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말씀, 사건의 진실 - 여호수아 3:5~11, 17[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1-13 14:32
조회
35919
2019년 1월 1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말씀, 사건의 진실
본문: 여호수아 3:5~11, 17



모처럼 여호수아서의 본문말씀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고대의 종교적 관념과 표상이 짙게 배인 본문말씀인 터라, 읽고 나서도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본문말씀은 모세에 이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그 백성과 함께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당도하게 된 극적인 장면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매고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통상 성서의 첫 부분을 ‘모세오경’이라 부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합니다. 근대의 비평적 성서연구가 이뤄지기 전에는 모세가 저자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그 저자가 모세일리 없고 또한 저자가 단일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오경이라는 명칭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데, 이 때 그 의미는 모세의 율법이 중심이 되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함축합니다.
하지만 모세오경이 일종의 조문으로서 율법의 기록은 아닙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과정을 일련의 구원의 파노라마로서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그리고 있고, 마침내 그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출애굽을 전하는 대목에 이르러 그 구원의 파노라마는 절정에 이릅니다. 이집트 노예생활에서의 해방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놀라운 사건이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애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번성한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모세오경에서는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두고 모세가 백성에서 말씀을 전하고 홀연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오경의 종결입니다.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여호수아서에 이르러서입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오경’이 아니라 ‘육경’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비로소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는 첫 장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 바로 앞 여호수아서 첫 장에는 여호수아가 백성과 함께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에 앞서 정탐꾼을 보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성의 라합이라는 여인과 내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 이어집니다.
이제 비로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진입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릅니다. “성결하게 하시오. 주님께서 내일 당신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매고 백성들보다 앞서 나갈 것을 명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상자를 말하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사실상 오늘 말씀의 핵심이 되는 것이므로, 결론부에서 다시 그 의미를 환기하겠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백성들 앞에 나서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오늘부터 내가 너를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보는 앞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고,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하겠다. 이제 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요단 강의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 강에 들어가서 서 있으라고 하여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환기시키며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이제 이루어질 이 일을 보고, 당신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당신들 가운데 계셔서,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히위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여부스 사람들을 당신들 앞에서 쫓아내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온 땅의 주권자이신 주님의 언약궤가 당신들 앞에서 요단 강을 건널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놀라운 기적이 벌어집니다. 가득 차 있던 요단 강에 둑이 생겨 물줄기가 끊어졌습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강에 머무는 동안 그렇게 물줄기가 끊어진 가운데 모든 백성이 마른 요단 강을 안전하게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고 17절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을 때와 다르지 않은 기적이 재현된 것입니다. 이 기적의 사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일이 실제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새겨보아야 할 여러 가지 초점이 있지만, 번다하게 그 모든 것을 살피기보다는 그 핵심적인 요체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서 불편한 진실을 접하게 됩니다. 현대의 보편적 가치관, 윤리관으로 봤을 때 확실히 불편한 진실이 눈에 띕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어쩌면 여호수아서 전체가 현대적 윤리관에 비추어볼 때 도무지 용납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이 문제입니다. 무주공산이 아닙니다. 본문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엄연히 다른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땅입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정복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 것이라면, 모든 민족이 평화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오늘날의 보편적 가치관에서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물론 오늘날에도 많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성서의 표면적 진술을 그대로 믿고 따르며, 사실상 일종의 부족신앙의 잔재에 해당하는 믿음을 그대로 지키며 승리주의에 도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하나님이 ‘온 땅의 주권자’라면 그런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낡은 부족신앙의 잔재를 제거해버리면 될까요? 오늘날 성서학은, 도무지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서의 이 이야기를 두고 매우 치열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 땅에 이르는 과정을 전하는 이야기의 실체가 무엇인지 깊이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견해는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정복설, 이주설, 사회혁명설이 그 견해들입니다.
