가는 육로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오늘날 팔레스타인 자치구가 자리잡고 있는 가자를 경유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한 경로는 지름길이 아니라 광야를 경유한 우회로였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앞서는 말씀은 불레셋 사람들이 사는 해안 지름길을 따라 가다가 전쟁이라도 치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지레 겁먹고 이집트로 되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우회로로 인도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복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투를 치르는 것으로 성서는 전하고 있지만, 전투 경험이 없는 노예들로서 이제 막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설명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사연은 다른 데 있습니다. 이 사실은 지름길이 없는 역사적 현실을 말해 주고 있으며, 자유의 소중함을 자기 몸과 마음에 새기는 여정의 소중한 의미를 강조합니다. 신명기에서는 그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신명기 8:2)
성서가 전하는 출애굽의 여정은 단순한 하나의 실증적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가장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일종의 서사시입니다. 그 점에서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는 인간 삶의 정황을 통찰할 수 있도록 빛을 던져 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삶의 양태, 인간 삶의 여정 가운데 부딪힐 수 있는 여러 국면들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 또한 그 중요한 하나의 국면, 하나의 양태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유를 향한 여정, 해방의 여정은 지름길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진실을 오늘 본문말씀은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우회로로 접어든 까닭에 불가불 홍해를 건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홍해를 건넌 이야기 역시 초자연적 사건을 체험했다는 것을 전하는 데 근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전하는 데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놀라운 사건을 앞둔 백성의 상황입니다. 이집트쪽 홍해변을 따르는 백성들의 여정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 과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는 우선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백성의 여정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상징 같지만, 다른 고대의 종교적 상징과 비교할 때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 머무는 분이 아니라 백성의 삶의 여정 그 자체 안에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백성과 함께 하는 하나님에 관한 표상이 어째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일까요? 그것은 성서 줄거리로 보면 훗날 시내 광야에서의 체험이 반영된 것일 겁니다. 아마도 화산이 폭발할 때 치솟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현상으로 인식한 탓일 겁니다. 나중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보면, 온통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불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19:18).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렇게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여정 가운데 동행하는 하나님을 표상하는 것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백성들에게 두 가지 역할을 맡습니다. 하나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이요, 또 하나는 보호하는 역할입니다. 길을 안내하는 역할은, 그것이 앞에서 방향을 지시함으로써 백성을 인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보호한다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사막의 조건을 이해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막의 환경은 내리쬐는 때약볕 아래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낮의 구름기둥은 그늘을 만들어줌으로써 백성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사막은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큽니다. 따라서 밤의 불기둥은 차가운 밤기운 탓에 추위에 떨지 않도록 온기를 더해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이 단순한 이야기는 인간의 보편적 갈망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앞길을 인도해 준다는 점에서 자유의 갈망을, 그 여정을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점에서 안정의 갈망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깨우쳐주고 있는 진실은, 하나님 안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주어진 한계상황을 돌파하여 자기 자신을 구현하려는 갈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꿈을 갖는 것, 그것은 주어진 한계 상황 가운데 머무르지 않고 더 높은 이상을 구현하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자유에의 열망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주어진 어떤 안정적인 조건을 필요합니다. 삶을 지탱해주고 보호해주는 조건 없이 또한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조건으로부터 나아가 어떤 사회적 조건이나 지위 등으로 구체화되는 것들입니다. 이 양 측면을 생각할 때 자유를 향한 열망이 인간의 삶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몫을 한다면, 안정을 향한 희구는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틀과 같은 몫을 합니다. 어쩌면 끊임없이 그 양자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의 삶이 영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없는 안정은 노예의 삶으로 귀결될 수 있고, 안정 없는 자유는 혼란과 불확실성 가운데 두려운 삶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은 인간 삶의 필수적 요건에 해당합니다. 프로이드는 말하기를 인간문명은 양자 사이의 교환이요 거래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회, 건강한 삶이란 끊임없이 양자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부단한 운동이 지속되는 사회, 그런 삶일 것입니다. 마치 시계추가 왔다갔다 하듯 말이지요. 한쪽으로 기울면 그 반대편으로 당겨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떨까요? 안정을 위하여 자유를 속박당하는 삶의 형국이 더욱 두드러지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문제는 진정한 삶의 안정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일반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그야말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위기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추를 반대편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 추를 한쪽에 붙잡아두려는 힘이 여전히 강고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지난 시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요? 저마다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저마다 그 답이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며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는 어떤 행보 가운데 있을까요? 오늘 우리 교회는 이번 주간으로써 사실상 18년을 꽉 채우고 다음 주일 신년 첫 주일이면 18주년을 맞이합니다. 지난 18년간 우리의 교회는 어떤 행보를 해왔을까요? 저 한 사람의 몇 마디로 온전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목회자로서 의지와 자세만큼은 진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8년의 여정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감히 말하건대 자유를 향한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위적일 뿐 아니라 자족적이고, 나아가 자폐적인 교회 질서와 신앙 풍토에 젖어 있는 한국교회 현실에서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교회 질서와 신앙 풍토 형성을 위하여 꾸준히 걸어온 여정이었습니다. 어쩌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교회현실이었기에 그 반대편으로 교회를 이끌기 위한 분투의 과정이었습니다. 미약하지만 적어도 문제의식과 지향성만큼은 뚜렷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로서 솔직히 고단한 과정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희망과 기대를 안고 있는 만큼 기쁨을 누렸지만, 현실적으로 부딪힌 내외적인 난관과 그로 인한 고단함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격려와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비방과 힐난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목회자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건축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는 교회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느꼈고, 저의 삶 중요한 부분 또한 날아가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18년을 잘 버텼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생존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안적 모형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여러 위기를 넘겼고, 교회의 존재감을 가시화하는 안정적 조건도 갖췄습니다.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되지만, 이만큼의 조건을 갖춘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진정으로 우리 사회와 교회의 현실 가운데서 정말로 의미 있는 대안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연단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광야에서의 단련과정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고, 우리의 부족함이 한없이 드러나는 어떤 계기들을 또 맞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예비의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의미있게 드러내는 과정일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 가운데서 그 과정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최근 이러저러한 일들을 계속 맡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새롭게 맡겨진 일은 없습니다. 계속해왔던 일들, 특별히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사회선교)와 관련된 일, 그리고 그 전통을 성찰하는 연구와 관련된 일들을 지속하고 있습니다만, 그와 관련하여 책임적인 지위를 부여받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그 일들을 개인적 성취나 역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안살림교회의 대표(선수)로서 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자의식을 떨친 적이 없으며, 일이 맡겨지는 배후맥락 역시 천안살림교회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의 공적 역할의 대부분은 우리 교회에 대한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교회를 바로 세우고, 세상 한 가운데서 진정한 교회로서 제 몫을 하게 하는 것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을 이루는 데 우리 모두가 행복한 동반자, 도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우리들 저마다 각자의 삶이 또한 이 교회 공동체의 몫이 진정으로 의미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의 의미가 진정으로 살아 움직이기를 기원하며, 그 말씀의 의미를 따라 각오를 새롭게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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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