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사 16] 북한 교회사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4-18 22:40
조회
2313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2년 4월 18일 / 최형묵 목사


제16강 북한 교회사


1. 북한 사회와 종교(기독교)를 보는 눈


북한 사회와 북한의 종교(기독교)를 보는 기존의 시각은 대개 반공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이른바 ‘전체주의적 접근’). 이 시각은 ‘북한정권의 종교탄압’에 초점을 맞추어 “제한→탄압(→말살)→역이용”의 과정으로 북한의 종교적 상황을 이해하고 있으며, 나아가 현재 북한은 종교말살과 정비례하여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유사종교 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북한 사회 자체 성격과 과정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편협한 시각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다른 사회주의 북한 사회를 전제로 하여 그 바탕 위에서 북한 사회가 이룩한 성과를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하고, 종교(기독교)에 대해서도 그에 따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내재적 접근’). 상호존중의 바탕에 서서 통일을 지향하는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2.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종교와 북한에서의 종교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종교정책은, ‘종교자유 보장’(사회주의적 정교분리)이라는 입장과 ‘반종교 선전’(‘미신’으로서의 종교와 ‘아편’으로서의 종교)이 이중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구체적 태도는 각각의 사회주의 사회의 성격에 따라, 또는 시기별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유럽(동구)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독교는 곧바로 봉건세력 혹은 부르주아 세력과 동일시되었기에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 측면이 강하나, 산업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또 다양한 종교세력이 있었던 북한의 경우 통일전선의 입장에서 시기별로 종교세력에 대한 배척과 협력 관계가 엇갈려 나타났다(혁명의 단계, 종교세력의 대응, 외부적 요인[특히 미국, 남한의 사회와 종교세력 영향 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3. 북한 사회의 변화과정과 기독교


북한 사회의 변화 과정(혁명 단계)은 대개 다섯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북한권력의 종교에 대한 정책, 그리고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세력 역시 그 나름의 대응 양식을 취한다.


1) 인민민주주의 혁명 1단계(1945-1947 초반: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

친일파를 제외한 각계각층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한 인민정권 수립(북조선공산당, 조선민주당, 북조선청도교청우당, 조선신민당 등과 대중조직들로 조직 인구 절반이 조직화) - 토지개혁(1946,3. 20여일만에 완수) 등의 민주개혁과 일제 잔재 청산을 주요과제로 함.

당시 북한의 종교세력은 대략 20만명의 개신교인, 천도교 150만(북 강세), 5만3천여명의 천주교인, 불교 50만(남 강세), (당시 북한 인구 916만 중 24.7%가 종교인). 당시 종교세력은 수치 이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고 특히 개신교는 지식층의 집결지. 당시 초기 인민정권 자체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이라 할 만큼 강한 영향력. 당시 권력은 통일전선적 질서를 강조. 따라서 친일ㆍ친미ㆍ지주적 성격을 갖는 세력을 배척하고 신사회건설에 동조하는 세력과 적극 협력. “조선의 하늘을 믿으라”-‘애국’이냐 ‘숭미사대주의’냐. 당시 개신교세력은 가장 활발한 세력으로 평안도 황해도 등의 ‘건준’을 주도했고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으로 정치세력화. 사실상 반공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사회민주당’ 결성, ‘기독교자유당’, ‘기독교민주당’ 결성 시도, 1945년 12월 친미 반공 보수적 ‘이북5도연합노회’ 결성. 1946년 통일전선을 추구한 세력은 조선민주당을 개혁함과 아울러 ‘북조선기독교도연맹’ 결성(목사의 1/3 참여, 주로 함경도와 황해도). 이후 개신교세력은 ‘조기련’-‘조선민주당’ 대 ‘연합노회’-‘기독교자유당’,‘사회민주당’ 구도로 나누어지고 ‘조기련’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점차 강화. 당시 천주교는 혁명 지지세력이 거의 전무하여 교회 전체가 혁명의 대상이 됨.