정복설은 외부의 세력이 가나안 땅을 무력으로 정복하여 정착하게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표면상으로 보면 성서의 진술과 가장 잘 부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주설은 일거에 군사적 정복을 통해 정착했다기보다는 점진적인 이주를 통해 정착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성서에 보면 장기간 다른 종족들과 공존하는 가운데 갈등을 겪은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군사적 경합의 양상이 성서의 표면적 기록상 부각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점진적인 이주가 정착과정의 중심적 양상이었다는 견해입니다. 마지막으로 혁명설은 하층민들이 기존의 왕권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그 하층민은 가나안 외부세력과 가나안 내부세력이 결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외부의 히브리인과 가나안의 농민세력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와 같은 탐구과정에서 내부의 저항에 부딪혀 기존의 왕권체제가 무너지고 그 위에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는 것을 추정케 해주는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신들 앞에서 쫓아내신...”이라는 표현이 그 단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나오는 라합 이야기는 외부세력과 내부세력이 연대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결정적 단서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의 관점에서 불편하게 여기는 사실이 해소될까요? 적어도 우리는, 억압적인 왕권체제를 부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살아가는 평등주의 체제를 이루고자 분투한 여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성서가 전하듯이, 어째서 보다 더 효율적인 통치체제로 받아들여진 왕권체제를 완강하게 거부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억압, 그 억압이 없는 사회, 진정으로 해방된 사회에 대한 열망과 분투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로서, 우리는 여호수아서의 성격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해방의 사건, 그 해방의 사건에 대한 체험과 감격이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민족적 배타성, 종교적 배타성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불편함이 해소되었다면, 우리는 본문말씀이 전하는 핵심적 진실에 근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핵심적 진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서 언약궤가 일으킨 기적의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있습니다. 약속의 땅, 곧 하나님 앞에서 공평한 삶이 보장되는 그 땅을 누리는 사건의 시작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진실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지만, 성서가 전하는 신앙의 고유한 성격이 이 이야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성서는 철저하게 형상을 금지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고대의 모든 종교들은 신의 형상을 세움으로써 신의 임재를 표현하였습니다. 반면에 성서의 신앙은 그 형상 대신에 말씀을, 그 말씀을 담은 언약궤로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했습니다.
형상을 거부한 것은 지금 보고 만지는 것을 절대화하는 것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뜻합니다. 지금 주어진 조건을 절대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것은 신앙을 맹목적 복종과 숙명으로 일치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그것들을 넘어 있는 진실을 추구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희망을 이끄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의 진실을 따르는 믿음, 그것이 언약궤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의 실체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참뜻은 그 말씀이 일으키는 사건의 진실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그 말씀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빈 말이 아닙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그 사건은 억압 가운데 있던 백성에게 해방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제껏 누리지 못했던 삶을 보장해주는 사건입니다. 불신과 갈등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정당한 상대로 인정해주는 사건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 사태를 지켜보며 기도했습니다. 파인텍노동자들의 굴뚝 농성, 그리고 그렇게 75미터 굴뚝에 올라간 두 노동자들이 내려올 수 있기를 바라는 종교시민사회의 지지연대 단식, 어떻게든 노사가 대화의 테이블에 앉아 타결을 지을 수 있도록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의 노력, 그 일련의 사태와 과정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10일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6차 협상이 날짜를 넘겨 11일 아침 7:30에 이르러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A4 용지 두 장에 지나지 않은 간결한 합의문(노조를 인정하고 일하게 해달라는 것, 이 약속에 대해 책임지라는 것)으로 굴뚝에 오른 사람들도 426일만에 땅으로 내려오고, 단식을 했던 이들도 단식을 중단했습니다. 그 몇 문장의 말은,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심지어 토씨 하나까지도 당사자들의 삶의 무게와 고뇌가 담긴 말입니다. 그 말의 실현을 위해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약속의 표현입니다. 이것만큼은 서로 믿을 수 있다는 신뢰, 이것만큼은 믿어야 한다는 결의를 동반한 말입니다. 그 신뢰와 책임을 다지는 약속의 말이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 말이 모두를 해방시켰습니다.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극한의 선택을 해야 하고, 모든 사람이 안타까워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을 알기에, 앞으로 또 어찌 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켜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약속으로 사태를 일단락 짓게 되었다는 데 안도합니다.
지난 7일 제가 다른 일행들과 함께 현장을 방문했을 때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차광호 지회장이 말했습니다. “한국사회가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불의보다 정의가 더 많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 말로 지지격려 방문한 사람들이 거꾸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희망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이뤄지도록 서로 소통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말씀의 진실을 믿고 따르는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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