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 그리스도를 반기고 따르는 삶 - 마태복음 2:1~12[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1-06 15:53
조회
34275
2019년 1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 그리스도를 반기고 따르는 삶
본문: 마태복음 2:1~12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말씀본문을 보면서 의아해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건 아기 예수 탄생 기사로 성탄절에 읽는 말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것입니다. 성탄절에, 특별히 어린이들에게는 아마도 가장 빈번히 읽혀지고 선포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본문말씀은 주현절의 뜻을 새기는 가장 적절한 말씀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주현절(主顯節, Epiphany “주님이 나타난 날”), 공현절(公現節 “공식적으로 나타난 날”) 또는 주님 공현 대축일로 불리는 이 날은 예수의 출현을 축하하는 교회력 절기입니다. 날짜는 전통적으로는 1월 6일이나, 나라에 따라서는 1월 2일부터 8일 사이의 주일(일요일)로 하기도 합니다. 아니, 예수님의 탄생일이 있는데, 또 무슨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신성이 나타난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 이해하면 됩니다.
물론 그 계기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이해가 다릅니다. 서방교회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때로 받아들이고 있고, 동방교회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때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1월 6일을 그 기점으로 보는 데서는 일치합니다.
얼마만큼 사실에 부합느냐고 묻는다면, 성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태도를 해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뜻을 기리는 하나의 방식이지, 곧이곧대로 특정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절기를 따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주는 의미를 깊이 되새겨보는 하나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곧 좁은 의미의(실증적 의미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은 날을 기념하는 주현절이어서, 성서일과를 따라 오늘 본문말씀을 함께 나누게 된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기기에 앞서 이 말씀이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자극해 왔는지 먼저 되새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 전혀 다른 스토리로 그 사건을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뚜렷하게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세계사적 사건으로 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은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절 일어난 일로서 전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그 누구보다 동방의 박사들이 반기고 있다고 전함으로써 그 성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본문말씀은 그 동방박사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과연 누구인지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상상력이 펼쳐졌습니다. 통상 동방이란 유대 땅이 아닌, 가깝게는 아라비아, 바빌론이나 페르시아, 더 멀리로는 인도로 상상되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판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그럴 듯 할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지배, 그리고 그 괴뢰정권으로서 헤롯 대왕이 통치하는 유대 땅에서 일어난 사건을 둘러싸고 그와는 전혀 다른 영향권으로부터 온 현자들이 예수를 반겼다고 전하고 있는 점이 중요합니다.
7세기경부터는 아예 그 세 동방박사의 이름을 확정하여 전하는 전통이 확립되기도 하였습니다. 황금을 바친 노인 모습의 현자로서 멜키오르(Melchior), 몰약을 바친 중년 모습의 현자로서 발타사르(Balthasar), 유향을 바친 청년 모습의 현자로서 카스파르(Caspar)가 그 이름입니다. 이들은 인류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각각 백인, 흑인, 황인으로 그려지기도 했고, 왕으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이 주인공들은 과거 역사에서 상상력을 촉발시킨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데, 예컨대 <신세기 에반겔리온>에서 슈퍼컴퓨터의 각 부분 명칭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온라인 게임 <리니지>에서도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헨리 반 다이크의 소설 <4번째 동방박사>일 것입니다. 이 소설은 알타반이라는 네 번째 박사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알타반은 다른 세 사람과 함께 하려 했지만, 도중에 늦어져 혼자서 예수를 맞으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루비, 청옥, 진주 3가지의 예물을 준비해 여행을 떠났으나, 도중에 가난한 사람과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느라 루비와 청옥을 써버리고 예수도 만나지 못한 채 33년이 흐르고 맙니다. 그가 지치고 피곤한 상태로 예루살렘에 당도하였을 때는 예수께서 처형되는 날이었습니다. 알타반은 기겁해서 자기에게 마지막 남은 진주를 주어서라도 메시아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골고타 언덕으로 달려가는데 도중에 또 불쌍한 사람을 만납니다. 알타반은 갈등하지만 결국 진주마저 주어버리고 허탈해 하는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머리에 기왓장을 맞게 됩니다. 그는 숨지기 전 결국 자신은 예수에게 예물을 드리지도 못하고 간다며 용서를 빌자, “네가 구한 불쌍한 사람들이 모두 나였다.”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허구이기에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더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야기 아닐까요? 우리의 신앙이 그런 상상력을 제약한다면 그 신앙은 활력 없이 박제화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말씀을 마주하면서 펼칠 수 있는 모든 상상을 열어두되, 본문말씀이 전하는 이야기 자체를 다시 한 번 주목해보겠습니다.

