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건 - 골로새서 2:8~15[천안YMCA 이사장 이취임예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4-17 22:01
조회
10353
2018년 4월 17일(화) 오후 7:00 천안YMCA 이사장 이취임예배
제목: 부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건
본문: 골로새서 2:8~15

오늘 무슨 말씀을 나눠야 할까 생각하며 그간 천안YMCA에서 말씀을 나눈 기회를 살펴보니, 제 기록상으로 오늘이 열 번째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사장 이ㆍ취임예배입니다만, 특별히 지난 번 이ㆍ취임예배가 기억납니다. 2014년 4월 17일이었습니다. 다들 기억하는 대로 4.16 세월호 참사가 터진 다음 날이었습니다. 컨벤션센터에서 하기로 했던 행사일정을 취소하고 무산될 뻔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ㆍ취임예배는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회관에서 조촐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정원 화수목에서 많은 분들을 모시고 이ㆍ취임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단지 우연히 엇갈린 현상이 아니라, 시대가 바뀐 하나의 징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보여주듯 사람의 삶이 뒷전에 밀렸던 시대에서, 이제 비로소 사람이 먼저라는 가치관이 전면에 등장하는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연초까지만 해도 위기가 격화되어 전쟁까지 염려했던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확립과 비핵화의 전망을 기대하는 상황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구시대의 가치관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촛불혁명 이후 적어도 새로운 방향만큼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대가 엇갈리고 있는 국면에서 최문환 이사장께서 이임을 하고, 유환성 이사장께서 취임을 합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책임이 무거웠던 것에서 가벼워진 것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방향에서 다름이 없고, 그 책임의 무게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구현해가는 방법의 차이가 있다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잘못된 세상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 절실히 요청되었다면 이제는 제대로 된 세상을 향한 대안이 절실히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오늘 이임을 하는 분과 취임을 하는 분들과 인연, 경험을 회상하자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에 그 이야기는 생략하고, 오늘 말씀에 비추어 오늘 우리가 이 시대에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초기 교회 가운데 하나인 골로새교회에 어떤 ‘철학’이 문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제시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합니다.
그 첫머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일관되게 부정적인 개념들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헛된 속임수’라는 말은 헛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을 말하며, ‘사람들의 전통’은 낡은 관습 또는 인습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유치한 원리’는 직역하자면 ‘세계의 원소’를 뜻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이 무엇인지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그 원소들을 땅, 물, 공기, 불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계 이해에 따르면 세계는 그 원소들의 순환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스문화권 안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러한 견해는 일정정도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구약성서 시대부터 이어져오던 신앙적 관념들과 융합하게 됩니다. 이 숙명적인 원소들의 순환에 매여 있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금욕’이라는 믿음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교회 안에 형성되었을 때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금욕을 구원의 방편으로 안 믿음은 먹고 마시는 것을 가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상의 원소들과 천상을 오가는 영에 대한 믿음은 초승달 축제나 각종 절기에 특별한 의식을 행하는 관습을 낳았고, 천사숭배를 낳았습니다.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런 믿음을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그런 믿음을 헛된 속임수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가 그리스철학의 사원소설을 동의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세계에 대한 이해와 구원의 길에 대한 믿음은 전혀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을 역설했다는 점입니다. 항간에 유포된 그런 이해와 구원의 길 사이의 인과관계에 관한 사람들의 믿음이 허황된 환상이요, 헛된 속임수라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 역시 그런 허황된 믿음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어떤 실체나 진실에 상관없이 자기 편한 대로 엉뚱한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자기 멋대로 세계관을 구성하여 판단하는 태도는 그 허황된 믿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른바 창조과학도 그 한 예이며, 특정한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예컨대 에이즈와 동성애의 관계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퍼뜨리는 것도 그 예이며, 특정한 정책이나 생각을 자기 멋대로 이념적 구도에 맞춰 재단하는 것(예컨대 토지공개념은 사회주의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개념을 반영한 헌법안은 사회주의적이라는 억지)도 그 예입니다. 보편적 가치기준에서 볼 때 명백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정당성을 강변하는 태도(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 전직 대통령들의 태도 등)도 그 예입니다. 무엇보다 시장의 신화를 믿는 믿음은 오늘날 잘못된 믿음의 전형이요, 가장 큰 폐해를 불러일으키는 허황된 믿음입니다. 잘못된 세계관은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낳습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그 헛된 속임수를 떨쳐버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것을 역설합니다. 말씀의 후반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그로부터의 부활의 의미를 역설하고 있는데, 바로 거기에 구원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 그 요체입니다.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부활인데, 도대체 그 사건이 인간을 구원하는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오랜 교회의 역사에서 그 의미는 희생제물로 죄를 대속했다는 이른바 ‘대속론’으로 설파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해가 ‘너 하나 희생됨으로써 우리는 편히 산다’는 차원에 머문다면 그것은 세상의 폭력적인 법칙을 용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희생제의를 정당화하는 대속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합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오직 온전히 사랑의 삶을 실천한, 무고한 예수께서 죽임에 이른 것이 사람들의 무지와 방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세상의 폭력적 질서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데 그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건은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내주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진리를 압살하는 것이요 사람들의 삶을 압살한 사건이었습니다. 무고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이 세상 권세자들과 통치자들의 무모함을 폭로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악한지 몰랐을 때는 그들을 구원자로 착각했습니다. 그 때는 그들이 정해놓은 질서와는 상관없이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는 예수가 무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체험하고서야 사람들은 그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깨닫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사건은 바로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의 실상을 명백하게 알고, 마땅히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같은 이치입니다.
그 실체를 알지 못할 때는 헛된 환상으로 기대하고 때로는 두려움을 갖지만, 그 실체를 알게 될 때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고 따라서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었고,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이 인간의 삶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들일 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마당에 더 이상 미혹될 일은 없습니다. 이 믿음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진정한 인간의 삶을 보는 기독교 신앙의 역설적 신앙의 요체입니다. 그 믿음으로 더 이상 허황된 철학, 허황된 신화와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인간의 삶에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천안YMCA가 지역사회에서 그 믿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새롭게 책임을 맡은 이사장의 역할 또한 그 믿음 안에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몫일 것입니다. 함께 뜻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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