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 교회사 01] 한국 민족사에서 기독교 시대 이전의 기독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1-02 23:45
조회
1917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1월 2일 / 최형묵 목사



제1강 한국 민족사에서 기독교 시대 이전의 기독교



1. 교회사를 공부하는 까닭?


‘한국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이면서 한국인’인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합류하는 두 전통 - 그리스도교의 전통(성서, 교회사)과 민족사의 전통    


2. 고대 한민족의 정신세계와 성서의 정신세계


신화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

정신문명의 보편성과 특수성

* 최치원의 난랑비서: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


하늘(天)에 대한 신앙과 유일신 신앙

삼신(三神: 桓仁ㆍ桓雄ㆍ桓儉; 三才: 天ㆍ地ㆍ人) 신앙과 십계명의 기본구조(神-人-物)  


3. 한민족 역사와 기독교와의 접촉 전사


기독교는 18세기에 이르기 전 한민족의 역사에 뿌리내리지는 못하였지만, 여러 접촉 기회가 있었다.

  

1) 당을 통해 접촉된 경교(Nestorians)

431년 파문당한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동방선교를 계획하여 그 제자들이 인도, 중국 등에 선교하였고, 중국에서는 이 기독교를 경교(景敎)라 불렀다. 당 태종 때 阿羅本(알로펜)이라는 선교사가 온 후 파사사(波斯寺)라는 교회를 세워 신민의 개종에 기여했다. 신라의 김춘추가 부산하게 당을 드나든 것도 이 때였으므로 전혀 무관심했으리라 보기 어렵다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 중국 西安府에서 1625년 발견된 大秦景敎流行中國碑와 금강산 장안사에서 1917년 발견된 그 모조품 /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 / 한국 불교와 경교 내지는 영지주의와 유사성 / 고대 세계 3대 해상권(지중해, 인도양, 극동) 가운데 극동의 해상권을 주도한 신라의 문물교류(7-8세기) / 19세기초 명나라에 왔던 선교사 팔라디우스(Palladius)가 당 시대 경교의 유행을 전하는 한국 책 발견


2) 몽골을 통해 접촉된 카톨릭 교회

중세기 서구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슬람권 넘어 동방에 기독교 군주가 다스리는 국가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한다. 몽골군이 유럽의 근경까지 정복해 왔을 때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불안해했으나(“우리들의 죄로 해서 알지 못할 부족이 침공해 왔도다.... 하나님만이 저들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아실 따름이로다”), 수 차례의 십자군 전쟁으로도 회복하지 못했던 성지를 몽골군이 점령한 이래, 기독교인들은 몽골의 종교적 관용정책으로 자유롭게 성지순례를 할 수 있었고 이를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 그리고 동방세계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하고 교황청은 기독교인일지도 모르는 동방의 군주를 만나고 그곳의 기독교인 형제를 격려하기 위해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루브르크(Gaillaume de Rubruc)인데, 그는 정작 몽골에 와서 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실망하였으나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루브르크는 우리 나라를 처음으로 서방에 소개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 이름을 특별히 기억할 만하다. 몽골군이 고려군과 더불어 일본 침공을 준비할 즈음 압록강까지 왔다가 교황청에 보낸 편지에 고려를 카울레(Caulej→Coree→Korea)로 소개한 것이다.(“윌리엄 부커아 師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도 카울레(Caulej)와 만스(Mance)라고 불리는 민족들의 사절단을 직접 목격했는데,...”)


3) 일본을 통해 접촉된 기독교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카톨릭교회는 교세확장을 위해 선교활동을 적극 펼쳤고, 그 일환으로 예수회 소속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일본에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후 노부나가 정권과 토요토미 정권의 관용정책하에서 상류층을 위주로 한 선교활동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토요토미는 선교사들을 만나 자신이 명과 조선을 정복할 터인데, 그 다음에는 “전역에 걸쳐 교회당을 건립하고, 그들 백성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聖道를 신앙하도록 하겠노라.”고 장담하면서 위계를 꾸미기까지 하였다. 실제로 임진왜란 처음 부산에 상륙한 왜군 25만명 가운데 10%이상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가운데서 고니시(小西行長, 세례명:Augustin)의 부대는 전부 기독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 때 명나라에서는 조선 파병 총사령관이 또다른 예수회 소속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방문하고 조선에서의 작전에 대한 진단을 받았다 한다. 조선 민족의 운명을 둘러싼 전쟁과 기독교와의 기이한 인연이 이루어진 계기였다.        

어쨌든 일본 침략군의 종군 신부로 포르투갈 출신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가 조선에 당도하여 6개월간 체류하였으나(熊川에서 되돌아감), 일본군 영내에서에서의 예배와 병졸들의 고해성사에 관한 보도가 전해질 뿐 침략군의 일원으로 온 세스페데스 신부와 조선 민중과의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확인하기 어려운 보도로 일본 그리스도인(キリシタン) 장병 몇 사람이 죽음 직전의 조선 어린이 2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카톨릭 신자가 되었고, 그들 가운데서 박해시에 유배나 투옥 등 형고를 치룬 사람이 25명, 순교자가 21명으로 전해지며 그 중 9명이 순교복자로 시성된 205인의 일본인 가운데 포함되었다. 또한 이 때 일본 내에서 신앙생활을 한 이들뿐 아니라 마카오나 유럽으로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들도 어렴풋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안토니오 코오레,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사람’).          


이상의 접촉 기회는 현재 한국 기독교 역사와 직접적인 연속성은 없다. 이에 대해 어떤 의의를 부여해야 할까?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기독교의 선교는 2백년 후에 시작되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