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 교회사 03] 기독교의 전래 2- 개신교의 전래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1-16 23:15
조회
2098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1월 16일 / 최형묵 목사


제3강 기독교의 전래 2- 개신교의 전래


개신교의 접촉과 수용

1884년 한국 최초의 개신교 공동체인 솔내/소래(松川)교회가 세워지기까지 개신교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한국인과 접촉이 이루어졌다. 이를 크게 보면 중국, 만주, 일본, 미국을 통한 접촉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1. 개신교의 접촉 전사

개신교의 본격적인 접촉 이전에도 개신교 혹은 개신교인과 조선인과의 접촉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주로 네덜란드인 표류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경우가 1627/8?년(인조 때) 네델란드인 벨테브레(Jan Janes Weltevree)와 그의 동료 두 사람이 경주에 도착한 경우이다. 개신교인(吉利是段)이었던 벨테브레는 그의 동료 두 사람과 함께 귀화하여 박연(朴燕. 朴延, 朴淵)이라는 조선 이름을 사용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귀화 漢人과 왜군 포로로 구성된‘漢倭軍’에 소속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전투에 참여하여 그의 두 동료는 전사하고 그만 살아 남았다. 조선 여인과 결혼한 그는 이후 훈련도감 산하에서 신무기 개발과 군사훈련을 지도하였고, 이양선(異洋船)이 나타날 때 문정관(問情官)과 함께 통역관으로 기여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선교 동기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살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의 인격이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南灣人 박연 ... 그는 보통 사람보다 키가 월등하게 컸으며 지혜롭고 사려가 깊었다. 그가 하는 말들은 언제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똑같았다. 선악과 행복과 천재지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언제든지 ‘모든 것은 하늘이 알아서 보상할 것이다’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가 하는 말은 어딘가, 노장(老莊)의 말을 닮은 데가 있다 / 가히 道를 가진 사람과 類하다.”(정재륜의 閑居漫錄)

그 후 1653년에 네덜란드인 하멜(HandriK Hamel)을 포함한 36명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잡혔다가 본토에서 13년이나 살았고 그 중 8명이 일본으로 탈출하였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갔는데, 이들은 박연을 만나 서로 같은 동포이며 같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하멜 일행 역시 선교 동기와는 무관했지만, 귀국 후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를 발표하여 유럽에 우리나라를 자세히 알리게 되었고, 이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는 이 책을 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중국을 통한 개신교의 접촉 시도


1) 귀츨라프 목사의 조선 입국

유대계 독일 출신의 귀츨라프(Guetzlaff) 목사는 처음 동남아와 중국선교를 시도하였으나, 영국동인도회사의 요청으로 통역겸 선의(船醫) 자격으로 군함 암허스트호를 타고 극동을 순방하게 된다. 이 때 그는 전도문서와 성서 그리고 여러 가지 선물을 준비하여 배를 타고 한국을 향한다. (천주교박해가 상대적으로 완화된 시기) 1832년 7월 17일 백령도 부근(혹은 장산곳 부근)에 도착하여 그곳 노인들과 필담을 나누며 책과 물건을 건네주고 관리들과 만남을 기대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항해를 하여 7월 21 군산만 창선도에 이르렀고 23일경 홍주만 고대도에 정박하였다. 여기에서 한달 남짓(40여일) 머문 그는 그곳의 주민 및 지방관리(홍주목사)들과 만나 국왕에게 서한과 선물을 보내고 회신을 기다렸으나 통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왕의 회신을 받고 이 곳을 떠난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주민들에게 감자 심는 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쳐 주고, 무엇보다도 한문성경을 전해주었고 최초로 필담을 통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기록을 남겼다. 최초로 선교동기를 가지고 조선에 들렀던 그는 조선에 대한 인상과 기대를 이렇게 전하였다: “...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에 푸짐한 열매를 맺으리라. 가장 낮은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읽고 좋아하는 것을 알 때 아주 재미있었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질투하리만치 편협한 것 같지 않았다. 관관들이 책을 받자 사람들은 밀려와서 책을 받았다. 이 나라에는 종교가 거의 없는 것이 명백하여 우리는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파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2) 윌리암슨 목사의 조선선교 지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파견 선교사로 중국선교를 활발히 전개한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목사는 한국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였다.

유명한 토마스 목사의 한국선교도 그의 알선에 의한 것이었다. 윌리암슨의 후원을 받았던 토마스 목사는 1865년 조선에서 건너 온 두 명의 천주교인을 만나 이들과 더불어 다량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갈 것을 결심한다. / 윌리암슨 목사는 만주를 통한 한국선교에도 노력하여 1867년 만주 여행에서 한국상인들을 만나 전도하였고, 동지사 일행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의 노력의 결과 훗날 한국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와 같은 후계자를 만나게 되었다. / 또한 윌리암슨 목사는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의료선교사 다우드웨이트에게 요청하여 1883년 다우드웨이트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다우트웨이트는 한국에 많은 양의 ‘하나님의 말씀’을 반포하였다. 윌리암슨은 한국선교의 숨은 공로자였다.


