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교구와 대전노회 19년의 교류와 선교협력을 돌아보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6-10-08 17:51
조회
961
2016년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ㆍ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선교협의회 발제 1-2
2016년 10월 4일(화) 9:00~16:00 / 교토교구 교토교회
교토교구와 대전노회 19년의 교류와 선교협력을 돌아보며
최형묵(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국제협력선교위원회 서기 및 전문위원/ 천안살림교회)
1. 시작하는 말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와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는 1998년 6월 30일 선교협약을 조인을 한 이래 18주년을 맞이하였다. 그러니까 올해로 교류 19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교토교구와 대전노회는 그간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의 과제를 모색하는 선교협력관계를 형성하는 데 노력해왔고, 그 선교협력관계는 점점 확대 심화되고 있다. 한국교회, 특별히 대전노회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여러 해외교회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와 같은 여러 협력관계들 가운데서도 교토교구와 대전노회의 관계는 매우 원활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발제는 주로 그간의 교류협력관계를 되돌아보고 평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공식적 협력관계가 성립되기 이전의 접촉경위를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에 공식적인 선교협력관계가 형성되면서 펼쳐진 여러 교류의 내용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평가와 함께 결론을 맺고자 한다.
2. 교토교구와 대전노회가 선교협력관계를 맺기까지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해외의 여러 교회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특별히 1970-80년대 한국교회가 민주화와 인권운동, 그리고 평화통일운동을 선도하게 된 데에는 해외교회들의 지원과 협력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그 가운데서 일본교회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 일본교회는 한국교회를 직접 지원하는 데 힘썼을 뿐 아니라 다른 해외교회들과 한국교회의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매개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와 인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데에는 스스로의 각성과 고유한 신학의 형성, 그리고 조직력 등이 중요한 몫을 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교회를 비롯한 해외교회의 지원과 협력 또한 중요한 몫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한국교회 안에서는 해외교회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공격적 선교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교회들 가운데서는 해외교회와의 대등한 협력관계, 교단이나 연합기구 차원을 넘어 지역단위에서의 협력에 대한 요구가 등장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취약한 해외교회에 대한 지원 등에 대한 각성이 일기 시작했다. 대전노회와 교토교구의 선교협력관계가 형성된 것도 거시적 차원에서 보자면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토교구와 대전노회가 직접 접촉을 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1995년 재일 독일선교사 안드레아스 호프만-리히터(Andreas Hoffmann-Richter) 박사가 한국신학연구소 3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을 계기로 방한한 적이 있다. 호프만-리히터 박사는 민중신학자 안병무(安炳茂)의 ‘사건’론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한 만큼 민중신학에 정통하였는데, 당시 안병무 박사에 이어 한국신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채수일(蔡洙一) 박사를 통해 나도현(羅도현) 목사 등 대전노회 관계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일본교회와의 교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도현 목사 증언에 의하면, 처음에는 교구 및 노회와의 파트너십을 먼저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자신과 과거 재일교포 김철현(金철현) 선생이 연루된 한 사건에 대해 한일 교회간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 사건은 1975년 한국의 정보당국에 의해 조작된 ‘한신대간첩단사건’이었다. 당시 도시샤(同志社)대 출신으로 한신(韓神)대에 유학중이던 김철현을 중심으로 나도현, 김명수(金明洙), 전병생 등이 북한의 간첩으로 누명을 쓴 사건이다. 재일교포가 연루된, 이와 같은 사건 조작은 당시 한국에서 빈번하게 있었다. 호프만-리히터 박사가 교토에 체재하고 있었기에 그 이야기를 포함하여 교류 가능성을 타진하는 대전노회의 의견이 교토교구에 전달되었고, 그 이후 알려진 바와 같이 교토교구와 대전노회 대표단이 1996년과 1997년 상호방문하여 서로의 의견을 확인한 후 1998년 공식적으로 선교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 관한 일화는 단지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한일간의 현대사 그리고 그와 관련된 남북분단의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교토교구와 대전노회의 관계의 밑바탕을 환기시켜 주는 사건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교토교구와 대전노회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됨을 구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특별히 한일간의 관계라는 점에서 양국간의 역사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대전노회와 교토교구간 협력관계의 공감대를 형성한 또 하나의 배경으로, 교토교구가 고대로부터 이어진 일본의 역사ㆍ문화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대전노회가 특별히 일본의 고대 역사ㆍ문화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지닌 백제 역사ㆍ문화의 중심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있었다. 그만큼 양 교구와 노회 사이에는 역사ㆍ문화적인 친근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배경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3. 협력관계 체결 후 교류 및 주요 협력사업
교토교구와 대전노회가 공식적인 협력관계를 맺은 후 20주년을 내다보는 현재 그 관계의 발전과정은 대략 두 단계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1998년 선교협약을 체결한 이래 2007년에 이르기까지의 상호이해를 도모했던 과정,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2008년 처음으로 교환프로그램을 정례화한 이래 교류의 확대와 심화를 위해 노력해온 과정이다.