저 하늘 높이 반짝이는 별을 보고 메시아가 태어날 징조임을 알아차린 동방의 박사들은 길을 나섭니다. 별이 인도하는 대로 길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른 동방의 박사들은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를 묻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헤롯왕은 깜짝 놀랍니다. 메시아는 세상을 구원할 존재로서 진정한 왕을 뜻합니다. 유대 땅에는 자기 밖에 왕이 없는데 또 다른 왕이 태어났다니 헤롯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급히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지를 묻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성경의 예언을 보면, 옛 다윗왕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듯이 대답합니다.
안달이 난 헤롯은 동방의 박사들을 불러서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부탁했습니다. 그 태어난 장소를 확인하거든 자기도 경배해야겠으니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경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따라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을 찾았습니다. 아기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동방 박사들은 경배하고 각기 준비해 온 선물을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황금은 왕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사용하는 것으로 제사장의 역할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로 마치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이 예물을 드린 뜻은 예수님만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요, 제사장이고, 예언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동방의 박사들은 저 먼 옛날의 예언이 이제야 이루어졌음을 기뻐하며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꿈에 나타난 천사의 도움으로 헤롯왕의 속셈을 알아내고, 먼 길을 돌아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박사들이 돌아간 다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게 나타나 헤롯왕을 피해 달아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은 이집트로 피신하여 죽음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예수님은 난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랑을 전함으로써 사람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헤롯왕입니다. 헤롯왕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헤롯은 로마의 앞잡이로 유대의 왕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이 태어나니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두 살 아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말로는 예수님께 경배드려야 하겠다고 해놓고 사실은 그렇게 잔혹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다음 두 번째는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의 지도자들로 매우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도 잘 알고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예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아기가 메시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인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아무런 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메시아는 지체 높은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 동방은 아라비아나 바빌론, 아니면 페르시아나 인도일 수 있습니다. 이 동방은 옛부터 문명이 발달했고 특히 천문학이 발달했습니다. 아마도 이 동방의 박사들은 천문학자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박사들은 별을 보고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큰 별이 나타난 것을 보고 지체 없이 길을 나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경배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부류에 해당할까요? 너무나 교훈적인 물음인가요? 하지만 순진한 마음으로 그 주인공들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들 가운데 ‘예수님이 오시면 내 자리가 위험해지지!’라고 헤롯왕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요?^^예수님이 오셨는지 말았는지 알 바 없다고 생각한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동방 박사들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겠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있는지는 다시 한 번 자문해 볼 일입니다.
자, 다시 보십시오! 세 부류의 사람들 한 가운데 한 아기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두고 한 부류의 사람 곧 헤롯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사건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 곧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태어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지금 발생한 사건이 자신들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듯이 무심히 여깁니다. 그들은 어떤 두려움도 어떤 기쁨도 없습니다. 그저 지극히 반복적이고 기능적인 자기 역할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 곧 동방박사들은 오랫동안 메시아의 탄생을 갈망했을 뿐 아니라 그 머나먼 길을 달려와 경배합니다. 이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사건으로서 열 일 제치고 반겨야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유대 땅에 일어난 일을 두고 동방의 박사들이 반겼다는 것은 그 사건을 세계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새로운 세계를 꿈꾼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삶의 법칙을 부정하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장차 보여줄, 그리고 실제로 살았던 그 삶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지배의 욕망을 따라서가 아니라 섬김의 자세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만일 그 삶이 지금 나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금 나의 삶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헤롯왕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그 삶이 지금 내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고, 세상은 그저 돌고돌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그 삶에서 진정한 희망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저 동방의 박사들과 같을 것입니다.
준비한 말씀을 다시 새기고 다듬는 중 SNS를 통하여 미국의 한 신학자로부터 주현절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정곡을 찌르는 놀라운 통찰이 전달되었습니다. “주현절 이야기의 핵심은, 동방박사들이 폭군의 불의한 명령을 거부한 시민 불복종이다.”(Serene Jones, 유니온신학교 총장 트윗)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은 곧 불의한 세상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2019년 새 첫 주일이자 동시에, 우리 교회가 창립된지 19주년이 되는 날, 그러니까 이제 20년째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이 때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와 믿음이 진정으로 내 삶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자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가 그 역할을 감히 감당할 수 있을지 자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아기 예수의 탄생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의 삶을 불편하게 하거나 세상을 거스르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여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중대한 해악을 끼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사건이 스스로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주변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모르는 가운데 기존의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삶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변화되며 세상을 바꿉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교회가 그 진정한 믿음의 대열에 정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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