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 교회사 06] 대부흥운동과 기독교 민족운동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2-07 23:25
조회
1903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2월 7일 / 최형묵 목사


제6강 대부흥운동과 기독교 민족운동

              

민족사의 격랑과 함께 한국 민족ㆍ민중에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기독교는, 계속되는 교세의 확장과 더불어 역사의 현장에 대한 태도에서 구별되는 두 가지의 갈래로 그 흐름을 형성해나간다. 이른바 대부흥운동으로 일컬어진 보수적인 개인구령운동 형태와 국권의 회복과 근대적 국가 형성이라는 역사적ㆍ사회적 구원의 문제에 적극적인 기독교 민족운동이 그것이다.


1. 부흥운동과 교회의 조직화


1) 1907년 대부흥운동과 그 성격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1910년 백만명구령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교회의 부흥운동은 애초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이 도화선이 되었다. 1903년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남감리회 소속 하디 목사가 선교사로서 무능함과 허물을 통회하는 데서 시작된 부흥회의 열기는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운동을 정점으로 서북지방은 물론 목포를 포함한 삼남지방으로 이어지고 전국적인 부흥운동으로 확산되어 비약적인 교세확장을 가져오게 되었다(1905년대비 1907년 교세: 교회 321/642; 전도소 470/1,045; 세례교인 9,761/18,964; 학습교인 30,136/99300; 헌금 1,352,867/5,319,785) 처음에 선교사들에게서 시작된 이 운동은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사경회의 분위기를 일신하였고, 또 그 운동의 주역들로 길선주 장로(장대현교회, 후에 목사 안수) 등을 포함한 한국인 교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국권의 상실이라는 민족의 위기 가운데 전개된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한 특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2)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 사이의 이해 증진에 기여했으며, (3) 한국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에 기여하고, (4) 성경공부와 기도의 열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은 그 역기능 또한 분명하였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내지는 몰역사화를 부추겼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입교동기 자체가 정치ㆍ사회적인 성격이 강했던 한국 교인들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십자군병을 일으켜 일본을 축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허락치 않았다(특히 1910년 백만명구령운동은, ‘조선의 일본 합병을 분명하게 예측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조선 기독교인의 종교적 에네르기를 정치적 폭발로 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이 점에서 1907년 전후의 대부흥운동은 한국민족의 시대적인 아픔과 분노를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시킨 몰역사적 성격을 분명히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교회의 조직과 정비

어쨌든 교회의 외형적 부흥운동의 결과 한국교회는 조직적으로도 정비되는 면모를 갖추게 된다. 교파간 차이가 있기는 하나, 1912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결성된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1887년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된지 25년만의 일이다. 이는 1901년 ‘장로회공의회’,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독노회’ 결성에 이은 것이다. 그러나 총회의 결성은 대부흥운동의 맥락과 마찬가지의 한계를 그대로 안고 있었는데, 초대총회장에 통감부와 관계가 원만한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부총회장에 부흥사 길선주가 선임되고 특히 재정을 담당한 회계에 선교사 블레어 목사가 선임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더욱이 이 때 총회의 마지막 결의안으로 ‘명치(明治) 천황의 서거에 대하여 총회의 애도와 동정을 표하기로 가결하였다’는 사실은 이 총회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 준다. 한편 장로교가 다른 선교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총회를 만든 것과 달리 감리교는 남감리회(1918)와 북감리회(1908)가 각기 달리 연회를 조직하였다가 1930년에 가서야 ‘기독교조선감리회’로 재편한다. 감리교 역시 친일적 선교사 주도로 교회조직이 정비된 점은 마찬가지이다.