1) 상호이해를 다진 첫 10년
<주요 교류 일정>
1998년 6월 30일 선교협약 체결
1999년부터 선교협약 체결을 기념하여 매년 6월 마지막 주일 공동기도주일 정례화
1999년 대전노회 대표단 교토교구 정례 방문
2000년 교토교구 대표단 대전노회 정례 방문
2001년 대전노회 대표단 교토교구 정례 방문
2002년 대전노회 주최 한일 청년연합수련회(아우내)
2003년 교토교구 주최 한일 청년연합수련회(간사이세미나하우스) / * 대전노회 전문위원 제도 시작
2004년 교토교구 수선화회(교토교구 여신도 및 재일대한기독교 여신도) 대전노회 방문
교토교구 주최 강연(나도현: “대전노회, 교토교구 교류의 경위와 전망”)
2005년 2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협의 / 10월 교토교구 주최 선교협의회 (“역사와 마주하는 교회”)
2006년 3월 대전노회정기회시 교토교구의장 초청강연(후가미 세이조: “일본교회사”) / 10월 대전노회 주최 선교협의회(“화해와 평화를 위한 교회의 과제”)
선교협약이 체결되고 나서부터 양 교구와 노회는 선교협약을 기념하여 한일 공동기도주일을 정례화하여 양국 사회 및 교회의 과제를 두고 함께 기도함으로써 서로의 상황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한편 그리스도인으로서 공동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한 상호간 방문을 정례화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의 과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직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청년들과 신도들의 교류방문을 시도함으로써 상호 이해의 저변을 넓혔고 두 차례에 걸친 선교협의회를 거쳐 공동 관심사와 과제의 접점을 모색하게 되었다.
상호간의 이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일간 공동의 역사인식이었다. 고대로부터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까닭에 양국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사에서의 불행한 역사로 인해 긴장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역사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더욱이 평범한 교인들의 수준에서 그 차이는 더욱 큰 것이 사실이다. 선교협력관계를 맺고자 했을 때 대전노회에서는 ‘왜 일본이냐?’하는 의견이 없지 않았고, 교토교구에서도 유사한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바로 그러한 현실 때문에 양 교구와 노회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가운데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공동의 역사인식을 추구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청년들의 연합수련회에서, 그리고 선교협의회에서 거듭 역사인식의 문제를 주제로 다뤘다.
