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세계 교회사 09] 십자군 전쟁과 중세 유럽의 동요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09-14 21:44
조회
1887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1 - 세계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9월 14일 / 최형묵 목사



제9강 십자군 전쟁과 중세 유럽의 동요


중세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팽창(과잉인구 / 토지의 확대 요구 / 그리스도교의 세계 지배 욕망)은 새로운 돌파구를 필요로 하였고, 이에 따라 동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중세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팽창의 가장 결정적 사건이 200여년간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다.


1. 십자군의 기원


서유럽의 봉건 영주들에게 동방 문화 제국(비잔틴 제국 / 이슬람 제국)의 부는 군침의 대상이었다.

교황 역시 동방의 교회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나아가 이슬람 제국에까지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주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출병을 독려하게 되고, 결국 교황의 세력은 십자군 전쟁의 중심을 차지한다.

베니스와 제노바의 상인들은 동방 비잔틴 제국의 상인들 및 이슬람 상인들을 분쇄하고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11세기말 동방의 이슬람 세력의 분열은 서유럽 세력의 동방 진출의 결정적 기회를 제공하였다.


2. 십자군 전쟁


1) 제1차 십자군 전쟁과 예루살렘 점령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 종교회의(영주와 상인들, 그리고 농민들도 참석)에서 교황 우르반 2세가 ‘신앙이 없는 무리’부터 ‘주의 무덤’을 구출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출병하자고 호소하여(‘면죄부’의 시작) 이에 열광한 무리들이 옷에 붉은 십자가를 붙이고 출병하게 된 것이 십자군의 기원이다.

처음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빈농들이 아무런 준비없이 처자를 이끌고 동방으로 떠났다. 그러나 약탈에 의존하면서 행군을 감행했던 이들은 대부분 도중에서 죽거나 노에로 팔렸으며 남은 무리마저 셀주크군에게 격파당하고 소수만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본격적인 기사부대의 한 갈래는 농민군과 같이 육로를 이용하고 다른 부대는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발칸반도에 집결하였다가 1097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합류하였다. 이들은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1099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을 감행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십자군 국가를 건설한다.


2) 제2, 3차 십자군 전쟁

십자군 국가는 내부의 분열과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1144년 주요 요새 에데사가 함락되자 제2차 십자군이 출병하였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점점 어려움에 처한다.

그 사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한 군주 살라딘에 의해 통일되고 결국 예루살렘이 다시 이들에 의해 점령당하자 제3차 십자군(영국, 프랑스, 독일)이 출병하였으나 예루살렘 회복에는 실패하고 아크레 지역만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둔 정도였다. 십자군 국가는 점점 어려움에 처한다.


3) 제4차 십자군 전쟁과 라틴 제국

13세기 초에 제4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는데, 이 때에는 베니스의 상인의 협력이 절대적이었다. 십자군은 베니스 상인들의 내놓은 배를 타고 출병하였고, 상인들은 비잔틴의 상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십자군을 이용했고 결국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약탈하고 그곳에 라틴 제국을 건설한다. 물론 예루살렘으로의 진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십자군 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기회였다.


4) 소년 십자군과 십자군의 결말

십자군의 실패가 거듭되자 유럽 안에서는 ‘죄많은 사람들’은 성지를 점령할 수 없고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죄없는 소년들’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그래서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모집되어 출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소년, 소녀들은 대부분 죽거나 노예로 팔리는 참혹한 결과를 맞는다.

13세기에 이르러서도 수 차례 십자군이 시도되었고, 마지막 십자군인 제8차 십자군은 1270년에 출병하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무고한 인명만 희생되는 결과로 막을 내린다. 십자군의 최후의 성 아크레마저도 1291년 함락당한다.


* 이슬람 세계 넘어 동방에 대한 유럽인들의 ‘동경’과 ‘공포’: <사제 요아네스>(Prester John) 전설과 <지옥의 사자>(Tartars) - 몽골의 세계 정복과 유럽                  


3. 십자군 전쟁의 결과


십자군 전쟁의 비극적인 성격과 폐해에도 불구하고, 동방과의 통상관계 강화, 동방의 풍부한 문화의 유입, 그리고 이로 인한 유럽인의 시야 확대 등을 일종의 성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평가는 사실상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실제와 다르기조차 하다. 예컨대 이교도 문화의 유입은 이어지는 ‘마녀 사냥’의 광란의 한 빌미가 되었고 동방에 대한 혐오와 깊이 관련되었다.

보다 정확한 평가는 오히려 십자군 전쟁의 극심한 폐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① 기사 계급의 몰락 - 중세적 질서의 해체의 시작 ② 그리스도교 세계의 도덕적 통일성이 아닌 민족적 적대감의 격화 - 예컨대 서유럽인과 비잔틴 인의 완전한 결별 ③ 교황청의 과중한 과세와 면죄부 판매 ④ 성지의 방어 유지를 위한 유럽 내의 군사적ㆍ재정적 착취. 이러한 결과는 십자군 전쟁이 그 명분과 달리 명백한 실패였으며, 거대한 비극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군 전쟁이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팽창이라는 측면에서, 이 사건이 유럽인들의 정신적 성향을 결정지은 중대한 계기였다는 점에도 주목하여야 한다. 그것은 유럽인들에게 끊임없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추구하는 정신을 길러냈다. 그것은 쉽게 말해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찾아나서는 정신을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지상의 영역의 확장과 동일시될 수밖에 없었던 그러한 정신은 여전히 다른 민족들에게는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다. 서양의 식민지배의 역사가 그것이다.


* 부록: <서평>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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