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항구적 평화해법 모색의 시금석으로서 독도문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8-27 18:04
조회
2912
* 일본 기독교 월간지 <福音と世界 > 2012년 10월호 <緊急企画=国家主義を超えて>원고로 청탁받아 쓴 글입니다.

(* <福音と世界 >에서는 2012년 5월~9월까지 5회에 걸쳐 저의 글 "韓国キリスト教の権力への道"을 연재했고, 그 인연으로 이번 특집원고를 청탁받았습니다. 처음부터 일본의 독자를 의식하면서 글을 써야 했다는 점에서 어떤 논조를 펼쳐야 할지 조심스럽고 어려웠습니다. 그것도 매우 제한된 분량 안에서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청탁받은 분량을 초과해서 겨우 완성했습니다.)  

GW1210cover-thumb-205xauto.jpg


항구적 평화해법 모색의 시금석으로서 독도문제


崔亨默(Ph. D/ 基督敎倫理學 / 韓國基督敎長老會 天安살림敎會 牧師 / 韓神大 外來敎授)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직감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임기종료를 앞둔 대통령이 레임덕을 막아보려 취한 정치적 제스쳐임에 틀림없지만, 그 결과로 일본의 우경화가 가속화되고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되리라는 우려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사회 내에서는 평화헌법을 무너뜨리고 ‘정상국가’로서 일본의 군대가 교전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는 터에, 영토분쟁을 빌미로 그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그 점에서 나는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의 우파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 줬다고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이후 상황은 우려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다.


독도문제에 대해 어떤 해법이 가능할까? 한국사회 안에서는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의문이 제기되지 않지만, 대통령의 일왕 및 일본의 영향력에 대한 발언은 차치하고라도 이번 독도방문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역사적 해법으로 냉정하게 풀어야 할 문제를 정치적으로 소란스럽게 꼬이게 만들었다는 시각이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기서 새삼 주목받고 있는 것이 1965년 한일 당국자들 사이에 맺어진 밀약이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하에 합의된 밀약의 내용은, 한일 양국이 모두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있도록 하고, 한국의 실효지배는 인정하되 시설의 증축이나 병력의 증강으로 현상을 깨는 행위는 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노 다니엘, 『독도밀약』[일본명 『竹島密約』] 참조). 당시 한일 양국 정권의 입장에서는 시급한 국교정상화의 걸림돌을 미해결 상태로 유보함으로써 해결의 과제를 후손들에게 넘기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과거의 정권이 영토문제를 밀약으로 미봉한 탓에 오늘까지 독도문제가 지속되고 있다는 맥락에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시점으로 돌아가 그것이 제국주의 침략의 제일보로서 의의를 갖고 있다는 점을 역사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해법 또한 제시되고 있다. 역사적 해법이 제시되는 맥락에서는 당연히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의 문제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1905년 이전의 조선과 일본 정부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 등을 검토해야 한다는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과거역사에 대한 공통인식을 통해 공동의 미래전망을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해법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더욱이, 대선을 앞둔 한국과 총선을 앞둔 일본의 정치일정상 각기 민족주의적 분위기 편승으로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정권의 당사자들이 이성을 잃은 듯 대처하는 형국에서, 냉정한 역사적 접근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이 해법을 지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역사적 해법이 양국간의 영토문제를 과연 일소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실증적 규명을 강조하더라도 역사적 해석은 불가피하게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영토와 국민을 확정하고 있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가 확고한 현실에서 어떤 정권이 붕괴를 자초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영토의 권리에 대해 양보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이러한 국제질서하에서 영토문제에 관한 평화적 해법은 찾기 어려워 보인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폭력은 아니더라도 일정한 물리력을 동반한 지배만이 겨우 현상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역사적 접근을 강조하고 일본에서는 현존하는 국제질서 안에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어떤 방법도 상대의 입장이 분명한 상황에서는 해결의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그래서 이미 한일 양국에서는 문제의 섬을 두고 ‘평화의 섬’ 또는 ‘우정의 섬’으로 삼자는 소수의견이 제기되어 왔다. 각기 양국 국민들 사이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주장이지만, 그 주장에 담긴 뜻을 더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면 어떤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지적한 대로 영토국가 내지는 국민국가 개념이 확고한 현실에서 그 발상은 공상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한갓 공상을 넘어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국민국가 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 자체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동반되어야 한다. 어쩌면 독도문제는 바로 그 근본적 성찰의 계기가 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점에서 독도는 항구적인 평화해법의 試金石(‘獨島’는 한국어로 ‘돌섬’[石島]을 뜻한다. ‘獨’은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돌’의 방언인 ‘독’의 음차이다)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오늘 세계현실은 이미 기존의 국민국가 단위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숱한 문제들을 노정하고 있다. 예컨대 이주 노동자의 권리와 이주자의 시민권문제, 소수민족과 원주민의 권리문제 등은 근대적 국가질서 아래서는 도저히 해법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이동가능한 사람의 문제와 달리 고정되어 있는 영토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간단한 듯하면서도 오히려 더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늘의 세계현상 자체가 이미 기존의 국제질서로는 해결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영토문제에 대한 해법 또한 그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정에서 해법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양국간의 갈등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궁극적인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복음의 전망 안에서 기존의 통념을 의심하는 성찰을 이끌어야 한다.  


일본 기독교의 상황을 예단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신앙의 국민화’ 현상이 지배적인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서 나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부조리한 현상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 의심과 그에 따른 대안 모색을 가로막는 신앙이라면 그것이 과연 평화의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결코 비현실적인 공상만은 아니다. 독도문제로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와중에도 서울 명동거리에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젊은이들이 뒤섞여 평화로운 발걸음들을 움직이고 있다. 바로 그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평화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그저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다.


(* '독도'의 뜻에 관해서는 제가 이전에 다른 자료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지만, 또한 국어학자 홍윤표 선생님을 통해서도 어제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국어학의 입장에서 이에 관한 글을 아예 써주시는 것도 좋을 것같습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