꾸준히 상호 방문하는 가운데 지속된 노력 덕분에 상호간 이해와 호감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교류가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2) 교류가 심화되는 가운데 서로 배우면서 공동의 실천과제를 모색한 단계
<주요 교류 일정>
2008년 2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이후 정례화 / 교토교구 주최 제1회 교환프로그램, 이후 정례화
2009년 3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회의 / 대전노회 주최 제2회 교환프로그램
2010년 2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 교토교구 주최 제3회 교환프로그램 / 교토교구 시가지구ㆍ오사카교구 난카이지구 주최 강연(최형묵: “한ㆍ일강제병합 100주년을 돌아보며, 평화를 생각한다”)
2011년 2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회의 / 양 교구 및 노회 정기회시 메시지 교환, 이후 정례화 / 대전노회 주최 제4회 교환프로그램 / 대전노회 교토교구에 동일본 지진 재해헌금 전달 / 교토교구 미나구치교회 유치원 교사 대전노회 지역 방문 / 교토교구 타케우치 목사 불법구금에 대해 일본 사법당국에 대전노회장의 항의서한 발송
2012년 1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 동일본 지진피해지역 대전노회 청년봉사단 파견 / 교토교구 주최 제5회 교환 프로그램
2013년 1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회의 / 대전노회 주최 제6회 교환프로그램 / 교토교구 시가지구 평화주간 강연(최형묵: “한반도 평화체제 확립과 동북아시아 평화”)
2014년 1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 교토교구 주최 제7회 교환프로그램 / 오사카교구 사회위원회 주최 강연(최형묵:“헤이트 스피치 - 인종차별을 넘어서는 대안의 모색” / 교토교구 선교부 주최 강연(최형묵: “교회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 한국교회의 실정으로부터 일본교회의 선교를 모색한다”)
2015년 1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회의 / 3월 대전노회 70주년기념 정기회 교토교구 의장 초청 개회예배 설교(이노우에 유이치) / 대전노회 주최 제8회 교환프로그램 / 교토교구 주최 김치축제에 대전노회 신도 파견 / 교토교구 선교부ㆍ간사이세미나하우스 공동주최 강연(최형묵: “한일관계의 장벽과 그 타개를 향하여”) /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연락회ㆍ교토교구 선교부 공동주최 강연(최형묵:“전후 70년-전후보상의 행방”)
2016년 1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 5월 교토교구 80주년기념 정기회 대전노회장 초청 개회예배 설교(권오성) / 10월 교토교구 주최 제9회 교환프로그램 중 선교협의회 및 실무회의
첫 10년간 공동의 역사인식을 추구하는 가운데 서로를 이해하려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후의 과정은 그 성과로 적극적으로 서로에게서 배우는 한편 더 나아가 공동의 실천과제를 찾아 나설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무회의와 교환프로그램이 정례화되어 공식적인 교류의 틀이 안정화되었고, 여러 교류 형태가 다양하게 펼쳐졌다. 특별히 실무회의의 정례화는 교류의 안정성을 높였고, 교환프로그램의 정례화는 양국의 사회와 교회, 그리고 각기 그에 속한 구체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 깊이를 심화시켜주는 계기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기초 위에서 서로 재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위로와 도움을 주는 공동의 실천이 가능해졌고, 서로 더 배우고 의견을 깊이 교환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화되었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교류가 가능해졌다.
이 자리에서 일일이 언급하지 못하지만, 교구 및 노회간 교류와는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일들 또한 사실은 양 교구 및 노회간 교류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일본어저작집 발간 사업도 그러한 일들 가운데 하나이며, 일일이 언급하지 못한 개인적인 교류의 사례들도 그에 해당한다. 명시적으로 내건 목적이 실현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일로 또 다른 뜻밖의 일을 가능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은혜의 체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맺는 말
약 20년간에 걸친 교토교구와 대전노회 간의 교류는 비교적 안정화된 틀 안에서 공동의 실천을 모색하고 교류의 보다 폭넓은 저변확대를 기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 성과에 이르게 된 요인을 크게 서너 가지만 생각해본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셈이지만 정리해서 말하자면, 첫 번째로 양 교구와 노회는 교류 과정을 통하여 한일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공동의 과제를 추구하려는 문제의식과 노력을 지속적으로 견지해왔다. 각자는 각기 다른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교육과정을 경험해왔고 따라서 다른 역사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국가적 입장을 넘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나아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장을 공유하는 가운데 공동의 과제를 추구해 온 것이다.
두 번째로 앞에서 지적한 점이 주로 근대현사 가운데서 빚어진 한일관계를 의식한 것이라면, 그와 달리 그 이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훨씬 오랜 기간 동안 한일 양국은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평화적 공존을 해왔고 따라서 서로 문화적으로 정서상으로 공유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인과 일본인의 평균적 의식에 비춰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가 얼마나 넓게 공유되고 정서상의 공감대가 두터운지는, 다른 해외교회들과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쉽게 이해된다. 한일 양국간 사이에는 무의식의 역사ㆍ문화적 공감대가 상당한 만큼 서로에게 접근하는 데 용이한 기반이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차이는 지속적인 교류를 통한 상호이해와 협력관계의 필요성을 자극한다. 이미 앞에서 그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견지해온 점을 지적하였지만, 그 노력은 엄밀하게 말하면 차이 자체를 없애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계, 그 차이가 오히려 공존의 조건이 되는 세계에 대한 희망에 기초한다.
마지막으로, 단순한 사족이거나 겉치레 빈말이 결코 아닌 것으로, 양국간의 그러한 사정을 충분히 숙지하고 양측의 구체적 사람들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통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교토교구와 대전노회 사이에 양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기를 기대해본다.
