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사 10]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기독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2-22 21:38
조회
1956
천안살림교회 2012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2년 2월 22일 / 최형묵 목사



제10강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기독교


1930년대 이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는 일제의 전시체제와 민족말살 정책 아래서 극심한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황국식민화’ 정책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여기에 대부분의 공식 교회 기관들과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굴복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인 형태로나마 이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초기부터 형성된 한국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갔다.


1. 일제의 전시체제와 민족말살 정책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고조, 세계경제의 공황으로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일본은 그 위기의 타개책으로 1931년 만주침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에서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 동안 전쟁을 수행하면서, 한국에 대한 물적ㆍ인적 자원의 동원과 수탈을 강화할 뿐 아니라 그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 통제하였다. 소위 ‘동화정책’ ‘황국식민화’ 정책으로 불리는 민족말살정책: 신사참배,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창씨개명, 일본어 상용 / 조선교육령개정, 육군지원병제도창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결성, 시국좌담회 개최, 국방헌금, 국민징용령, 학도 동원령, 여자 정신대 근무령, 공출...

종교단체법 개정으로, 신사(神社)와 종교의 분리라는 기만정책으로 사실상 모든 종교 위에 있는 신도(神道)를 국교화하고, 교회를 다시 신고제에서 허가제로(교역자 자격까지 인가)바꾸었으며, 기독교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교의와 일본 국체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계속 감시와 탄압을 일삼았다.


2. 신사참배 문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교묘한 논리로 기독교인들에게 설득하여 이에 동참하도록 하였으나, 많은 기독교인들(특히 기독교계 학교)이 이를 거부하고 특히 1935년 ‘평양기독교계사립학교장 신사참배거부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교회에 대해 직접적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회유에 천주교(뭇솔리니의 영향권에 있던 로마교황청 동원) 와 감리교에 이어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가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계속 버티던 장로교마저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 참여를 가결하도록 하여 이후 모든 공식적 교회 기관들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는 상황에 이렀다. 이로써 교단 차원의 신사참배운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견해는 일치되지 않았다(절대 불가의 입장-숭실학교 교장 맥큔 / 일부 종교적 요소가 있기는 하나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여 학교와 교회를 보존하는 방법으로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연희전문학교 교장 언더우드)


3. 기독교의 훼절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마지못해 심사참배를 용인하는 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가 교회 지도자들이 아예 부일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이었다. 여기에 일제는 집요하게 한국교회를 세계교회와 단절시키고 일본적 기독교를 만들려는 책동을 지속하여 해방 한 달 전 1945년 7월에는 한국의 모든 교회를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성결교, 안식교 등은 해산)으로 통합하기에 이른다. 평양신학교 등 기존의 신학교들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폐쇄하였다. 그러나 신학교육의 지속을 위한 교단의 필요에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 요구를 수용하는 차원에서 신학교가 재개하였다. 1940년에 문을 연 조신신학원(한신대학 전신) 역시 이와 같은 불행한 역사의 와중에서 출범한다.


4. 기독교인들의 투쟁


공식적인 교회가 일제에 굴복하는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반일적 성향은 여전히 강하였다. 특히 장로교와 구세군 교인들은 소위 일제가 책동한 ‘애국적 운동’에 극히 냉담하여 일제의 주목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의 교인들의 항일의식은 일제가 독려한 시국강연회 등의 기도와 설교 고백 등에서 오히려 일제의 전승을 기원하기보다 평화주의나 박애주의 입장에서 전쟁종식을 기원하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나 동방요배를 하고도 진심에서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당시 조선신학교 이사장 함태영 목사가 김재준 목사에게 한 고백: “난 이렇게 기도했네. 어서 속히 이 남산에서 일본놈의 귀신을 쫓아버리고 여기에 예배당이 서게 해주시오. 그리고 어서 속히 독립되게 하소서.”).

이 시기에는 또한 ‘수양동우회’(주요한, 유형기, 이대위, 송창근...)나 ‘흥업구락부’(신흥우, 이상재, 구자옥)와 같이 표면의 목적과 이면의 사실상의 목적(독립운동)을 결합한 단체 형식의 조직적 민족운동이 한 형태를 이루었다. 또한 여러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글운동(김윤경, 최현배 등), 민족주의 역사관을 지닌 학자들의 활동(함석헌, 김교신 - <성서조선>의 弔蛙 사건), 기독교 문인들의 활동(전영택, 박두진, 윤동주 등) 남궁억의 무궁화보급운동 등의 민족문화수호운동은 당시 민족운동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일제당국이나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을 전개하거나, 본격적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 그리고 은둔형의 소극적 저항 등의 여러 형태가 있었다. 조직적 집단적 저항운동의 주도자로는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북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 이주원, 주남선, 전남의 손양원, 그리고 백영흠 등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실행한 이들로는 전국 어디서나 교파를 불문하고 수없이 많았다. 이로 이해 대략 2,000여명의 교인이 투옥되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명이 순교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는 2ㆍ30년대부터 노골화된 교회 내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고, 결국 해방이후 극심한 분열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불씨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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