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행위주체로서 이동하는 북한 여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10-27 18:20
조회
2946




심원 안병무 선생 17주기 추모 심포지엄 <논평>

2013.10.25 오후 3:00~7:00 / 향린교회



행위주체로서 이동하는 북한 여성  

- 김성경, “‘여자는 잘 익은 음식 아닙니까?’: 이동하는 북한 여성의 생존 전략과 임파워먼트 가능성”을 읽고


최형묵(崔亨黙, Choi Hyung-Mook / 천안살림교회 목사, 한국민중신학회 총무, 한신대 외래교수 / 기독교윤리학)



1.

김성경의 “‘여자는 잘 익은 음식 아닙니까?’: 이동하는 북한 여성의 생존 전략과 임파워먼트 가능성”을 읽고 나면, 한 눈에 들어오는 전경과 동시에 세부묘사가 정밀한 한 폭의 그림이 연상된다.  

북한 월경자들의 성비불균형, 곧 그들 가운데 70%를 넘길 만큼 여성의 비율이 높은 점에 착안하여 이동하는 북한 여성들의 경험을 분석하고 있는 이 글은, 제한된 시각의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 북한 여성들이 이동하는 현실적 맥락의 전체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행위주체로서 이동하는 여성들의 내밀한 동기까지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 주고 있다.

우선 이 글은, 이른바 ‘이주의 여성화’로 일컬어지는 글로벌한 경제 이주 현상을 북한이라는 공간과 경제 위기를 전후한 시간의 축 안에서 재위치시켜 해석함으로써 국경을 넘어선 북한 여성들의 이동 현상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야를 열어준다. 이 시야에는 북한-중국-한국을 연결하는 경제 흐름 속에서 드러난 이동의 객관적 조건이 포착된다. 그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국경을 넘어서는 북한 여성들의 이동을 기존의 정치적 시각 또는 단순한 ‘피해자’적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객관적 정황을 해명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동하는 북한의 여성들이 행위주체로서 임파워먼트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는 점이다. 불가피하게 내쫓기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처한 조건을 활용하여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행위주체로서 이동하는 북한 여성들을 다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처한 조건은 거시적으로 ‘이주의 여성화’를 불러일으키는 지구적 경제의 지역적 연결망(북한-중국-한국)이 자리하고 있지만, 여기에 여성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강고한 가부장적 질서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글은 젠더적 관점에서 이동하는 여성들의 제약 조건과 동시에 선택 가능성의 조건을 규명한다. 곧 젠더적 경계에 의한 여성의 역할은 한편으로는 제약 조건인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의 선택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공적 역할에서 배제를 야기한 제약 조건이 이동을 용이하게 하고, 새로운 삶의 선택 여지를 넓혀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기존의 제약 조건을 역이용하여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여성들의 경험이 기존 사회 안에서 친밀성의 고유한 영역으로 간주된 결혼과 가족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결과를 빚어낸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이동하는 선택을 해온 북한 여성들 스스로에게는 그 경험이 혼란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을지언정, 그것은 사회적 차원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교란시키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주어진 조건들을 활용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여성들의 선택 행위가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국 이 글은 행위주체로서 북한 여성들의 이동 경험이 그들 스스로에게는 의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하나의 동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평가는 “결혼과 가족이 단지 사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와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환기하고 있는 결론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기존의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을 통한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는 해방적 관심과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예수운동의 전승 주체로서 ‘오클로스’를 주목하였고, 그에 따라 민중신학의 입지점으로서 민중에 대한 이해의 차원을 심화시켰다. 마가복음의 용례에 따라 파악된 오클로스는 특정한 집단에의 귀속성을 갖지 못한 다양한 무리들로서, 굳이 개별화하자면 ‘병자들’, ‘배고픈 자들’, ‘세리’, ‘죄인’, ‘창기’ 등으로 구체화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이 통상 ‘죄인’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말해 주고 있듯이 이들은 기존의 체제에서 배제된 무리들이었다. 예수 주변에는 항상 이와 같은 이들이 몰려 있었다. 예수는 이들을 무조건 포용하고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가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는 것은 이들을 그 나라의 주체로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기존의 통념에 따라 ‘어떤 가치’를 강요하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이들의 ‘요청에 응’하고 이들과 ‘일치의 입장’에 섬으로써 그렇게 하였다(안병무, “예수와 오클로스”, 『민중과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2 참조).