교토교구와 대전노회는 새로운 10년, 그러니까 교류 30년의 역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 교류관계가 한일 양국간의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고 진정한 우호와 협력의 관계로 발전하여 동북아시아시아의 평화를 이루고, 더 나아가 이 땅 위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 1998년 6월 30일 당시 대전노회 한밭교회에서 조인한 <상호교류를 위한 동의서>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상호교류를 위한 동의서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지금까지의 경과]
1996년 10월 31일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에서 세분의 목사님이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를 방문하여 회의하고, 상호교류를 위한 제안이 있었다. 교토교구는 이를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1997년 4월 1일 제안에 대한 대답과 협의를 하기 위해서 두 목사님이 대전노회를 방문하여 회의를 갖었다.
이 두 번의 준비회담이 있은 후에 1997년 11월 26일 대전노회에서 세분의 목사님이 교토교구를 방문하여 회담한 결과, 감사와 기쁨 속에서 이 ‘상호교류를 위한 동의서’가 작성되었다.
[전문]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는 과거의 어둡고 참담한 한ㆍ일관계의 역사를 직시하며,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는 과거에 한반도의 식민지화라는 막심한 죄를 범한 일본국책에의 가담에 대한 깊은 사죄의식을 갖으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으로 새로운 형제자매애적 사귐과 상호간의 선교협력을 통하여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다음 사항에 노력한다.(* 교토교구는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별지를 붙인다.)
[동의 사항]
1. 상호간의 인적교류를 통하여 양 노회(교구)의 이해를 증진시킨다. 그리고 상호 방문시 체재비는 해당노회(교구)에서 부담한다.
2. 양 노회(교구)는 선교와 목회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교환하기로 한다.
3. 공동의 선교과제를 위해 기도하며 협력한다.
4. 상호간의 연락관계는 대전노회의 해외선교위원회와 교토교구의 선교부에서 담당한다.
5. 양 노회(교구)의 질적 향상을 위한 상호교류를 위하여 필요시 검토한다.
1998년 6월 30일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2016년 10월 4일(화) 9:00~16:00 / 교토교구 교토교회
교토교구와 대전노회 19년의 교류와 선교협력을 돌아보며
최형묵(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국제협력선교위원회 서기 및 전문위원/ 천안살림교회)
1. 시작하는 말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와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는 1998년 6월 30일 선교협약을 조인을 한 이래 18주년을 맞이하였다. 그러니까 올해로 교류 19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교토교구와 대전노회는 그간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의 과제를 모색하는 선교협력관계를 형성하는 데 노력해왔고, 그 선교협력관계는 점점 확대 심화되고 있다. 한국교회, 특별히 대전노회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여러 해외교회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와 같은 여러 협력관계들 가운데서도 교토교구와 대전노회의 관계는 매우 원활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발제는 주로 그간의 교류협력관계를 되돌아보고 평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공식적 협력관계가 성립되기 이전의 접촉경위를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에 공식적인 선교협력관계가 형성되면서 펼쳐진 여러 교류의 내용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평가와 함께 결론을 맺고자 한다.