2)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강화발전 단계(1947후반-1958: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직되어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조처를 취해나가는 과정에서, 47년 9월 결국 미ㆍ소공동위가 파탄되면서 남북에 분단정권이 수립되는 방향으로 기움. 이를 막고자 남북 정당ㆍ사회단체들이 노력했으나 결국 단정이 수립되고 50년 한국전쟁 발발. 북한 민간인 200만(남한의 2배) 군인50만 사망, 공업생산 64%로 격감,  주요도시 90%파괴, 당시 폭탄은 2차대전기간중 유럽전역에 투하한 것보다 상회(평양 인구 40만 폭탄 42만여개 투하), 농촌황폐화. 전쟁피해복구와 더불어 본격적인 사회주의화 정책.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 ‘천리마운동’, 항일빨치산세력 강화와 주체사상의 형성.

통일전선은 여전히 요구-사회주의 이행과정에서는 민족자본가나 부농이 배제되고 통일성 강화. 당시 ‘조기련’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지지세력은 강화(48년부터 일반신도 가입, 연합노회 대체, 통합 ‘기독교신학교’ 운영, 비가입성직자 파면)되고, 소위 반공 보수세력에 대한 ‘박해’로 알려진 사건들이 이어지고 전쟁중 이 세력이 대거 남하. 외형적으로 종교세력은 약화 - 50년 당시 개신교인 12만, 교회 1,400개, 신학생 1,200명에서 120명으로 감소, 민주당 1/5로 감소, 전반적으로 해방이후 4년간 약 40%감소 *당시 종교세력 가운데 천도교만 팽창). 이 기간중 감소 요인은 정책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고 여러 요인이 있음 (1) 신학전문 지도력 부재 (2)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전쟁기간중의 ‘종교허무주의’: ①미군의 무차별 폭격-예>50.11.8주일 신의주1,2교회교인 예배중 전원 몰살 ②반공단체소속종교인들의 만행-서북청년단 ③한국과 미국의 참전 군종들의 만행개입 의혹 등(전후 폴란드에 가 있던 전쟁고아들의 교회파손과 성직자 모독), 이러한 요인으로 ‘탈교붐’이 형성됨.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전후복구의 시급성으로 종교기관 복구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때부터 소규모의 ‘가정교회’ 형태가 등장하는 한편, 상층부에서는 통일전선에 주력.


3)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사상의식의 개조 단계(1959-1971)

5개년계획, 7개년계획 등으로 생산력 비약적 발전, 북한당국은 70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환했음을 선언. 자력갱생노선 본격화. 주체사상의 전면 부상. 사상의식 개조에 주력. 한편 장기적 입장에서의 남한의 혁명을 위한 관심 고조(남북연방제안).

여전히 통일전선이 요구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대내적ㆍ대외적 차원으로 이중화. 북한사회의 계급이 노동자ㆍ농민ㆍ사무원으로 단순화되어 동질성이 강화되어 노동당과 민주당 청우당 간의 우당(友黨) 관계도 돈독해짐(강양욱목사 등 종교지도자들의 최고인민회의 및 국가기관 참여 두드러짐). 종교시설 복구가 허용되었으나 종교인들 스스로 교육시설 복구와 민생안정을 우선시하여 양보(한편 예배당 없는 예배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않음). 68년에는 한동규목사 이영태목사 이순남전도사 등이 공화국 창건 20주년 훈장 등을 받음. 대외적 차원에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구성, 북한 종교인들의 사회주의권 종교인들과의 평화운동 연대. 그러나 이 시기 사상의식 개조 차원에서 진행된 주민성분조사는 종교인들을 위축시켰고, 사적이고 소규모적인 가정교회를 강화.  


4) 사회주의 완전승리를 위한 계속혁명1(1972-1985)

1972년 12월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되고 사회주의국가임을 대내외에 선언.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제’와 주체사상 확립. 그러나 70년대 이후 북한은 사실상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의 폐쇄성의 문제와 과중한 국방비 부담으로 인한 경제적 한계에 부딪힘.

