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 - 마가복음 12:28~34[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8-25 14:27
조회
51827
2019년 8월 2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
본문: 마가복음 12:28~34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간단히 집약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주 상식적인 물음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집약되지 않습니까? 그 요체를 성서의 말씀을 따라 말하면, 구약성서의 ‘쉐마’와 신약성서의 ‘황금률’로 집약하기도 합니다.
‘쉐마!’ 즉 ‘들어라!’ 하는 말로 시작되는 신명기 6장 4~5절의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황금률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태 7:12)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누가 6:31) 이웃, 타인과의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기장 기본이 되는 태도로 모든 종교적ㆍ윤리적 가르침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원칙입니다. 이웃 사랑 역시 이와 같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황금률은 이웃 사랑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말씀으로,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말씀만 알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초보적이지만, 가장 심오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어떤 해석을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지만, 본문말씀이 전하는 정황을 헤아리는 가운데 그 뜻을 제대로 깨우치기 위하여 본문말씀을 다시 환기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일련의 논쟁적인 맥락에서 그 논쟁을 일단락 짓는 말씀으로 등장합니다. 앞의 내용을 살펴보면, 12장 13절 이하에서 이른바 세금 논쟁이 등장하고, 그 다음 18절 이하에 부활 논쟁이 등장합니다. 세금 논쟁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유발하였고, 부활 논쟁은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역시 예수님께 흠을 잡기 위해 유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 논쟁에 대해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명답으로 응수하였고, 부활 논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며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응수하였습니다.

바로 그 논쟁을 지켜보던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다가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으뜸이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구체적인 주제들에 대해 명답을 내놓는 것을 보고, 그렇다면 이 사람의 근본은 무엇일까 확인하고픈 기대에서 던진 질문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앞서 말한 신명기의 쉐마입니다. 연이어 답하십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웃 사랑을 일깨우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입니다.
그 답을 듣고 율법학자가 말합니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분은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낫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동감을 표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기가 알고 있는 율법의 정신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 대화가 있고 난 다음에는 감히 예수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함축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습니다. 구약성서에서부터 이어져온 율법의 근본정신을 환기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는 것이 그 근본정신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진실이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에 의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방법에서 여러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정신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셈입니다.

신명기의 쉐마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것을 강조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전인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지적으로 이해하고 승인하는 상태나,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상태, 또는 의례적 예배를 드리거나 그저 남들이 보기에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으로 나타내는 상태, 그 가운데 특정한 형태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형태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요체는 전적으로 자기를 초월하는 차원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의 입장과 태도를 상대화하는 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의 세계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어떤 아집도 어떤 우상도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감히 그런 삶을 산다고 어떻게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두 번째 계명이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데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받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삶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율법과 예언에서 끊임없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율법학자의 대답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라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종교적 의례에 몰입하게 됩니다. 본문말씀은 그 행위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의 표현으로서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더 낫습니다.” 하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분명한 대화를 통해 더 이상 논쟁의 여지는 없어졌다고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논쟁적 상황이 정말 종결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대화는, 다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헤롯 당원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잘못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 등장하는 율법학자를 칭찬한 것은 예수님의 진실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다른 율법학자들을 질책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마가복음은 본문말씀을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과,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사건 사이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 자신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이래로 알려져 온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말씀은 이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쟁적 맥락 한 가운데 있습니다. ‘나는 과연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가’, 본문말씀은 끊임없이 되묻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물음의 상황은 본문말씀의 이야기가 계속 전파되면서 확대되고 심화됩니다. 마가복음보다 후대에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율법학자에 대해 어떤 단서나 토를 달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명답을 하시기에 그 말씀에 탄복하여 예수님의 근본적 태도를 확인하는 역할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실을 확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통 유대인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질문자의 상황에 대해 부연함으로써 본문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스스로의 자세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마태복음(22:34~40)은 율법학자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어 보았다.”고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전인적 승인 또는 따름과는 상관없는 태도입니다. 그와 같은 단서를 감안하고 마태복음의 같은 이야기를 보면, 트집을 잡고 싶은데 트집을 잡을 수 없는 곤란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0:25~37)은 문제의 상황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마태와 마찬가지로 누가도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을 던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을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마가복음 본문말씀과 거의 동일한 대화가 이어집니다. 다만 율법학자의 첫 물음과 대화 말미의 예수님 말씀이 달라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대화가 이어지고,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연결되는 다른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로 전환하는 첫 머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의 줄거리와 그 결론을 잘 압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푼 사람으로서 사마리아 사람을 듭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의중을 꿰뚫고 일격을 가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유대인 율법학자는 자신은 계명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족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학자는 자기가 정해놓은 이웃의 범위가 확고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은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지만, 그 이웃은 자기에게 편한 이웃이요, 그 점에서 이웃의 경계는 확정되어 있고, 따라서 이웃 사랑마저도 지극히 자기중심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삶이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는 방편이 될지언정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삶을 사는 것과는 상관없는 삶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누가복음은 그렇게 문제의 상황을 철저화시키고 있고,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상황에 대한 진정한 답을 찾게 만듭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것으로 족하다’, 나아가 ‘나는 이렇게 사는데 저 사람들은 왜 저럴까?’ 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는 물음은 그 이웃의 대상을 확정하는 것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물음이 아닙니다. 그 물음에 대한 진정한 응답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하는 물음으로 바꿔 받아들일 때 진정으로 답을 구할 수 있는 물음입니다.

본문말씀의 뜻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일깨워주는 진실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고, 겸허하게 자신의 삶 가운데서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을 많이 할 것도 없고, 온갖 많은 말들에 현혹되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허장성세를 바라지 않습니다. 말씀의 진실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고 그 진실을 따르는 삶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 진실한 삶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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