2. 교토교구와 대전노회가 선교협력관계를 맺기까지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해외의 여러 교회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특별히 1970-80년대 한국교회가 민주화와 인권운동, 그리고 평화통일운동을 선도하게 된 데에는 해외교회들의 지원과 협력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그 가운데서 일본교회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 일본교회는 한국교회를 직접 지원하는 데 힘썼을 뿐 아니라 다른 해외교회들과 한국교회의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매개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와 인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데에는 스스로의 각성과 고유한 신학의 형성, 그리고 조직력 등이 중요한 몫을 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교회를 비롯한 해외교회의 지원과 협력 또한 중요한 몫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한국교회 안에서는 해외교회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공격적 선교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교회들 가운데서는 해외교회와의 대등한 협력관계, 교단이나 연합기구 차원을 넘어 지역단위에서의 협력에 대한 요구가 등장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취약한 해외교회에 대한 지원 등에 대한 각성이 일기 시작했다. 대전노회와 교토교구의 선교협력관계가 형성된 것도 거시적 차원에서 보자면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토교구와 대전노회가 직접 접촉을 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1995년 재일 독일선교사 안드레아스 호프만-리히터(Andreas Hoffmann-Richter) 박사가 한국신학연구소 3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을 계기로 방한한 적이 있다. 호프만-리히터 박사는 민중신학자 안병무(安炳茂)의 ‘사건’론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한 만큼 민중신학에 정통하였는데, 당시 안병무 박사에 이어 한국신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채수일(蔡洙一) 박사를 통해 나도현(羅도현) 목사 등 대전노회 관계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일본교회와의 교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도현 목사 증언에 의하면, 처음에는 교구 및 노회와의 파트너십을 먼저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자신과 과거 재일교포 김철현(金철현) 선생이 연루된 한 사건에 대해 한일 교회간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 사건은 1975년 한국의 정보당국에 의해 조작된 ‘한신대간첩단사건’이었다. 당시 도시샤(同志社)대 출신으로 한신(韓神)대에 유학중이던 김철현을 중심으로 나도현, 김명수(金明洙), 전병생 등이 북한의 간첩으로 누명을 쓴 사건이다. 재일교포가 연루된, 이와 같은 사건 조작은 당시 한국에서 빈번하게 있었다. 호프만-리히터 박사가 교토에 체재하고 있었기에 그 이야기를 포함하여 교류 가능성을 타진하는 대전노회의 의견이 교토교구에 전달되었고, 그 이후 알려진 바와 같이 교토교구와 대전노회 대표단이 1996년과 1997년 상호방문하여 서로의 의견을 확인한 후 1998년 공식적으로 선교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 관한 일화는 단지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한일간의 현대사 그리고 그와 관련된 남북분단의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교토교구와 대전노회의 관계의 밑바탕을 환기시켜 주는 사건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교토교구와 대전노회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됨을 구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특별히 한일간의 관계라는 점에서 양국간의 역사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대전노회와 교토교구간 협력관계의 공감대를 형성한 또 하나의 배경으로, 교토교구가 고대로부터 이어진 일본의 역사ㆍ문화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대전노회가 특별히 일본의 고대 역사ㆍ문화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지닌 백제 역사ㆍ문화의 중심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있었다. 그만큼 양 교구와 노회 사이에는 역사ㆍ문화적인 친근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배경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3. 협력관계 체결 후 교류 및 주요 협력사업
교토교구와 대전노회가 공식적인 협력관계를 맺은 후 20주년을 내다보는 현재 그 관계의 발전과정은 대략 두 단계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1998년 선교협약을 체결한 이래 2007년에 이르기까지의 상호이해를 도모했던 과정,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2008년 처음으로 교환프로그램을 정례화한 이래 교류의 확대와 심화를 위해 노력해온 과정이다.
1) 상호이해를 다진 첫 10년
<주요 교류 일정>
1998년 6월 30일 선교협약 체결
1999년부터 선교협약 체결을 기념하여 매년 6월 마지막 주일 공동기도주일 정례화
1999년 대전노회 대표단 교토교구 정례 방문
2000년 교토교구 대표단 대전노회 정례 방문
2001년 대전노회 대표단 교토교구 정례 방문
2002년 대전노회 주최 한일 청년연합수련회(아우내)
2003년 교토교구 주최 한일 청년연합수련회(간사이세미나하우스) / * 대전노회 전문위원 제도 시작
2004년 교토교구 수선화회(교토교구 여신도 및 재일대한기독교 여신도) 대전노회 방문
교토교구 주최 강연(나도현: “대전노회, 교토교구 교류의 경위와 전망”)
2005년 2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협의 / 10월 교토교구 주최 선교협의회 (“역사와 마주하는 교회”)
2006년 3월 대전노회정기회시 교토교구의장 초청강연(후가미 세이조: “일본교회사”) / 10월 대전노회 주최 선교협의회(“화해와 평화를 위한 교회의 과제”)
선교협약이 체결되고 나서부터 양 교구와 노회는 선교협약을 기념하여 한일 공동기도주일을 정례화하여 양국 사회 및 교회의 과제를 두고 함께 기도함으로써 서로의 상황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한편 그리스도인으로서 공동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한 상호간 방문을 정례화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의 과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직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청년들과 신도들의 교류방문을 시도함으로써 상호 이해의 저변을 넓혔고 두 차례에 걸친 선교협의회를 거쳐 공동 관심사와 과제의 접점을 모색하게 되었다.