3) 토마스 목사와 제네럴셔먼호 사건

한국 개신교사의 첫 순교자가 된 영국 출신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는 두 사람의 조선 천주교인을 만난 이후 한국선교를 결심하고 그들로부터 한국말을 배워 1865년 한국에 들어와 서해안에서 약 두달 간 머물며 전도했다. 그 후 서울을 향했지만, 태풍을 만나 겨우 목숨만 건지고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북경에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눈 그는 자신이 반포한 성경이 평양에까지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의 상선 제네럴셔먼호가 조선에 간다는 것을 알고 그 배에 승선한다. 항해도중 만난 조선의 문정관에게 자신들의 목적은 통상이라는 것을 밝히며 천주교인 학살을 따지기도 했던 그 일행은, 그러나 자신들은 천주교와는 다른 야소성교(耶蘇聖敎)를 전파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상선에 어울리지 않게 중무장을 한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이르러 먼저 포격을 가하고 조선의 지휘관을 억류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선의 관민은 이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배는 좌초하고 배에 승선한 일행은 전원 타살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평양감사가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로 기본적으로 개화론의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양선의 오만한 태도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1866년 9월 2일 당시 27세이던 토마스 목사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한문성경을 한 조선인에게 건네준 채 대동강변에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조선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그것은 곧바로 미국선교사의 한국파송으로 이어졌다.


3. 만주에서의 성경출판과 전도


1) 로스 목사, 맥킨타이어 목사와 한국인 개종자

중국에서의 선교활동과 더불어 만주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선교사 로스와 맥킨타이였다. 이 선교사들은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입국하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청과 조선 사이에서 국경 무역을 주도한 관서지방 상인들과 이래저래 접촉을 하게 된다. 당시 상인들은 중인층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양반지배층과는 구별되었으나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들이 초기 개신교 수용의 주도층을 형성한다. 이들 가운데 백홍준과 이응찬을 포함한 4명의 한국인이 1879년 맥킨타이어 목사로부터 최초로 세례를 받아 신앙공동체를 형성한다. 이 때 로스 목사는 이 소식을 접하고 다음과 같이 소감을 피력하였다: “맥킨타이어는 4명의 학식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 확신한다. 비록 현재 한국이 서구의 나라들과 어떠한 접촉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지만, 그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고,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2) 성경 번역과 반포 사업

직접적인 선교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우선 먼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에 주력한다. 한글 성서 번역 작업은 소수의 식자층이 아닌 대중을 겨냥한 선교방향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또한 선교 초기에 성서 번역 작업부터 이루어진 사실은 이후 한국교회가 성서중심적 교회로 발전하게 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1877년부터 시작되어 1886년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가 출간되기까지에는 세례를 받은 한국인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등을 포함한 여러 한국인이 직접 참여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한국인들은 일자리나 호구지책을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로스 목사를 찾았던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결국 한국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또한 번역 출간된 성서는 매서(권서)인들에 의해 만주(간도)와 한반도에 반포되었고, 이를 계기로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신앙공동체들이 탄생하였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공동체 솔내교회의 탄생도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4. 일본에서의 성경출판과 선교


만주에서 성경출판과 한국인의 개종이 이루어질 즈음 일본에서도 똑 같은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개화파 양반학자로서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간 이수정이 그 중심적 인물이었다. 이미 국내에서부터 천주교와 개신교에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던 이수정은 일본 교회를 찾아 일본 목사들과 여러 차례의 대화를 나누고 공부한 후 1883년 선교사 녹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은 이수정이 동경에서 열린 제3회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에서 한국말로 공중기도를 하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한국선교 가능성을 타진하던 재일 미국 선교사들(“근대선교사상 가장 괄목할 만한 사건으로, 너무나 좋아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사건”, <루미스 목사의 편지>)과 일본 교회에 큰 자극이 되었고 재일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 목사의 제안으로 이수정은 성서번역사업에 착수한다. 또한 이수정의 개종 후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개종이 이루어지고 1883년 동경에 최초의 한국인 신앙공동체가 세워진다. 이수정은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줄 것을 줄곧 요청하여, 그 결실로 미국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게 된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 목사와 언더우드 목사는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마가복음서>를 들고 있었다.  


5. 미국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제네럴셔먼호 사건을 한국에 문책하는 한편 이를 기회로 통상관계를 체결하려던 미국은 1871년 강화도에 침략하였으나 퇴각한다(신미양요). 그러나 일본과 청의 대립관계 안에 있던 조선은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 이후 조선은 견미사절단을 보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에 이르는 여정에서 이들을 만난 가우처 박사는 한국선교 열망을 구체화하게 된다. 가우처 박사의 연락을 받은 재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목사는 선교타당성 검토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되고, 결국 미국 감리교로 하여금 1884년말 스크랜튼 박사 부부(의료)와 아펜젤러(교육)를 한국선교사로 임명하게 한다. 한편 미국 장로교에서는 이수정의 호소를 접하고 논란을 벌인 끝에 1884년 7월 언더우드를 한국선교사로 임명한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 사실상 선교사로 가장 먼저 발을 내딛은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의료선교사 알렌이었다. 1884년 조선에 들어와 ‘미국 공사관 소속 공의’ 자격으로 활동한 그는 그해 12월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한 일이 계기가 되어 황실과 관료들에게 돋보이게 되었고, 본격적인 의료사업(제중원 설립)을 통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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