2. 기독교의 민족운동


1)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 배경

한국에서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은 초기 기독교 수용과 동시에 이루어졌고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 구체적 계기를 들자면, (1) 교회의 신교육으로 근대적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2) 초기 교계 언론 및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과 같은 언론의 영향을 받았으며, (3) 세계의 그 어느 교회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성경중심의 신앙관(특히 출애굽이나, 예수 십자가와 부활 등은 신앙과 민족의 문제를 일치시키는 데 결정적 전거로 역할)은 기독교인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결정적 몫을 하였으며, (4) 선교국(미국 중심)과 제국주의(일본) 국가의 불일치는 저항적인 민족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민족의식을 형성한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 태극기를 내거는 일을 자연스러운 일로 삼게 되었다.


2) 신민회의 활동과 기독교 민족운동의 본격화  

1907년 한편으로는 신앙대부흥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민족주의적 기독교인들의 주도에 의한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결성된다. 1894년 동학혁명과 1898년 만민공동회를 거치면서 교회 지도급 인사들의 민족운동 참여는 점점 적극화되어 가는데, 이 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조약 체결 전후로 기도회를 중심으로 한 초보적 민족운동의 단계(예>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를 거쳐, 1907년 신민회 결성으로 적극적 민족운동의 단계로 발전하며, 이후 1910년대의 기독교인들의 항일무장투쟁과 1919년 3.1운동의 참여를 준비하는 기틀을 형성한다. 기독교인들의 정치적인 구국비밀결사인 신민회는, 상실되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내적으로는 봉건왕조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공화정 설립을 목표로 하였고, 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한국교인들의 민족운동을 보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본국의 입장(1905년 카스라ㆍ태프트협약)과 통감부의 회유책에 따라 ‘정교분리’를 선언하는데, 사실상 통감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정교유착’의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1909년에 결국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는 헐버트 선교사와 같이 한국의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선교사들의 공헌도 기억할 만한 일이다.


3) 105인 사건과 일제의 기독교인 박해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가 두드러지자 일제는 기독교인들을 가장 큰 걸림돌로 여기고 있었다. 일제가 구분한 한일합방 후 네 가지 한국인 부류: “(1) 다수의 백성은 무식하고 양순하여 관인을 두려워하는 자, (2) 이완용 등과 같이 드러내놓고 일본의 충노를 한 자, (3) 주색잡기에 빠져 세상사를 잊고 있는 자, 반면 드러내놓고 배일하는 자는 은근히 한인들 사이에서 앙망과 추종을 받고 있으나 그 수효가 많이 없고 그 지나간 종적이 별 지나간 자리같고... (4) 수훈도 많고 또 자기 지방에서는 다소간 명망이 있는 자들로 어찌 보면 일본에 복종하는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너는너 나는나로 여기는 듯도 하여... 일본 주권자가 벼슬을 하라 하면 공손히 사양하고 교회 속에 묻혀 교육이나 전도에 종사하는데 혹 일인들이 돈을 주며 비밀청탁을 하여도 듣지 않고, 혹 주색잡기로 유혹하려 해도 이에 빠져들지 않으니 ... 예수교인들은 일본 관리들의 뜻과는 이렇듯 반대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테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을 조작하였는데, 이를 일명 105인 사건이라 함은 당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민족주의적 기독교인을 제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기소자 123명(애초 700명구속, 선교사 포함, 그러나 1913년 최종 형확정자는 6명 불과) 가운데 75%에 해당하는 92명이 기독교인(장로교인 82, 감리교 6, 조합교 2, 기타 2; 천주교 2, 천도교 2, 무종교 12 확인)이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일제는 가혹한 고문(72가지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냈으나 재판결과가 입증하듯 기독교인을 탄압하기 위한 조작 사건으로 판명되었다. 이로 인해 교세가 위축되는 일이 벌어졌으나, 이 박해를 경험한 교인들은 더욱 그 신앙이 돈독해졌다.

그러나 이후 일제는 종교교육을 박해하는 방식 등으로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한다. 하지만 박해를 받을수록 강인해지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은 한국 민족사에서 다시 한 번 입증되었고, 그 결과 3.1운동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의 참여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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