상호간의 이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일간 공동의 역사인식이었다. 고대로부터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까닭에 양국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사에서의 불행한 역사로 인해 긴장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역사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더욱이 평범한 교인들의 수준에서 그 차이는 더욱 큰 것이 사실이다. 선교협력관계를 맺고자 했을 때 대전노회에서는 ‘왜 일본이냐?’하는 의견이 없지 않았고, 교토교구에서도 유사한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바로 그러한 현실 때문에 양 교구와 노회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가운데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공동의 역사인식을 추구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청년들의 연합수련회에서, 그리고 선교협의회에서 거듭 역사인식의 문제를 주제로 다뤘다.
꾸준히 상호 방문하는 가운데 지속된 노력 덕분에 상호간 이해와 호감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교류가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2) 교류가 심화되는 가운데 서로 배우면서 공동의 실천과제를 모색한 단계
<주요 교류 일정>
2008년 2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이후 정례화 / 교토교구 주최 제1회 교환프로그램, 이후 정례화
2009년 3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회의 / 대전노회 주최 제2회 교환프로그램
2010년 2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 교토교구 주최 제3회 교환프로그램 / 교토교구 시가지구ㆍ오사카교구 난카이지구 주최 강연(최형묵: “한ㆍ일강제병합 100주년을 돌아보며, 평화를 생각한다”)
2011년 2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회의 / 양 교구 및 노회 정기회시 메시지 교환, 이후 정례화 / 대전노회 주최 제4회 교환프로그램 / 대전노회 교토교구에 동일본 지진 재해헌금 전달 / 교토교구 미나구치교회 유치원 교사 대전노회 지역 방문 / 교토교구 타케우치 목사 불법구금에 대해 일본 사법당국에 대전노회장의 항의서한 발송
2012년 1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 동일본 지진피해지역 대전노회 청년봉사단 파견 / 교토교구 주최 제5회 교환 프로그램
2013년 1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회의 / 대전노회 주최 제6회 교환프로그램 / 교토교구 시가지구 평화주간 강연(최형묵: “한반도 평화체제 확립과 동북아시아 평화”)
2014년 1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 교토교구 주최 제7회 교환프로그램 / 오사카교구 사회위원회 주최 강연(최형묵:“헤이트 스피치 - 인종차별을 넘어서는 대안의 모색” / 교토교구 선교부 주최 강연(최형묵: “교회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 한국교회의 실정으로부터 일본교회의 선교를 모색한다”)
2015년 1월 대전노회 주최 실무회의 / 3월 대전노회 70주년기념 정기회 교토교구 의장 초청 개회예배 설교(이노우에 유이치) / 대전노회 주최 제8회 교환프로그램 / 교토교구 주최 김치축제에 대전노회 신도 파견 / 교토교구 선교부ㆍ간사이세미나하우스 공동주최 강연(최형묵: “한일관계의 장벽과 그 타개를 향하여”) /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연락회ㆍ교토교구 선교부 공동주최 강연(최형묵:“전후 70년-전후보상의 행방”)
2016년 1월 교토교구 주최 실무회의 / 5월 교토교구 80주년기념 정기회 대전노회장 초청 개회예배 설교(권오성) / 10월 교토교구 주최 제9회 교환프로그램 중 선교협의회 및 실무회의
첫 10년간 공동의 역사인식을 추구하는 가운데 서로를 이해하려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후의 과정은 그 성과로 적극적으로 서로에게서 배우는 한편 더 나아가 공동의 실천과제를 찾아 나설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무회의와 교환프로그램이 정례화되어 공식적인 교류의 틀이 안정화되었고, 여러 교류 형태가 다양하게 펼쳐졌다. 특별히 실무회의의 정례화는 교류의 안정성을 높였고, 교환프로그램의 정례화는 양국의 사회와 교회, 그리고 각기 그에 속한 구체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 깊이를 심화시켜주는 계기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기초 위에서 서로 재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위로와 도움을 주는 공동의 실천이 가능해졌고, 서로 더 배우고 의견을 깊이 교환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화되었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교류가 가능해졌다.