이 시기에도 통일전선은 여전히 지속(북한 사회주의의 특이성)되고 크게 보면 이전시기와 유사한 구도로 진행(그러나 조선민주당 ‘사회민주당’으로 개칭, 종교인 비율 약화). 이 시기의 특징은 대외적 차원에서의 통일전선운동 급속히 강화: ① 72년 7.4남북공동성명 ② 60년대 이후 지속된 세계적 차원의 종교정세 변화-제2바티칸공의회, 세계교회협의회의 변신, 동서유럽에서 기독교인과 맑스주의자와의 대화 ③ 남한 기독교인들의 민주화운동 ④조기련 자체의 사회주의권 기독교인들과의 활발한 연대. 이때부터 북한당국은 남쪽의 기독교인들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 입장을 밝히면서 관심을 기울였고 나아가 종교, 기독교에 대한 적극적 입장으로 선회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 1984년 역사적인 도잔소회의를 통해 남북 기독교인 만남. 1985년 당시 조기련 4개부서 10개 지역 분할 50개 도시 지역위원회(81년 35개). 72년부터 3년제 평양신학원 운영. 83년 신약성서 찬송가, 84년 구약성서 발행.


5) 사회주의의 완전 승리를 위한 계속혁명2  (1986년 이후)

이전시기와 연장선상에 있으며, 80년대말부터 경제개방을 도모하고 있으나, 현재 식량위기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음. 서방과의 긴장완화와 평화공존, 군비경감을 통한 경제건설이 요구되는 상황. 미래는???

종교단체들간의 유대강화(89년 5월 ‘조선종교인협의회’ 구성)와 국내외통일전선에서의 역할 강화. 대외적 차원에서의 통일전선 질적 비약: 남북종교인들간 직접 만남 - 86년 88년 90년 글리온에서 남북개신교 대표 만남(WCC의 지속적인 관심과 협력), 연이은 미국, 캐나다, 일본교회 방북, 89년 문익환목사, 문규현신부 방북은 북한종교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높여준 사건(“북의 민중 2천만에게 가장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교회건립과 대규모 종교행사(봉수교회, 칠골교회, 89년 ‘기독교평양복음화대회’, 90년 ‘국제평화예배’), 89년 ‘조선천주교인협회’ 결성(개성, 남포, 원산에 지회 / 88년 장충동성당 축성, 평양에 2-300명 전국에 1,200명 신도), 91년 WCC 총회에 북한교회 옵저버로 참석, 98년도 남한 교회의 북한 방문.

* 88년 당시 개신교 교세: 목사 20명 목회자 300명, 1만~1만5천 신도(조기련에 6,000명 정도 가입/ 1999년 이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 개칭), 1년에 50~100명 증가, 그러나 노인들의 사망으로 상쇄, 평양 50개 포함 전국에 500여개 가정교회(2002년 6월말 현재 5백11개 교회 1만 3천43명인 것으로 밝힘), 전도사 집사 장로 등의 교직 존재, 72년 이후 신학교육자 30여명, 1년에 2번 성례전, 18세이상 성인세례(세례문답전 6개월간 학습), 목사의 결혼식ㆍ장례식 집전.

* 북한교회는 현재 남한교회와의 신학적 대화, 특히 주체사상과 민중신학의 대화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90년도부터 김일성대학에 종교학과를 개설하여 이미 홍동근 목사가 강의한 바 있고, 또한 주체과학원에 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도록 한 상태.        


4. 민족통일을 향한 길


남한의 교회는 기존 월남자의 일방적인 반공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먼저 북한 교회를 북한 사회 그 자체의 상황에서 조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남북의 교회가 협력하기 위한 발걸음의 첫 단계일 것이다.


* 이 강의안은, 김흥수 엮음, <해방후 북한교회사 - 연구 증언 자료>(다산글방, 1992)에 실린 강인철, "현대 북한 종교사의 재인식"을 중심으로 하여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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