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랑을 이루어가는 삶의 여정 - 요한1서 1:5~2:6[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6-17 13:42
조회
14969
2018년 6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랑을 이루어가는 삶의 여정
본문: 요한1서 1:5~2:6 (2:3~6)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한 명제로 집약되는 요한1서 서신의 한 대목을 오늘 우리는 함께 읽었습니다. 앞뒤로 쭉 이어지는 말씀이지만 2:3~6까지만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의 요체는 간결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2:5)
바로 이 구절 가운데 오늘 말씀의 요체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저 절대자를 향한 일방적 섬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사랑을 구현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와 서신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 사랑이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지향할 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서 사랑이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형태로 소유된 것과 같은 상태가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삶의 여정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성되어 이미 소유한 것과 같은 상태와 완성을 지향하는 여정 가운데 있다는 것의 차이가 어째서 중요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실존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얼마만큼 진실한 이해를 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차이가 갖는 의미는, 사실 오늘 본문말씀(1:5~2:6) 전체,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말씀의 문맥을 충분히 살펴볼 때 제대로 드러납니다.
1장 5절 이하의 본문말씀은 빛과 어둠의 표상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실존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1:5~6) 이 말씀이 함축하는 뜻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빛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을 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1서는, 이 서신이 대결하고 있는 영지주의의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이야기했지만, 초기 기독교가 가장 심각하게 대결한 사조 가운데 하나가 영지주의입니다. 다른 서신서들도 그와 대결하는 상황을 자주 드러내고 있지만,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은 특별히 그와 정면대결을 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전형적인 이원론을 전제로 하여 육체의 가치를 부정하고 오직 영적 지혜만이 구원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교회 안에도 그런 믿음은 상당히 널리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요한서신은 바로 그렇게 교회 안에 유포되어 있는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배격하고 복음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 영지주의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원론을 전제로 합니다. 그 이원론은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로 나눠진 것이 신성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빛의 신과 어둠의 신이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불가불 두 세계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입니다. 그 믿음을 따르는 이들은, 빛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의 지혜를 소유할 수 있다면 영원한 구원을 성취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육체적인 삶과는 상관없는 전적으로 영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서신은 그 영지주의적 용어를 차용하기는 하되, 그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말씀은 빛과 대립되는 어둠을 신성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밝은 빛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어둠 속에 살아간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둠이 인간 삶의 어떤 한 방식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자, 이 차이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적으로 말하면, 빛과 어둠을 신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와 직결시켜 분열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숙명론을 의미한다면, 빛이 하나님의 본성이요 어둠은 인간 삶의 한 방식이라는 이해는 그 숙명론을 넘어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빛의 신이든 어둠의 신이든 어느 한편에 붙잡혀 있다면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주체로서 나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신은 빛이요 그 빛 가운데 내 삶이 밝은지 어두운지 판별할 수 있다면 나에게는 선택의 가능성이 주어집니다. 결단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중요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물론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숙명론으로 이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분투의 결과 신의 빛을 보았고 그 빛 안에 산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믿음은 지적인 오만과 맹신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더우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1:8~9)
이 말씀은 그 지적 오만과 맹신을 먼저 경계합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이 말씀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특정한 신앙의 경향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빛, 곧 영적 지혜를 소유했으니 더 이상 어둠에 빠질 까닭이 없다는 오만과 맹신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오만과 맹신은 변형된 형태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정반대의 상황을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더우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빛이신 하나님 아래 우리의 빛과 어둠을 분별하는 성찰적 신앙을 말합니다. 내가 이미 완전하게 빛을 소유했다는 의식이 아니라 그 빛 아래서 나의 삶을 돌아보는 겸허한 성찰을 동반할 때 나는 비로소 빛의 삶을, 의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빛을 한 순간에 소유했다고 믿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 빛 아래서 보니까 허물이 있다는 것을 자백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실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그러한 말씀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2:3)은 하나님의 빛 아래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곧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을 구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2:5)을 뜻한다는 것을, 본문말씀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사랑을 이루어가는 삶의 여정일 뿐입니다. 그 여정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겸허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겸허한 삶이야말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합니다. 내가 마치 당장 완전한 진리를 소유한 듯이 행세하는 사람 치고 진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찌된 것인지 한국교회 안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신앙 좋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끼치는 해악을 생각하면, 오늘 말씀이 일깨워주는 진실을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그야말로 오늘 우리가 얼마나 극적인 세대를 살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해주는 일을 두 가지나 한꺼번에 겪었습니다.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6월 13일 지방선거입니다. 둘 다 놀랍지 않습니까?