이 자리에서 일일이 언급하지 못하지만, 교구 및 노회간 교류와는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일들 또한 사실은 양 교구 및 노회간 교류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일본어저작집 발간 사업도 그러한 일들 가운데 하나이며, 일일이 언급하지 못한 개인적인 교류의 사례들도 그에 해당한다. 명시적으로 내건 목적이 실현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일로 또 다른 뜻밖의 일을 가능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은혜의 체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맺는 말
약 20년간에 걸친 교토교구와 대전노회 간의 교류는 비교적 안정화된 틀 안에서 공동의 실천을 모색하고 교류의 보다 폭넓은 저변확대를 기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 성과에 이르게 된 요인을 크게 서너 가지만 생각해본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셈이지만 정리해서 말하자면, 첫 번째로 양 교구와 노회는 교류 과정을 통하여 한일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공동의 과제를 추구하려는 문제의식과 노력을 지속적으로 견지해왔다. 각자는 각기 다른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교육과정을 경험해왔고 따라서 다른 역사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국가적 입장을 넘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나아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장을 공유하는 가운데 공동의 과제를 추구해 온 것이다.
두 번째로 앞에서 지적한 점이 주로 근대현사 가운데서 빚어진 한일관계를 의식한 것이라면, 그와 달리 그 이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훨씬 오랜 기간 동안 한일 양국은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평화적 공존을 해왔고 따라서 서로 문화적으로 정서상으로 공유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인과 일본인의 평균적 의식에 비춰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가 얼마나 넓게 공유되고 정서상의 공감대가 두터운지는, 다른 해외교회들과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쉽게 이해된다. 한일 양국간 사이에는 무의식의 역사ㆍ문화적 공감대가 상당한 만큼 서로에게 접근하는 데 용이한 기반이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차이는 지속적인 교류를 통한 상호이해와 협력관계의 필요성을 자극한다. 이미 앞에서 그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견지해온 점을 지적하였지만, 그 노력은 엄밀하게 말하면 차이 자체를 없애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계, 그 차이가 오히려 공존의 조건이 되는 세계에 대한 희망에 기초한다.
마지막으로, 단순한 사족이거나 겉치레 빈말이 결코 아닌 것으로, 양국간의 그러한 사정을 충분히 숙지하고 양측의 구체적 사람들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통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교토교구와 대전노회 사이에 양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기를 기대해본다.
교토교구와 대전노회는 새로운 10년, 그러니까 교류 30년의 역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 교류관계가 한일 양국간의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고 진정한 우호와 협력의 관계로 발전하여 동북아시아시아의 평화를 이루고, 더 나아가 이 땅 위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 1998년 6월 30일 당시 대전노회 한밭교회에서 조인한 <상호교류를 위한 동의서>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상호교류를 위한 동의서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지금까지의 경과]
1996년 10월 31일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에서 세분의 목사님이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를 방문하여 회의하고, 상호교류를 위한 제안이 있었다. 교토교구는 이를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1997년 4월 1일 제안에 대한 대답과 협의를 하기 위해서 두 목사님이 대전노회를 방문하여 회의를 갖었다.
이 두 번의 준비회담이 있은 후에 1997년 11월 26일 대전노회에서 세분의 목사님이 교토교구를 방문하여 회담한 결과, 감사와 기쁨 속에서 이 ‘상호교류를 위한 동의서’가 작성되었다.
[전문]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는 과거의 어둡고 참담한 한ㆍ일관계의 역사를 직시하며,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는 과거에 한반도의 식민지화라는 막심한 죄를 범한 일본국책에의 가담에 대한 깊은 사죄의식을 갖으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으로 새로운 형제자매애적 사귐과 상호간의 선교협력을 통하여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다음 사항에 노력한다.(* 교토교구는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별지를 붙인다.)
[동의 사항]
1. 상호간의 인적교류를 통하여 양 노회(교구)의 이해를 증진시킨다. 그리고 상호 방문시 체재비는 해당노회(교구)에서 부담한다.
2. 양 노회(교구)는 선교와 목회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교환하기로 한다.
3. 공동의 선교과제를 위해 기도하며 협력한다.
4. 상호간의 연락관계는 대전노회의 해외선교위원회와 교토교구의 선교부에서 담당한다.
5. 양 노회(교구)의 질적 향상을 위한 상호교류를 위하여 필요시 검토한다.
1998년 6월 30일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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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원2016-10-09 07:39참으로 의미있고 실속있는 교류이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발전시켜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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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2016-10-09 09:06금세 읽어보셨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