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 교회사 02] 기독교의 전래 1- 천주교의 전래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1-10 07:26
조회
2313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1월 9일 / 최형묵 목사



제2강 기독교의 전래 1- 천주교의 전래


1. 중국의 선교 현황과 조선인들의 ‘서학’(西學) 접촉


한동안 가톨릭의 중국선교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 선교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에 선교하였던 사비에르가 중국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1568년 로마 교황청은 카르네이로(Carneiro)를 중국주교로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중국선교에 착수하였고, 이후 마카오를 거점으로 하여 중국선교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대표적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중국문화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지도층을 위주로 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예수회는 직접적인 선교활동만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관직까지 누리면서 서구의 근대문물을 소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청(靑)대에 이르러 1773년 소위 ‘전례문제’(典禮問題)로 말미암아 예수회는 해산당하고, 토착문화에 대해 비타협적 선교활동을 전개한 도미니쿠스회, 프란체스코회, 아우구스티누스회 등이 중국에서의 선교를 주도함으로써 중국천주교는 박해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쨌든 명대와 청대에 걸쳐 중국에서 천주교와 더불어 서구문물이 활발히 전해지자, 중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조선인들에게도 이에 대한 접촉의 기회가 빈번해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청의 볼모로 와 있던 조선의 소현세자와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의 교분이었다. 1644년 볼모 7년째에 아담 샬(Adam Shall)을 만나 교분을 나눴던 소현세자는 이듬해에 조선에 돌아 왔으나 급작스럽게 죽어 그를 통한 천주교의 전래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왕자 이야기’가 프랑스에까지 전해지고 이것이 한 계기가 되어, 훗날 조선 천주교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파리외방전교회’가 설립되기까지 하였다.

이후에도 조선 사람들은 중국에 소개된 천주교와 서구문물을 빈번히 접했고 이를 조선에서는 통칭하여 서학(西學)이라 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책들을 수입해 들어오면서 조선 안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성리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일부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을 한편에서는 이(理)의 차원에서 한편으로는 기(器)의 차원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실학(實學)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2. 서학 실천운동과 조선 천주교회의 성립


서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편으로는 더 나아가 서교(西敎), 즉 천주학(혹은 천주교)까지도 신앙적으로 수용하려는 운동이 일어난다. 이익이 주도한 성호학파 일각에서 천주교 신앙에 따른 금욕생활을 하는 이들이 생기고, 1777년(정조 원년)에는 권철신, 정약전, 이 벽 등이 주도한 겨울 교리연구회가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열렸다. 이들은 대개 삼강오륜, 효, 충과 같은 유교의 기본적 골간은 유지하면서(補儒論적 이해) 불교나 미신 등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들 가운데 1783년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그라몽(J. J. Gramont) 신부에게서 영세(세례명: 베드로)를 받고 돌아와 1784년 이 벽과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본격적인 신앙활동에 들어간다.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 기원이다. 이들은 성사의 필요성을 느껴 연장자인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출했다. 이것은 로마교황청의 승낙을 받지 않은 것이어서, 이를 가성직제(假聖職制)라 한다. 이 무렵 신도수는 대략 1,000여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성직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 1789년 당시 교세현황에 대한 보고와 더불어 이 문제를 북경의 신부들에게 문의한다. 북경의 신부들은 조선에서의 자발적인 신앙공동체의 탄생에 우선 감격하였으나, 가성직제를 금지한다. 조선 교인들은 이를 받아들인 대신 신부 파송요청을 한다. 그리고 이 때 선교사들과 교신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조상숭배를 금지하게 되고, 이것은 조선의 천주교인의 구성 성분을 변화시키고(양반에서 중인 혹은 평민) 또 한편으로 박해의 상황을 초래하는 한 요인이 된다.


3. 한국 천주교의 수난과 발전


조상숭배 금지 문제에서 촉발된 천주교인들에 대한 혐의는 점차 천주교인들을 봉건건체제를 위협하는 세력(滅倫敗常, 無君無父의 亂行)으로 보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여기에 서구(기독교)열강의 위협은 이들이 결국 서양오랑캐들과 한 통속으로 비취게 하여, 이후 극심한 박해와 탄압의 상황이 전개된다. 이러한 상황은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기까지 계속된다.


1) 을사추조적발사건

1785년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이루진 집회의 발각(이승훈,정약전,정약종,정약용,권일신,권상학). 양반들은 훈방하고 중인 김범우만 유배, 이후 1년후 유배지 단양에서 순교. 당시 천주교에 우호적인 우의정 채제공은 이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았으나, 유림들의 본격적 천주교 비판이 시작됨.  


