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름다운 포도원 - 이사야 5:1~7[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2-25 14:22
조회
8966
2018년 2월 25(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아름다운 포도원
본문: 이사야 5:1~7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은 아름다운 명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서 도처에 명문들이 담겨 있지만, 오늘 본문말씀은 그 가운데서 빼어난 명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명문은 언제든 반복해 읽어도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명문의 조건이 무엇일까요? 그저 미사여구로 가득 차 있으면 명문이 될까요? 그 명문이 되는 조건은 언어적 기교 이상을 함축하는 것일 겁니다. 진실을 담고, 위대한 정신의 세계를 담아 그것을 가장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때 정말 아름다운 명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성서가 인류의 구원의 도를 깨우치는 보편적 정신세계로 승화될 수 있게 해 준 핵심적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아주 쉽고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빼어난 명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번역본마다 한결같이 “포도원의 노래”라고 소제목을 붙이고 있는 이 말씀은 먼저 아름다운 포도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은 완전한 시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가는 포도를 수확하는 축제의 절기의 낭송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떻게 낭송되었을까요? 아마도 우리의 판소리와 가장 닮은 형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노래하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포도원을 가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노래로서,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기 위해 땀과 정성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하는 사람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포도원은 기대했던 결실을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으로 첫 대목은 끝을 맺고 있습니다. 모든 노력과 정성이 허사가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이 노래가 축제 때 낭송되었다고 생각하면 좀 이례적이기는 합니다. 수확의 기쁨을 천진난만하게 노래하기보다는 결론의 반전으로 오히려 온전한 수확을 거두지 못한 현실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이 노래가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노래는 그저 밭에서 거둬들인 수확을 그리고 있다기보다는, 바로 그 포도원을 보면서 공동체의 삶의 차원 전반을 되돌아보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목에 이어 다음 대목으로 접어들면서 화자가 바뀝니다. 화자는 그 포도원을 가꾼 바로 그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외칩니다.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아라.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이것은 포도원을 가꾼 하나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노래를 듣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리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물리적 공간으로서 포도원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공동체를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립니다. 포도원은 바로 지금 노래를 듣고 있는 자신들을 말하는 것이고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 때문에 포도원, 곧 자신들이 결실을 내지 못하게 되었는지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노래는 그 진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노래는 이어서 결실을 내지 못한 포도원이 처해질 운명을 선포합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결실을 내지 못하는 황폐화되리라는 선포입니다. 노래는 여기에서 사실상 끝나지만, 그 말미에 그 의미를 짤막하게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이것이 이 노래가 담고자 한 뜻입니다. 이 노래는 바로 그 진실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들려준 노래인 것입니다. 포도원이 마땅한 결실을 내지 못한 현실, 그것은 정의가 사라진 현실을 말합니다. 나무가 튼실해 보이고 잎이 무성해 보이면 뭐합니까? 마땅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무가 뭔가 병들었을 때, 아니면 멀쩡해 보이고 잎이 무성하지만 뭔가 영양의 균형이 깨져 있을 때 나무는 마땅한 열매를 내지 못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보기에 지금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언자들의 공통된 메시지를 다시 확인합니다. 아무리 나라와 민족이 번성한 듯하여도, 옳은 일 곧 정의가 없다면 쓸모없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와의 동시대 예언자인 아모스, 미가의 예언과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입장에서 이 선포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시대 예언자인 아모스와 미가는 그야말로 변방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양치기요 뽕나무를 기르는 농부, 또는 지방의 서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불공평한 당시의 현실은 쉽사리 보였습니다. 반면에 이사야는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활동한 사람이었고 그 출신 또한 유력했습니다. 그런 만큼 그의 신학 또한 그 지위에 어울릴 만한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왕도신학’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도성과 하나님이 세운 왕조는 어떠한 경우라도 지켜주신다는 신학적 입장입니다. 그런 입장을 갖고 있는 이사야에게도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의, 유력자들의 횡포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력자들이 횡포를 저지르고도, 그래서 사회에 정의가 무너졌는데도 존속할 수 있는 사회는 없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강조한 왕도신학, 곧 왕조와 왕도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 비춰볼 때 더 근본적인 진실은 그 왕도에 정의가 이뤄지고, 그 왕조가 정의를 지키는 한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것보다도 ‘내가 선택한 네가 해야 할 바는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 선포가 보편적인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년들과 더불어 지난 주일까지 <히브리민중사>를 중심으로 구약성서의 세계, 그리고 예언자들의 정신세계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 보편적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곧 인간 사회 안에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것 아닙니까? 이를 위하여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 저마다의 인간의 내면을 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 성서의 메시지,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초점입니다. 일찍이 문익환 목사님은 “정의는 사랑의 사회적 번역”이라고도 했습니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 정의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빗대어 말하면, 진정으로 아름다운 포도원이라는 바로 그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실은 어떨까요? 엊그제 저는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사순절 기도회에 함께 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몫을 맡았습니다.