안병무는 그 일치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을 주목하였고, 그 사건은 마치 화산맥이 분출하는 것과 같이 역사 안에서 재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민중신학의 통찰은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사건에 대한 충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단지 그뿐인 구호를 외치며 스러져간 노동자의 죽음에서 한국사회의 문제를 직감한 민중신학자들은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가운데 마침내 하나의 범례로서 예수와 민중, 예수와 오클로스와의 관계를 재해석하게 되었고, 다시 그것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재해석할 수 있는 안목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 주변의 오클로스에 대한 주목은 오늘의 오클로스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한 것이다.

김성경은 콜린스의 견해를 빌어 “사회 구조 내에 존재하지만 사회관계와 담론 체계 내에서는 제외된, 즉 ‘구조 안의 아웃사이더’로서” 여성의 위치를 주목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배제된 위치에 존재하는 까닭에 이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안병무가 주목했던 오클로스의 위치 및 그 역할과 다를 바가 없다. 기존의 통념의 틀 안에서는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주 북한 여성들의 역할을 주목하고 있는 데서, 단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사건을 일으켜나가는 능동적 주체로서, 그 운동의 전승 주체로서 오클로스의 역할을 주목한 안병무의 통찰이 크게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3.

이 글은 사실 분석의 차원에서 매우 치밀한 성격을 띠고 있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밑바탕에 해방적 관심을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이 국경을 이동하는 북한 여성들을 행위주체로서 부각시키고 있는 점이 그 성격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시ㆍ공간의 맥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안병무의 오클로스론과 유비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접촉점도 거기에 있다.

치밀하고 성실한 이 글이 제기하는 논점은 매우 많지만, 나는 바로 그 해방적 관심의 맥락에서 단 한 가지 초점에 주목하여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논평의 임무를 다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 글이 말하는 ‘행위주체’의 의미를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국경을 이동하는 북한 여성들이 능동적으로 자기 생존의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 때문인가, 아니면 그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 때문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제기는 행위주체에 관한 다음과 같은 논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행위주체’, 곧 민중신학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으로 말하면 ‘역사주체’로서 인간의 행위는 대략 세 가지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P. Anderson, Arguments Within English Marxism, London, 1980, pp.19-20; Alex Callinicos, 『역사와 행위』, 김용학 옮김, 서울: 교보문고, 1991, 31-32 참조. ). 첫째 가장 전형적인 역사적 행위는 ‘사적’ 목적의 추구로서, 이것은 일상의 생존과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행위들에 해당한다. 두 번째 행위는 첫 번째 행위와 마찬가지로 기존 사회관계의 틀 안에서 이뤄지는 ‘공공’의 목적을 지닌 행위로서, 여기에는 정치, 군사, 외교, 상업적 활동 등이 포함된다. 세 번째 행위는 집단적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행위’로서, 이러한 행위 주체는 근대의 역사적 혁명과 노동운동의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오늘날 ‘주체’라고 말할 때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바로 이 세 번째 행위주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주체에 관한 논의는 ‘구조’와 ‘행위’의 관계에 관한 첨예한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예컨대 역사란 “행위 주체나 목적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과정”으로서, 사회적 변동은 그 구조적 모순의 축적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여기서 인간들의 역할은 갈등하는 구조들의 ‘담지자’로서 행위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인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L. Althusser)이 있는가 하면(구조주의), 반면에 인간들이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 역사 안에서 구조는 인간 행위를 제약하는 조건을 의미하며, 그 제약 조건은 구체적인 행위자들이 사회를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극복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E. P. Thomson)도 있다(인간중심주의).

또 한편으로 이 양극의 입장을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다. 다시 말해 구조가 행위를 강압하지만 동시에 구조는 행위주체에게 구조적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행위자로 하여금 구조를 변동시킬 수 있게 한다고 보는 입장(A. Callinicos)이다. 이러한 입장에는 고유한 욕구와 능력에 따라 목적지향적인 행위주체가 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으며, 결국 이 입장에서는 목적지향적인 행위주체로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 구조는 한편으로는 제약의 조건이 되지만 동시에 능력을 부여하는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이 처한 객관적 조건과 동시에 행위주체로서 인간의 능력을 동시에 주목하며 이론적 통합을 시도한 결과이다.

이러한 논의는 역사주체로서 민중을 강조하는 민중신학 안에서 오랫동안 제기되어온 매우 고전적인 문제제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학자 김성경 선생의 혜안을 구하고자 새삼 문제제기해 본다.*

* 에큐메니안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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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2
  • 2013-10-28 08:19
    새로운 관점의 젠더연구네요.
    rn잘 읽었습니다.

  • 2013-10-28 10:07
    아주 좋은 연구였습니다.
    rn논평문은 제 글이니까 올리지만, 그 글은 제 글이 아니라 올리지 못했습니다.
    rn다른 데 올라오면 링크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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