2) 진산사건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의 양반(진사) 윤지충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를 불사른 사건이 발각되어(“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천주께 죄짓기는 원치 않는다”)이, 이를 지지한 권상연과 함께 처형. 봉건체제를 부정한 ‘사회복음’으로 수용된 천주교의 성격의 일단. 이후 서학 유입 금지. 또 한 번의 양반이탈 기회. 보유론적 입장의 한계.


3)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그러나 중인 위주의 교회주도 세력은 지도력의 공백을 메우고 신앙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신부 입국을 요청하게 되고, 중국인 신부 주문모 입국. 이로 인해 흩어진 교인들이 재규함되고, 특히 두드러진 양상으로 여성교인(강완숙)이 주도세력으로 진출. 주신부 입국전 4천명에서 만여명으로. 주신부는 서울, 여주, 공주, 온양, 내포, 고산, 전주 등에서 활동. 明道會(회장 정약종)조직.


4)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채제공이 죽고 순조의 즉위와 더불어 대대적 박해 시작 1801년. 정약종이 보관한 교리서와 성물 등 발각되면서 주신부의 활동과 천주교인들의 활동 드러남. 이 때 정약종, 이승훈 등이 처형당하고 정약용, 정약전 등이 유배당함. 주신부 자수하고 이를 계기로 왕실 은언군(철종 아버지)과 며느리 및 상당수 궁인들 교인이 드러남(왕족 사약, 그밖에는 처형). 이 때 3백명 정도 희생.

이 사건을 대외에 전하고 외국에 도움을 요청한 황사영백서사건 발생. 순교 1백명, 유배 4백명. 이 사건으로 당국은 천주교 박해의 결정적 구실을 얻음.


5) 조선교구설정과 기해ㆍ병오박해

그러나 한동안의 침체를 겪은 후 박해 가운데서도 교세는 오히려 확장. 박해당한 교인 가족을 돌보는 과정에서 공동생활이 형성되고 敎友村이라는 촌락까지 형성. 교회재건운동과 더불어 교황청에서는 조선교구(代牧區) 창설. 이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일임. 브뤼기에르(B. Bruguiere) 신부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입국하지 못하였고 1836년 앵베르(L. M. J. Imbert) 주교가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입국. 이 즈음 6천명의 신도가 1838년에 9천명으로 늘어남. 1836년말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신학수업을 위해 마카오로 보내짐.

풍양 조씨의 득세와 더불어 1839년 대대적 박해(기해박해) 시작. 오가작통법 실시. 앵베르 주교와 더불어 세 명의 프랑스 신부 새남터에서 순교. 참수 50명, 옥사 60여명, 배교 석방 4,50명. 그러나 선교의 불은 꺼지지 않고 1845년 김대건 신부 강경을 통해 입국. 1846년 김신부 만주에서 입국기회를 준비하는 메스테르 신부 입국 주선하려다 황해도에서 체포. 이로 인해 또다시 박해(병오박해). 전국적 박해규모.


6) 병인박해와 봉건세력의 몰락

계속되는 박해 가운데서도 교세는 꾸준히 확장. 병오박해 직후 1만여명이던 신도가 1865년에는 2만3천여명으로 늘어남. 철종 즉위 후 박해가 완화된 상황에서 충청도 배론에 신학교 설립(가톨릭대학 모체)하여 자체 신학교육. 교리상의 발전도 이루어져 조선인에 의한 교리서 발간(이 벽의 聖敎要旨, 정약종의 主敎要旨, 정하상의 上宰相書). 이외에도 많은 교리서들이 한글로 출판되어 한글문학의 탄생에 기여함.

대원군이 등장하여 1866년부터 그가 실각할 때까지(1873) 대대적인 박해가 진행됨. 서구열강의 잦은 침범과 더불어 봉건세력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대원군의 박해는 그 위기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이루어짐. 7년간에 걸쳐 전국적으로 진행된 박해. 이 기간 중 1866년에 이르기까지 2천여명 순교(이후 이를 포함 1만여명 순교). 대원군의 퇴진으로 박해종식. 그러나 대원군의 퇴진은 봉건세력의 몰락을 의미. 역사의 새로운 전환.


4.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초기 천주교선교사의 의의


자발적으로 수용된 한국 천주교는 낡은 봉건 질서를 대신하는 일종의 ‘사회복음’으로서 역할을 하여, 한국의 근대 사상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또한 피로 얼룩진 순교의 역사(1984년 103인 시성)는 이후 전개될 개신교 선교의 사실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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