오늘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여러 사회적 약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여러 형태의 소수자들은 말할 것 없거니와, 사실은 다수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보장의 측면에서 소수자요 약자가 되어버린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희망을 안게 되었습니다. 촛불을 함께 들었던 모두의 마음은 단지 정치권력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희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거리의 시민과 일터의 노동자들이 분리되었던 1987년 항쟁과 달리 평범한 시민과 노동자들이 광장에서 하나가 된 촛불항쟁은 그 간절한 희망의 발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현실은 여전히 팍팍합니다. 지난 해 수출규모로만 보면 세계 6위에 이른 경제대국 한국에서 그 주역인 노동자들의 상황은 최악입니다.
부끄럽게도 한국사회는 아직도 노동자의 기본권리가 정당하게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노동조합 조직율은 10.3%로 낮은 상태이고, 곳곳의 사업장에서 노사간 협의는 결렬을 겪고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고공으로 나서 절규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선택으로서 단체행동 또한 처벌의 대상이 되어 극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산업재해 또한 빈발하여 매년 세월호 희생자 6배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산재로 하나뿐인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나마 일하는 노동자들의 절반에 이르는 이들이 비정규직의 굴레에 매여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처해 있고 극심한 임금차별로 최저생계비도 보장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촛불항쟁으로 탄생한 새 정부가 일자리 대책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최저임금의 인상을 추진하고 있지만, 지금 그 취지가 무색해지는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공공부문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예외의 대상이 남발되고 있는가 하면 변형된 형태의 정규직화로 이른바 ‘중규직화’라는 사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 정규직의 반발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자체가 난항을 겪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최저임금의 인상 역시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으며, 여전히 최저생계비를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생활고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갖가지 이유로 생활고를 겪고 있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정책과 제도가 지금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문명국가의 기본규범이자 동시에 국제사회의 공통규범으로서 노동삼권은 완전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로 그 어떤 불이익도 겪어서는 안 되며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생활인으로서 삶의 향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 기본권이 보장되는 바탕 위에서 당면한 과제로서 비정규직화의 정규직화, 최저임금의 인상 정책 역시 해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상시지속적인 업무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정규직화해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그 현실적 해법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자발적인 선택을 포함하여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비정규직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이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고용과 근무의 형태가 차별의 요인이 되는 사태를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사회적 정의와 공정성의 기준을 합의할 수 있는 각계의 노력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는 광범위하게 비자발적인 비정규직의 형태를 허용해 온 까닭에 제한된 상시 정규직이 일종의 특권으로 인식되어 온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공정성의 문제는 사실상 그 특권체제를 상식적인 것으로 용인하는 전제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정규직을 보장하는 절차만이 유일한 공정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다양한 공정성의 기준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충분한 기회가 허용되고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보장받도록 하는 절차에 대한 합의가 사회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다수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의 행사 차원에서 약자로 전락한 평범한 이들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지당한 그 기대와 요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 이로부터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피웁니다.

오늘 예배는 특별히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는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의미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그저 격려하고 유익한 교훈을 주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어째서 팍팍한 우리의 현실을 확인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의 현실을 어찌할 수 없는, 그저 숙명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삶의 환경으로만 간주하고, 그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승리할 것인가를 일깨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이 마땅하지 않다면 그 삶의 현실을 바꾸는 것, 그 삶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를 갖는 것, 그것이 더 소중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교양과목을 강의할 때 꼭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로 제출하는 한 문항이 노동삼권에 관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답을 맞추는 학생이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도대체 교육이 어찌 되어 오늘의 삶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 소양도 갖추지 못하게 되어 있는가 반문합니다. 독일과 같은 곳에서는 이미 학교에서 노사관계에 대해 충분히 공부를 하기 때문에 노사관계가 훨씬 평화롭고 그만큼 사회적 비용이 대폭 절감됩니다. 우리의 교육이 결여된 구석이 많다면 어딘가에서는 그 결여를 메워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사회적 실천으로서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회선교를 지향하는 교회의 몫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에 전도사님이 선물을 준비하는데, 고등학교 졸업자들을 위한 선물을 선정한 것을 두고 혼자서 빙긋이 웃었습니다. 뭘까요? 남자라면, 아니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알아야 할 어떤 삶의 지향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절실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정말로 말씀의 의미를 새기고, 그렇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이 알까요?^^

우리의 모든 세대들이 더불어 진정으로 아름다운 포도원의 열매를 누리는, 그런 세상을 이룰 수 있도록, 꿈을 지니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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