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세계 교회사 13] 근대 그리스도교의 존재 방식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0-12 22:07
조회
1753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1 - 세계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0월 12일 / 최형묵 목사



제13강 근대 그리스도교의 존재 방식


1. 자본제의 성립과 근대의 사회의 성격  


중세에서 근세로의 이행은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근대사회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를 그 기본 특징으로 지니게 되었다.

  첫째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성립이다. 산업혁명의 진행과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통해서 성장하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을 대표로 하는 정치적 혁명(부르주아 혁명)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여 확고하게 지배적인 사회로 자리잡게 된다. 이것은 봉건체제하 지역적 단위의 경제권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보다 광범위한 지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이른바 국민경제권을 형성하게 한다. 이로 인해 서구에서는 국민국가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체제가 발생하고 이와 동시에 근대적 민족의식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한 팽창욕구를 지닌 자본을 그 현실적 기초로 하였던 만큼, 서구의 국민 국가 내지 민족국가는 새로운 시장의 개척을 위해 나서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할 수밖에 없는 내적 요인을 애당초부터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간의 경쟁은 결국 제국주의 국가간의 식민지 쟁탈전이라 일컬어지는 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부르짖으며 그것들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내세운 시민계급의 등장은 확실한 역사의 진보였다. 그것은 토지를 근거로 하여 신분제를 안전장치로 가지고 있던 봉건귀족들의 위계적 질서를 타파하였다. 이것은 사실 부르주아 계급만이 아니라 역시 새롭게 등장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농민을 포함한 모든 인민의 성과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되면서 그 성과는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전취되고 말았다. 모든 인민이 누려야 할 자유 평등은 부르주아 계급만의 독점물이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실상이었다.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과제가 제기되게 되었다.

  셋째, 이성이 새로운 사회질서의 규범으로 자리잡게 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이미 낡은 중세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길을 열어놓았다. 더욱이 경험에 입각한 과학의 발달, 지리상의 발견은 인간을 둘러싼 세계와 인간 자체를 재발견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중세적 세계관이 외적 권위와 전통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이라면 근대적 세계관은 세계 자체 그리고 인간 자체의 내재적 규정성을 원리로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성이라는 새로운 원리였다. 이러한 새로운 원리는 산업혁명과 정치적 혁명에 잇따른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파고(波高)를 타고 서구사회에 급속히 자리잡게 되었다.

  넷째, 개인주의의 확산이다. 이는 물론 세번째 특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곧 진리의 내재적 근거에 대한 추구는 구체적 개체를 중요시하게 하였다. 인간 사회에서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개인주의를 발전시켰다. 이제껏 진정한 의미에서 인정되지 않았던 개인의 자유가 비로소 인정된 것이다. 이것은 근대사회가 이룩한 또 하나의 진보적 성과였다. 그러나 이 개인의 자유는 점차 특정 집단 내의 자유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특정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또 다른 속박에 매여 있음을 확인하여야 하였다. 한편 개인주의는 점차 사람들을 분자화시키고 고립화시킴으로써 사회적 관계의 차원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2. 근대 기독교적 존재방식  


근대사회의 성격 그리고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기독교의 존재방식도 변화되었다.

첫째, 민족적ㆍ국가적 단위의 기독교 교회가 성립된다. 민족적ㆍ국가적 단위의 교회의 성립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적 교회질서의 해체를 의미한다. 중세기에는 오직 거룩하고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만이 인정되었다. 중세교회의 강력한 위계질서는 하부의 모든 교회들을 하나의 질서 속에 편입시켰다. 심지어는 하나의 언어(라틴어)로 예전을 치렀다. 민족적, 지방적 특수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질서가 해체된 것이다. 크게는 카톨릭과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성립하였고 이 교회들은 다시 민족적ㆍ국가적 단위에서의 특수성을 반영한, 더 나아가서는 지방적 특수성을 반영한 교회들로 분립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교회는 국가가 팽창할 때 동시에 그에 발맞추어 팽창하게 되는데, 그것이 선교운동이다.

  둘째, 민족적ㆍ국가적 단위의 교회의 성립은, 이러한 단위의 실질적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시민계급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성립하게 하였다. 물론 정교분리는 근대 세계에서의 국가권력과 교회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원칙이 되었다. 그것은 중세적 질서의 해체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실질적 의미를 지녔던 것은, 새로이 등장한 시민계급이 봉건세력과의 결별을 하고자 했던 그 지점에서 뿐이었다. 그러나 시민계급이 각국 내에서 실질적 지배세력으로 등장했을 때 교회를 다시 자신들의 질서하에 편입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에서 정교분리는 형식상 내지는 법적인 차원에서의 선언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명시적으로 세속정치 자체 내에 신정을 구현하고자 한 칼빈의 정교일치야말로 명실상부한 근대 기독교의 전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대개의 경우 형식상의 분리, 그러나 사실상 협력과 일치 관계를 이룬 근대 국가권력과 기독교와의 관계는 양자가 분화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시민사회의 보존이라는 공통된 과제를 수행하게 만든다. 곧 국가는 시민들의 세속사를 관장하며 교회는 영적 차원의 문제를 관장하게 된다.

셋째, 시민 각 개인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기독교가 성립하였다. 중세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성원이 되는 것 자체가 곧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속적 질서와 교회의 질서가 사실상 일치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의 형식상의 정교분리는 누구에게나 기독교 신앙이 저절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것이 되게끔 하였다. 그래서 이른바 신앙고백에 근거한 교파들로 분화되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물론 시민사회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선택행위는 아니었다. 내적으로 시민사회 원리는 탄탄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시민사회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근대적 신앙 역시 유형상 중세적 신앙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성격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민사회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시민사회가성취한 진보적 성과를 반영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리판단의 근거가 전통이나 사회 체제, 곧 외적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근거에서 찾아지게 된 것은 기독교 신앙에도 해당되었다. 중세의 카톨릭 교회가 신앙인의 외적 표징으로 성례전을 강조한 반면 근세의 개신교가 말씀 선포와 이에 상응하는 신앙적 결단을 강조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넷째, 신앙고백에 근거한 근세 기독교의 특징은 신앙의 개인주의화와 긴밀하게 관련되었다. 신앙고백에 근거한 기독교가 필연적으로 개인주의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근세 기독교에서 이 점들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기독교, 그것이 근세 서구 기독교의 특징이다. 이러한 기독교는 점점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감으로써 본래 기독교 신앙이 갖는 역동성과 사회성을 상실해 갔다. 경건주의적 신앙은 이러한 신앙의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그것은 사실상 시민사회의 내적 원리를 철저히 구현한 것이다. 곧 산업화에 이은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은, 이전의 집단성을 해체하고 인간을 철저하게 분자화시켜나갔고, 개인주의적 신앙은 이를 구현하였던 것이다. 시민사회의 성취 자체가 양 측면을 갖듯이, 개인의 발견은 한편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개체)이 인정될 수 없었던 중세 사회에 비해 진보한 측면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극단화는 이제 사회적 관계 속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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