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분기점 - 베드로전서 1:13~21[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3-04 15:34
조회
8795
2018년 3월 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분기점
본문: 베드로전서 1:13~21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베드로전서는 이른바 박해서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사회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록 시기가 유명한 네로 황제의 박해 시기(64년)인지, 아니면 소아시아지역까지 처음으로 박해가 행해졌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시기(96년)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로마의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박해의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교의 근본 도리가 무엇인지, 그 근본 도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일깨워 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라는 것이 서신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 역시 크게 보면 그와 같은 맥락에서 권고된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구체적 덕목을 제시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근본 도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기본적으로 나그네들에게 전해진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1장 1절을 보면 그 수신인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출신이 다양한 이방인들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말하는가 하면,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실존 그 자체를 나그네로 인식하는 전제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첫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십시오.”(표준새번역) 여기서 ‘마음을 굳게 먹고’라는 표현은 직역을 하고 있는 다른 번역본(개역)을 볼 것 같으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나그네의 행장을 말합니다. 먼 길 떠나는 사람이 옷이 흩날리지 않도록 허리띠를 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려서’는 ‘근신하여’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길 떠나는 사람의 정신적 자세를 말합니다. 허리띠를 동여매는 자세에 상응하는 정신적 태도를 말합니다. 어떤 분명한 목적지를 향하여 길 떠나는 나그네의 자세입니다.
결국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나그네는, 처음에는 실제 어중이떠중이로서 나그네를 함축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떤 뚜렷한 목적을 향하여 길을 떠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그네가 됩니다. 처음 나그네의 의미는 곤고한 삶의 실상을 말했다면 그 다음 나그네의 의미는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능동적 삶의 지향을 함축한다고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잘 것 없는 존재가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그네로서의 삶 자체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에 놀라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전에 알지 못할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알지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이 대목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전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 그 요체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사는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재차 강조됩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시대 욕망을 따르는 삶의 방식,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삶의 방식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거룩하게 사는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무지의 시대의 삶의 방식,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삶의 방식은 당대 이방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한 단면을 말합니다. 운명의 굴레에 매여 주술적 행위를 반복하는 삶, 그 안에서 스스로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어 하는 욕망을 따르는 삶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하는 모습은 어떤 문화 어떤 세계에서나 다르지 않지만, 그 현실에서 어떤 희망을 기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고대 이방종교에 젖어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중요한 한 가지는 축제일을 꼽고 그 축제일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 큰 관심사입니다. 그것을 적절히 지키는 것이 저마다의 삶의 안위를 보장해준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귀신이 많은 세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 세계는 주어진 현실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고 따라서 좀처럼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고차원의 윤리도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 점에서 확연히 구별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추상적인 언명이 아닙니다. 그 주술적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다’고 하면 곧바로 종교적이고 신성한 어떤 것을 연상하지만, 구약성서로부터 이어지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할 때, 본문말씀의 문맥을 통해 볼 때, 그 의미는 거룩한 하나님을 닮는 삶을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 삶을 살았을까요? 한마디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이웃을 돌보고, 심지어는 주인없는 시신을 거두어 주는 등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그 삶을 구현하였습니다. 주술에 의존해 구원을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일상 가운데서 펼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알지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표준새번역)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개역한글)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개역개정)
표준새번역은 ‘해방’이라고 번역했지만, 개역이나 그 개정판은 ‘구속’ ‘대속’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의 교리적 관념이 굳혀졌는데, 본래 개념 자체로 보면 ‘구속’ ‘속량’이 맞고 그것은 전쟁포로나 노예를 돈을 주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다’는 것도 금전을 통한 속량의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었다’고 하는 말이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사실상 주술적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그냥 받아들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합니다만,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깨우치고 그 의미를 깨우친 자로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 교리적 명제는 공허한 일종의 주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확고하게 믿는다 한들 삶의 변화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공허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를 지니려면, 단지 사랑을 실천했을 뿐인 무고한 분이 가장 극악한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내가 거기에 동참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기에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믿고, 무고한 희생을 강요하는 삶의 질서에 저항하고 진정한 삶을 추구하고 그 삶을 살아갈 때야 비로소 그 말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믿음을 따르는 삶이 가능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되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더 이상 죽음에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죽음과 같은 삶에 매이지 않고 진정한 해방을 만끽하는 삶을 누리는 희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러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거룩한 삶입니다.

어느 한 지점에, 어느 한 시점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의 삶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헛된 생활을 뒤로 물리고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삶은 종교적 차원에 한정되는 삶이거나 내면세계에 한정된 삶이 아닙니다. 그 삶은 우리의 역사적 차원에서, 현실적 삶의 차원에서 마땅히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지는 2장 12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엊그제 우리는 3.1절을 보냈습니다. 3.1운동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독립국의 자주민으로서 세계만방에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도의를 펼친 사건 아닙니까? 그 사건은 어떤 불의와 억압도 용인할 수 없다는 숭고한 정신의 발로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일제의 억압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국권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 의미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권 확립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 사건을 기점을 이전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가 구별됩니다. 그만큼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그야말로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뜨겁게 하는 ‘미투(Me too)’ 운동 역시 성 인식에 대한 중요한 하나의 분기점일 것입니다. 그 이전과 이후를 확연하게 가르는 하나의 분기점입니다. 이전에는 잘못된 것인지 몰랐던 데서 이제는 무엇이 잘못인지 확연히 알게 된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이 바뀐 시대를 남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관련기사들이 언론에 연일 계속 나오고 있는 가운데,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띠었습니다. “유독 일본만 ‘미투’ 운동에 침묵하는 이유”라는 기사였습니다. 체제에 대한 순응이 강한 문화적 풍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지도 않은 일본 정부의 입장, 이에 대해 일반인들이 침묵을 지키고 그 피해들을 동정하지 않은 여론...이런 현상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 해외언론의 진단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 그 믿음을 지키는 삶은 확연히 구별되는 삶의 방식을 요청합니다. 이전과 이후가 다르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과 삶에서 한없이 겸손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 믿음과 삶을 지키는 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 자각 가운데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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