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 교회사 04] 선교사들의 활동과 초기 선교정책의 문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1-23 21:54
조회
2374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11월 23일 / 최형묵 목사


제4강 선교사들의 활동과 초기 선교정책의 문제

              

한국 기독교 역사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선구적 구도자들에 의해 자주적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바로 그 기초 위에서 전개되었다. 따라서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은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이미 결심한 구도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그 무렵은 씨를 널리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선교활동이 본격화되고 한국교회가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한국교회의 고유한 성격이 상당부분 왜곡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음양을 이 번에 살펴본다.  


1. 본격적 선교활동의 시작과 성과


1) 선교사의 입국과 본격적 선교활동

1884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알렌의 입국과 의료활동 / 1885년 미국 북장로회의 교육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의 입국과, 미국 감리회의 의료선교사 스크랜튼, 교육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부인 입국으로 이후 한국 선교사는 이 두 선교본부에 의해 주도된다.

1884년 중국의 영국 성공회 소속 신부들이 한국 선교부 설치를 요구한 이래 1889년 코르프 주교를 한국주교로 임명하여 1890년 입국 / 1889년 호주 장로교의 데이비스 목사와 그 여동생 입국 / 1892년 미국 남장로회의 한국선교 시작 / 1896년 미국 남감리회의 한국선교 시작(윤치호의 노력의 결과) / 1898년 캐나다 장로회의 한국선교 시작 / 1908년 구세군의 한국개전 / 1907년 성결교의 모체인 동양선교회의 한국선교 시작 / 1904년 하와이 노동자 출신에 의한 안식교 유입 / 1898년 러시아 정교의 선교 시작(1900년 첫 공식예배), 그러나 러일 전쟁이후 위축 / 1906년 침례교 계열의 선교활동 재개(1895년 시작) / 1896년 영국의 플리머드형제단 선교 시작 / 한일합방이후 일본교회의 진출 * 이들 대부분의 선교활동은 한국인의 요청에 의한 것이 주요 특징이다.


2) 초기 선교활동의 성과

초기의 선교활동은 주로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를 위주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간접 선교방식은  기독교에 대한 ‘무군무부의 종교’, ‘외세대변자’라는 편견을 극복하게 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이와 같은 선교방식을 통해 개신교는 민중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특별히 아동들과 여성들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다음으로 초기 선교활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전부터 한국선교의 사실상 초석이 되어 온 성서번역과 문서 편찬을 통해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지속적인 성서번역 사업의 진행 결과 1906년 최초의 공인본 <신약젼서>가 출간되었고, 1910년 <구약젼서>가 번역되어, 이를 1937년의 <개역>에 대비하여 <구역>이라 부르게 되었다. 특별히 성서번역은 민중계층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주 무식한 사람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식자층의 마음에도 들도록 깔끔하고 순수한 것을 추구했다.’(언더우드) 이 점에서 성서의 번역은 우리 국어사에서도 획기적인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이외에도 선교기관에서는 찬송가와 여러 교리서들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당시 발간된 많은 교리서들 가운데 한국인의 저술이 희박하였다는 점에서 선교사 주도에 의한 선교활동의 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2. 초기 선교활동의 문제


1) 교파형 교회의 이식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선교활동을 시작한 해외의 선교기관들은 다양한 교파들을 배경으로 하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여러 선교기관들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연합공의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각국의 선교기관들은 한국의 선교지역을 기득권을 전제로 분할하게 되었다(1909년 이후 대략적인 분할구도는, 인구 5,000 이상의 대도시는 공동점유하고, 서울ㆍ경기ㆍ충청ㆍ강원 등 중부지역은 미국의 남ㆍ북감리회와 남ㆍ북장로회가 중복을 피하여 담당하고, 평안도ㆍ황해도 지역은 북장로회와 미감리회가,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회가, 경북지역은 북장로회가, 경남지역은 호주장로회가, 호남지역은 남장로회가 맡는 식이었다). 이 분할선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도로 진행되어 이 합의에 참여하지 못한 교단들은 군소교단으로 틈새를 노리는 선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오늘의 한국교회 판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 네비어스 선교정책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젊은 나이로 경험이 부족하였으며(1885년 당시 스크랜튼과 헤론 29세, 알렌과 아펜젤러 27세, 언더우드 26세, 1890년 입국한 마펫 26세, 1888년 입국한 게일 25세), 따라서 선교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혼란을 겪었다. 언더우는 말하기를, “현장경험이 있는 분을 우리에게 보내달라고 계속해서 서한을 띄었는데 자신이 너무 젊어서 사역 현장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문제들을 놓고 쩔쩔 맨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북장로회 소속 중국 선교사로 30년이 넘게 활동한 네비어스가 서울을 방문하여 중국선교사업 원칙을 한국에 원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네비어스 선교방법’으로 알려진 이 원칙의 기본이념은 ‘자진전도’(自進傳道, Self-Propagation), ‘자력운영’(自力運營, SElf-Support), ‘자주치리’(自主治理, SElf-Government)의 원리로 토착교회 형성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기독교인들에게 희생과 봉사를 내용으로 하는 고도의 기독교윤리와 규칙적인 헌금의 습관과 자립적인 정신을 가르쳐 주는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그 시행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특히 교역자의 교육 면에서는 선교사들의 의도와 더불어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한국인 교역자의 교육 수준을 일반인의 수준으로 한정함으로써 교역자의 자질 향상을 제도적으로 규제하였고, 결국 초기 한국교회의 교역자들 상당수가 근대교육을 받지 못한 구세대인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캐나다 출신 선교사 스코트(Scott, 徐高道)는 이렇게 비판하였다: “자주치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 안에 계급조직이 생겨났는데 이 조직은 종종 교만한 임원진에 의해 좌우되었다. 교회 조직과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별개의 공동체가 되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으로 흘렀다. 자금운영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교회재정은 교회조직을 운영하는 데만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사회복지 같은 것을 위해 재정을 쓰는 것은 거의 생각지도 못했다.”              


3) 선교사들의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

선교의 열정을 앞세운 상당수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거의 맹목적으로 이단시하거나 사탄시함으로써 배타적 기독교를 형성하게 하였고, 결국 자주적인 동기에서 신앙을 수용한 한국인 고유의 신앙형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빚었다.


4) 그 밖의 문제들

그 밖에도 선교사 개인 사이의 불화, 과도한 선교경쟁으로 인한 신ㆍ구교의 갈등,  외교적 특권을 등에 업은 선교사들의 힘과 결부된 기독교의 민폐(敎弊) 등도 초기 선교활동 과정에서 드러난 심각한 문제들이었다.


결국 선교사들의 커다란 공헌에도 불구하고, 초기 선교활동이 빚어낸 병폐들은 이후 끊임없이 한국교회가 극복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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