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 교회사 05] 민족 교회의 형성과 발전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1-30 23:15
조회
1767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1월 30일 / 최형묵 목사


제5강 민족 교회의 형성과 발전

              

선교사들의 입국 이전부터 이미 기독교를 믿고 있었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초기 한국의 구도자들은 선교사들의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힘입어 본격적인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나간다. 그러나 격랑의 민족사의 현장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그 나름의 고유한 민족 교회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싹틔어나간다.


1. 초기 신앙 공동체의 형성


선교사 이전부터 이미 만주에서 성서번역에 참여하였던 서상륜과 같은 인물은 국내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상륜은 본격적인(직접적인) 전도활동을 금하고 있던 상황(1898년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공식적으로 선교사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한다)에서 서울에서의 전도활동을 유보하고 황해도의 소래교회를 근거로 전도활동과 더불어 신앙 지도를 하던 중, 1886년 언더우드를 초빙하여 다음해 세례를 베풀게 함으로 최초의 한국 신앙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서울에서는 자진해서 찾아온 구도자들에게 언더우드가 세례를 베풀고 1887년 9월 27일 자신의 사택에서 14명의 세례교인으로 ‘정동교회’(새문안교회 전신)를 시작한다. 계속해서 자진해서 찾아 온 이들이 늘었으며 그 해 말에는 25명의 세례교인이 생기게 되었다. “누가 봐도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상당수의 세례 지원자들이 있는데 모두 남성들로 열심있어 보인다. 한국인들이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북에서, 남에서, 동에서 요청하고 있지만 학교 일 때문에 갈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이곳 서울에 매서인 한 명과 전도인 한명을 두고 있다. 곧 한 사람 더 평안도 지역에 보낼 예정이며 서울에 있는 매서인은 남쪽에 보낼 예정이다. 백성들이 점점 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언더우드) 한편 1887년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7월 최초로 박중상이라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이후 10월 9일 정식으로 ‘베델교회’(정동제일교회 전신)라는 이름으로 첫 예배를 드리는데 이때 한국인 참석자는 4명이었다. “우리는 사방 8피트도 안 되는 방 안에 모여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개회기도를 드렸고 마가복음 1장의 말씀을 읽은 후 장씨가 폐회기도를 드렸다. 집회는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나는 이것이 위대한 구심점이 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아펜젤러) 이렇게 해서 서울에 장로교, 감리교의 두 교회가 형성되고 기도의 내용 그대로 ‘위대한 구심점’으로 복음전파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2. 초기 교회의 박해


기독교가 의료와 교육을 통해 간접 선교활동을 전개함으로 세간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의 선교활동이 꼭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내의 보수세력은 새로운 사상과 신앙의 유입에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꼈고 이에 따라 기독교를 견제하고 탄압하려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888년 영아(嬰兒)소동과 1894년 평양기독교인 박해 사건이다. 영아소동이란 선교사들이 한국의 어린 아이를 잡아다 팔거나 실험 대상으로 쓰며, 심지어는 그 살과 피를 먹기도 한다고 음해한 데서 소동이 벌어진 사건이다. 평양 박해 사건은 여러 복합적인 요인(선교사에게 집을 판 일, 기독교인이 동제에 사용할 비용을 출연하지 않는 등의 직접 계기에, 제네럴셔먼호 사건을 겪은 평양사람들의 반외세감정, 선교사들의 돈을 갈취하려는 지방부패관리의 음모 등이 복합)에 의해 벌어진 사건으로 마펫 선교사가 돌팔매질을 당하고,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때, 선교부는 외국 공사관에 연락하고 공사관은 조선정부에 항의하여 조선정부가 박해를 금지하는 수순으로 해결되었다. 일종의 ‘시험’의 계기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일을 통해, 기독교/교회는 외국 공사관과 마찬가지로 ‘치외법권’의 힘을 가진 곳으로 인식되는 한편, 박해를 당한 당사자들은 신앙심이 더욱 깊어지는 이중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어쨌든 이 결과 기독교는 서서히 민중에게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3. 청일전쟁ㆍ러일전쟁 등의 국난과 민중계층의 입교


1894~5년의 청일전쟁, 1904~5년의 러일전쟁 기간 동안 교세가 급격히 증가한다(1896년 장로교의 경우 전 해의 2백명 미만의 세례교인이 2천명이상으로 급성장, 1906년 감리교 1만명이상, 장로교 5만명이상). 이 사실은 전쟁 기간 중 교회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는 피난처로 실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과 더불어 난세에 신앙에 의존하려는 심리가 크게 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즈음 교회는 십자기나 성조기를 내거는 경우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교회가 치외법권 구역임을 상징하는 표시였다. 사실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로 민중들이 교회와 접하게 된 것인데, 교회가 민중의 피난처라는 인식은 민중에게 기독교 신앙이 확산되도록 하는 계기를 부여해 주었다.


4. 독립협회의 결성과 지식인층의 입교


국난의 과정에서 기독교가 ‘힘의 종교’로 인식된 것은 민중계층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지닌 유식 계층들에게도 관심을 끌게 하였다. 특별히 교회에 들어 온 지식인들은 교회의 힘을 통해 부패한 봉건질서를 개혁하려는 시도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래서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1899년 당시 어느 지방 관리로 임명된 사람은 그곳에 기독교인이 많다는 이유로 부임을 꺼리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잇는 고을에 갈 수 업시니 영남고을노 옴겨 달란다니 엇지하야 예수교 잇는 고을에 갈 수 업느뇨 우리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밋는 사람은 엇지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오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이 백성의 재물을 빼슬 디경이면 그거슨 용이이 빼앗기지 아닐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업다는 말이 그 까닭인듯.”(대한크리스도인회보)      

독립협회가 결성되었을 때에 상당수의 기독교인(안창호,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신흥우)이 관여하였다. 그러나 이 독립협회가 개혁운동을 주도하고 보수적인 황국협회와 갈등을 빚게 되자 1898년 만민공동회 이후 정부가 이를 해산하고 그 주도자를 체포하는데, 언더우드의 노력과 이승만의 적극적 전도로 그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옥중개종을 하게 된다. 이 때 이상재는 환상중에 “위대한 왕의 사자”로부터 세 번이나 믿을 기회를 주었는데도 믿지 않느냐는 질책을 받은 후 성경을 집중적으로 읽고 개종하였다 하며, 유성준의 경우에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갓고 눈물이 비오듯 하며 40평생에 경과한 일절 행동이 정직 염결 공평한줄노 자신하고 자랑한 것이 다만 자기를 위하는 명예와 공리심리뿐인 이 죄를 확연히 깨닷고” 개종을 결심했다 한다.

개화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이들 지식인들은 정치를 통해 구현하지 못한 민족 자주독립국가 실현을 기독교 교육과 신앙을 통해 전개하려고 노력하였다. 민중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한국 교회에 양반 유식계층이 참여함으로 계층간의 갈등도 일었으나,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성숙한 민족 교회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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