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세계 교회사 14] 근대 그리스도교의 여러 신앙운동들과 신학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0-19 23:15
조회
1825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1 - 세계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0월 19일 / 최형묵 목사



제14강 근대 그리스도교의 여러 신앙운동들과 신학


근대는 기독교 신학의 개화기라 할 만큼 기독교 신학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서구 신학은 직접적으로 다양한 근대 신학의 유산이다.


1. 개신교 정통주의


여러 갈래들 가운데 하나로 개신교 정통주의신학을 들 수 있다. 개신교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의 거센 격랑이 평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 구체적 계기는 아우스부르크 회의였다(1555). 이 회의는 그간의 종교적 분쟁을 마무리짓고 개신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이 회의의 결과 영방의 군주나 그 밖의 정권은 자신들의 영방의 신앙고백을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개신교를 선택한 군주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러한 요구가 규범적 신앙고백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그것은 개신교 정통주의로 귀결되었다. 루터 계열의 화합신조(1580)나 칼빈 계열의 도르트회의(1618-19), 그리고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1647)은 이러한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개신교 정통주의는 객관적이며 규범적인 교리를 확립한 데 그 기본적 특징이 있었다. 특별히 그 규범적 교리 가운데는 오늘날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성서 영감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통을 내세운 모든 주장이 그렇듯이 이것은 본질적으로 루터나 칼빈의 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루터나 칼빈의 사상이 지녔던 역동성이 거세된 것이었다. 루터나 칼빈이 주체의 신앙적 결단을 강조한 반면 고정된 교리를 강조한 것 자체가 종교개혁 사상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이것은 종교개혁 사상에서 이탈하여 중세적 신앙의 특성으로 회귀한 일종의 퇴행현상이었으며 역사적 반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형태의 신앙과 신학은 근대 이후 기독교 신앙 세계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미국의 근본주의나 그 직접적 소산인 한국 기독교의 근본주의 신학은 바로 이로부터 연유한다.


2. 합리주의


정통주의에 의한 신앙의 형식화는 여러 방향에서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가운데서 합리주의 신학은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도달된 이성적 원리에 따라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이 이제껏 이룩한 성과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한 합리적 이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신앙을 이해하고 하느님을 이해했다. 데카르트(Descarte, 1596~1656), 스피노자 (Spinoza, 1632~77), 라이프니쯔 (Leibniz, 1646~1716) 등의 선구자들에 의해 제창된 이성의 원리는 근대정신의 확고부동한 원리가 되었다. 영국의 자연신교 운동이나 대륙의 계몽주의 사조의 영향을 입은 신학은 이성을 그 중심 원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이 점에서 합리주의 신학은 근대정신을 가장 철저하게 수용한 신학사조가 되었으며 훗날 자유주의 신학의 뿌리가 되었다.


3. 신비주의와 경건주의


합리주의 신학이 교리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이지적인 면에서 반격을 가했다면 신비주의와 경건주의는 내적 정서적 차원에서 반격을 가했다. 한 편 이 두 사조는 각기 일정한 측면에서 합리주의 신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닌다. 신비주의는 그 기원이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형태 면에 있어서도 매우 다양하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앞의 12강 참조.) 근대의 신비주의는 내적 침잠의 형태에 가까웠다. 야곱 뵈메(Jakob Boehme, 1575~1624), 죠지 폭스(George Fox, 1624~91) 및 퀘이커 교도들, 임마누엘 스웨덴보리(Immanuel  Swedenborg, 1688~1772) 등은 신비주의를 대표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편협한 교리주의와 그것에 입각한 형식적인 교회신앙을 거부하였다. 이들은 영혼의 자유, 내면적 생활, 직접적 계시를 중시했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와는 거리를 유지하였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 내적 원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와 친화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비주의는 내적 자아의 원리를 철저화시켰다. 신비주의를 합리주의의 내면적 극단화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신비주의는 처음부터 내세지향적이었으며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근본적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경건주의는 한편으로는 교리주의에 따른 신앙의 형식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주의에 따른 세속화를 거부한 데서 성립되었다. 이 경건주의는 동시대의 신비주의와 외관상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교리주의적 형태를 띠든 합리주의적 형태를 띠든 당대의 지배적 신앙형태를 반대하고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보다 더 철저하게 고유한 원리를 관철시킨 반면 경건주의는 대체로 기존의 소위 정통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경건주의의 독특성은 신앙 자체에 대한 열정 및 교리와 성서의 정신을 나름대로 생활상으로 구체화하려고 한 데 있다. 경건주의자들은 사회가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뚜렷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신앙의 생활화를 대대적인 운동으로 전개해 나갔다. 스페너(Spener, 1635~1705)는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를 따르던 프란케(Frabcje, 1663~1727)는 경건운동을 교육과 사회사업, 그리고 선교로 이끌었다. 진젠도르프(Zzinzendorf, 1700~60)는 모라비아인들을 만나 합류함으로써 경건주의 운동의 중요한 거점을 형성하였다. 이 모라비아인들의 활동은 훗날 감리교의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레(John Wesley)에게 중요한 영감을 제공하였다. 경건주의가 기독교 역사에 미친 가장 중대한 영향은 개신교 선교의 시작이었다. 또한 근대 이후 교파를 막론하고 전개된 신앙부흥운동은 바로 이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 아래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의한 선교활동은 서구 백인우월주의 가치관을 제3세계 민족들에게 심어줌으로써 문화적 제국주의로 귀결되었으며, 이들의 내세지향적 개인주의 신앙 역시 현재에 이르기까지 뿌리깊은 해악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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