곡절 끝에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었습니다. 한편에서는, 특히 한국사회 일각에서, 그리고 미국사회의 언론에서는 별 성과 없는 회담이었다고 깎아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별로 구체적인 알맹이도 없고, 특히 그렇게 미국이 강조해왔던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말도 빠졌다는 것 때문입니다. 결국 북쪽이 최대의 승자가 되고 미국이 놀아났다는 식으로 폄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른바 일괄타결, 한순간에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까요? CVID란 사실상 인간의 지적 능력과 기술적 능력을 제거하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요 환경조성의 문제이며, 그것은 점진적 해결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한 한 단 기간 안에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서로 약속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북한이 한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미국이 양보했다는 것도 틀린 이야기입니다. 먼저 북한이 취한 조치는 명령 하나로 군사훈련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조치보다 훨씬 강도 높은 조치였다는 것을 왜 보지 못하는 걸까요?
애써 북미정상회담의 성과를 깎아내리려는 주장과 시선은 사실상 상당한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과 자신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잘못된 맹신에서 비롯된 견해일 뿐입니다.
6월 13일 지방선거의 결과는, 평화를 지향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그렇게 오만과 맹신에 빠져 반성할 줄 모르는 정치세력이 어떤 심판을 받게 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현재 집권여당이 그렇게 높은 득표를 하게 된 것이 그만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대다수 국민들이 압니다. 예를 들면, 실제 서민들의 생활과 직결된 최저임금법안을 가결시킨 것만 해도 현재 집권여당에 허점이 많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높은 득표율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평화의 시대를 거스르며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습니다.

냉혹한 현실세계 안에서 모든 상대를 불신하고 의심하는 것은 불가피한지 모릅니다. 특히나 정치적 집단이나 국가집단 사이에서는 더더욱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 삶이, 집단 간의 관계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개인적 관계만이 아니라 집단간의 관계 역시 선의와 신뢰의 관계로 맺어질 수 있습니다.
“회담정신은 (남북화해를 상징하는) 소나무 정신으로, 회담속도는 만리마 정신으로, 회담원칙은 서로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원칙으로 하자.” 지난 6월 14일 남북장성급회담시 북측 대표가 한 말입니다.
선의와 신뢰를 기초로 관계를 맺고 어떤 제도를 형성하느냐, 악의와 불신을 기초로 어떤 관계를 맺고 제도를 형성하느냐 하는 것은 큰 차이를 낳습니다. 물론 의지만의 문제가 아니고 조건과 환경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개인간의 관계는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간의 관계는 그럴 수 없기에 정치가 필요하고 통찰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힘의 우위에 의한 미국의 대외정책을 정당화했습니다. 일단 그가 통찰한 바는 냉혹한 현실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점에서는 훌륭하지만, 그는 역시 냉전시대의 한계를 지닌 신학자요 윤리학자였습니다.
여전히 현실은 냉혹하기에 그 통찰이 여전히 의의를 지니고 있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볼 때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확실히 인간 문명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합니다. 온통 밝은 하나님의 빛 안에서 저마다 겸허한 성찰을 동반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을 나누는 삶을, 오늘 말씀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한순간에 성취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일괄타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희망을 저버리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사랑을 성취해가는 여정에 있다는 것을, 평화를 이뤄가는 여정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충분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희망을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희망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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