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기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02-28 23:12
조회
3104
* <새가정> 2013년 4월호 "홀로 있기" 특집원고입니다(20130228).

(* 신변잡기를 공공매체에 올리는 거 아닌가 싶어 민망한 마음이 없잖아 있는데, '홀로 있기'라는 말에 혹해 편집자가 청탁한 의도와 상관없이(?) 그냥 즐기며 쓴 글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기다


두 번째 안식년 휴가를 받았다. 두 번째라 하지만, 첫 번째 짧은 5주간의 안식년 휴가는 고스란히 병가로 날려 보냈으니 사실상 첫 번째나 다름없는 안식년 휴가다. 6개월 허락된  기간 가운데 그 전반기 3개월 휴가의 첫째 달을 일본 교토 철학의 길 입구 작은 골방에서  홀로 보낼 수 있었다.


이방의 그 작은 골방에서 홀로 지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 기회가 되어 두어 차례 그 방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일들로 방해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방의 낯설음에서 오는 긴장감이 없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박물관이자 동시에 공원과도 같은 고도의 비교적 한적한 외곽에다 철학자 니시다(西田)가 사색하며 걸었던 철학의 길을 곁에 두고 있으니, 번잡한 일상사들을 물리고 홀로 지내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이미 익숙해진 곳임에도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온 신경을 몰두하며 홀로 지내는 것과 안식년 휴가로 홀로 지내는 것은 그 느낌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논문작성이라는 묵직한 과제를 안고 그곳에 머물 때는 다른 일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일상의 무게를 털어버리고 홀로 머물자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고, 어느 순간 홀로 있는 그 생활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안식년 휴가라 해서 일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왕에 출간했던 책의 개정작업과 또 하나의 연구주제를 구상하는 과제를 갖고 있었다. 결코 가벼운 과제라 할 수 없지만, 홀로 머무는 그 시간을 방해할 만큼 중압감을 주는 과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료함을 달래 주고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일감이었다. 일종의 시간을 재는 척도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까? 일상의 삶이 언제나 일에 치여 사는 형국이라 늘 달력과 시계를 들여다보며 생활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는데, 내 몸과 마음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일정한 과제를 수행하고 그 다음 뭘 해야 할지 선택하는 생활방식이 짧은 기간이나마 배어 가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의 바퀴에 내몰려 쫓기는 느낌이 아니라 내 시간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다가왔다. 최소한의 일감은 그 생활방식의 기준을 잡아주는 척도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 날 그 날 내 몸과 마음이 내키는 한계 안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일거리를 감당하고 나면 그 나머지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시간이 된다. 어떤 날은 시간이 남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떤 날은 별 여유가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적어도 두어 시간 이상은 온전히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침 일찍 산을 오르는가 하면 해가 넘어갈 무렵 강가를 거닐기도 했다. 한낮에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조금 먼 곳으로 바람을 쐬러 다녀오기도 하고, 종종 늦은 저녁시간 길거리를 걷기도 했다. 가끔씩 지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홀로 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드문드문 누군가를 만나는 즐거움은 더욱 배가되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짓눌려 사는 일상생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태평한 시간이었다.


오고가는 발걸음과 함께 수없이 많은 상념들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길거리 가게들에서 스며나오는 음식냄새에 끌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나, 가게에서 찬거리는 뭘로 사가야 하나 하는 원초적인 생각에 골몰할 때도 있었다. 내가 걷고 있는 그 길을 걸었을 사람들과 과거 역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머물고 있는 처소가 시인 윤동주의 옛 하숙집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그가 걸었을 길을 걸을 때는 당연히 ‘서시’가 떠오르고, 해질녘 가모가와(鴨川) 강가를 산책할 때는 “鴨川 十里벌에 ... 해는 저믈어... 저믈어...”로 시작되는 정지용의 시구가 떠올랐다. 자연을 압축 재현해놓은 것 같은 신사의 정원을 거닐 때는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기도 했지만, 엉뚱하게 그 사회의 보수성을 떠올리기도 했다. 산을 오를 때는 산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그 도시와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그 자리에서 보고 느낀 데서 비롯되는 상념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진행하고 있는 작업과 관련된 생각들, 일상의 삶에서 얽힌 여러 문제들과 관련된 생각들도 줄줄이 이어졌다. 동행한 이가 없으니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런 장애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여 생각에 생각을 더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그렇게 길을 걷고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 몇 차례 이어지는 중 하나의 법칙 같은 것을 깨달았다. 생각을 덜기에는 등산이 좋고 생각을 더하기에는 산보가 좋다는 것이었다. 등산을 할 때는 정상에 오르겠다는 일념이 온갖 시름과 자잘한 생각을 잠재웠다. 반면에 산보를 할 때는 온갖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만큼 생각이 복잡다단해졌다. 등산을 하면 생각이 굵어지고 산보를 하면 생각이 깊어진다고 할까? 생각이 굵어지는 경험도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도 동시에 하다 보니 안식년 휴가는 제대로 누리고 있다 싶어졌다.  


목사로서 나에게 이번 안식년 휴가의 핵심은 ‘모든 설교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했다. 하는 설교, 듣는 설교 모두 포함해서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그야말로 말의 홍수 속에서 사는 사람이니 아예 모든 말로부터의 자유를 누려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면벽하고 도를 닦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 거기까지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글 쓰는 것도 언어행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애초 그 기대는 무망한 것이었다. 최소한 어김없이 돌아오는, 말해야 할 기회로서 설교를 잠시 중단하는 것만으로도 안식년 휴가는 충분했다. 그렇게 설교를 중단함으로써 기대한 것은 몸의 휴식도 휴식이려니와 무엇보다도 마음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었다.


홀로 보내는 동안 굵고 깊은 생각이 더해지는 가운데, 스스로에 대한 물음이 일었다. 내가 누구일까라는 근원적인 물음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하는 물음은 비교적 뚜렷하게 다가왔다. 목회자 또는 설교가, 연구자 또는 학자, 아니면 적당히 필력을 지닌 활동가? 평소에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목회와 학문의 행복한 만남을 추구해 왔고, 또 인간은 어차피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니 딱히 나의 역할을 그렇게 나눠놓고 생각할 바는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말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어떤 문필가는 암만 글을 쓰고 책을 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절망감에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통절함에서 나오는 심각한 물음은 아니었다. 아직 나는 성실한 낙관론자에 가깝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그 물음은 과연 내가 뭘 잘 감당하고 있는지, 뭘 기여하고 있는지 하는 차원에서 제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간 정말 잘 살아 왔는가 하는 물음일 수도 있다.  


공자는 나이 50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했다. 50을 넘겨 중반을 향해가고 있는 시점에서 제기되는 새삼스러운 물음에 답이 막히고, 또한 동시에 공자가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한 그 말의 뜻도 예전에는 알 것 같았는데 거꾸로 이제는 스스로의 처지와 결부해 생각하니 가물가물해지는 느낌이다. 홀로 머물렀던 시간이 짧았던 탓일까? 아직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면 어차피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순간의 깨달음보다는 삶으로써 주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홀로 있는 안식의 기회에 내 안에서 들려오는 그 물음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한신대 외래교수 / 한국민중신학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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