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사 09] 교회의 내적 갈등과 종파운동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2-15 21:52
조회
1957
천안살림교회 2012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2년 2월 15일 / 최형묵 목사


제9강 교회의 내적 갈등과 종파운동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는 조선을 아시아침략의 전초기지화하였다. 그간의 이름뿐이나마 문화통치를 실시해 왔던 것에서 변화하여 본격적인 강압통치로 선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교회의 내부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교회ㆍ교파간, 신학적 보수와 진보간, 선교사와 한국인간, 서북지방교인과 중부지방교인간의 갈등과 분쟁으로 시련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한편으로는 신앙갱신운동과 주체적 교회수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또 한편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 또한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기독교의 민족운동 참여는 ‘비교회적’ 형태가 두드러졌다.


1. 교파신학의 형성과 신학적 갈등


처음부터 각기 교단별로 이루어진 신학교육은 교파신학 형성을 예고하였다. 특별히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장로교와 서울 협성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감리교의 신학은 그 성향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냈는데, 감리교가 최병헌, 양주삼(1915년 교수부임) 등 조선인 교수들이 두드러진 활동으로 대체로 자유주의적 성향을 띤 반면 장로교는 여전히 선교사 주도의 신학교육이 이루어짐(최초 한국인 교수 남궁혁 1928년 부임)으로 강력한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가지 신학적 갈등이 표출되는데, 1934년 ‘여권문제사건’ 과 ‘창세기모세저작부인사건’, 그리고 ‘아빙돈성경주석사건’ 등이 그 예이다.

여권문제사건: 장로교의 여성안수 금지규정(당시 감리교는 비록 선교사이기는 하지만 14명의 여성 목사 안수)에 대해 함경도출신의 김춘배 목사가 차별적 헌법으로 규정한 데서 발단된 사건. ‘여자는 잠잠해야 한다,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바울의 권면이 2천년전 한 지방교회의 가르침인가,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창세기모세저작부인사건: 함경도출신 김영주 목사가 필진으로 참여한 <만국주일공과>(장년부) 내용 가운데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의심하는 내용이 문제시되어, 앞의 여권문제를 다루는 특별위원회(박형룡 목사 참여)에 심사를 받게 되어 1935년 장로교 총회에서 오경의 모세저작설을 부인하는 목사는 교역자 자격이 없다고 결정.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 장로교 신학의 골간 가운데 하나인 ‘성서축자영감설’에 입각한 결정.

아빙돈성경주석사건: 감리교의 유형기 목사 책임하에 감리교의 양주삼, 정경옥, 김창준, 전영택, 변홍규, 장로교의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김관식, 김재준, 윤인구 등이 참여하여 발간한, 당시로서는 세계신학계의 정평있는 주석서를 장로교 총회에서 성서무오설에 입각하여 문제시한 사건.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이 ‘내나마나한 성명’을 발표함으로 일단락. 그러나 이들은 당시로서는 진보적 글들을 발표할 수 있었던 <신학지남>에 더 이상 글을 실을 수 없게 됨(당시 길선주 목사는 이 책을 이단서로 규정).

이 외에도 서북지방과 중부지방,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갈등이 표출되는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특별히 찬송가를 둘러싼 장ㆍ감 갈등.

            

2. 선교사 배척운동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 후 선교부 지도급인사들의 총독부와의 협력 및 동역 관계가 한국인에 의해 비난받기에 충분했고, 더욱이 1920년대에 내한한 제2세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 행태가 민족감정문제를 불러일으켜 교회안팎의 선교사배격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1925년 ‘허시모사건’(자기 집 사과를 따먹은 어린 아이 얼굴에 ‘도둑’이라고 쓴 사건)은 ‘반선교사’ ‘반기독교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26년 구세군 한국인 사관들이 만국사령관 부드의 방한에 맞추어 인종차별을 개선해달라는 진정서를 냈다가 출교당한 사건, 1925년 경성성서학원 학생들의 노예노동에 대한 항의로 동맹휴학한 이후 퇴학당한 사건 등은 당시 선교사와 한국교인들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사건들이었다. 1925년 ‘조선기독교동역자회의’(한국인 31/ 선교사 31 참석)에서의 한석진 목사와 마펫 목사 사이의 일화.

그러나 선교사배척운동은, 기본적으로 민족적인 자주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와 한국교인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일제에 의해 이용됨으로써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당시 한국 기독교에는 ‘반선교사’만이 아니라 ‘반일’이 요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부흥운동과 조선적 기독교 수립운동  


이상과 같은 현상을 생명력을 상실한 제도교회의 말기적 증상으로 진단한 교인들은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신앙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장로교의 김익두, 길선주, 감리교의 이용도 등에 의해 주도된 당시 부흥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과 달리 개인적 카리스마로 주도된 성격이 강하다. 또한 그 당시 부흥운동은 3.1운동이후 좌절된 한국민족의 정서를 반영한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부흥운동은 급진적 민족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의 구실을 제공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선교사에 의해 주도되는 생명력 잃은 제도교회에 대한 또 한 편의 반성은 여러 종파운동 및 ‘조선적 기독교 수립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의 무교회운동, 최태용의 조선복음교회의 창립은 조선적 기독교 수립 운동의 대표적 경우이다.


4. 끊이지 않는 기독교의 민족운동


1930년 전후 한국 기독교가 교회 내부의 문제로 골몰하고 있는 동안에도 민족주의적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은 지속되었다. 1926년 6.10만세사건, ‘신간회’, ‘근우회’ 등의 참여, ‘적극신앙단’ 운동, YMCA를 중심으로 하는 농촌계몽운동, 교인들의 절제운동과 사회사업의 전개 등. 그러나 이와 같은 기독교인들의 직접적인 사회개혁운동은 기성교회의 한계 때문에 훨씬 ‘비교회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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