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사 13] 유신체제하의 한국 기독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3-14 22:08
조회
2173
천안살림교회 2012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2년 3월 14일 / 최형묵 목사


제13강 유신체제하의 한국 기독교


1960년대를 지나 7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한다. 양적인 면에서 성장의 추세는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매 10년마다 거의 2배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러한 성장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1)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공신력’,  2)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인한 사회불안의 팽배, 3) 교회 자체의 적극적인 성장 전략.

      

1. 1970년대 한국사회 성격

잘 알다시피 70년대 한국사회는 소위 경제개발계획으로 대표되는 급격한 근대화 혹은 산업화로 특징지어진다. 유사 이래 경험하지 못하였던 급격한 산업화는 절대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보리고개’ 탈출 / ‘새마을운동’...)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민중의 기본권 박탈 등 심각한 민주주의의 왜곡 현상(소위 개발독재)과, 전통적 가치관의 급격한 붕괴로 인한 사회적 아노미 현상(移村向都와 도시화의 문제)을 심화시켰다. 70년대 교회의 역할은 어떠한 측면에서든(인권운동이든 교회성장운동이든) 바로 이와 같은 사회현상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2.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교회의 역할

4.19의 충격에서 반성을 시작한 교회는, 60년대 꾸준히 사회참여 활동을 강화하였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각계 각층의 민중운동을 선도하는 몫을 감당하게 된다.

1) 새로운 시대를 예비한 교회: 1968년 ‘산업전도’에서 ‘산업선교’로 /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창립 / ‘학생사회개발단운동’ 발족 - ‘하나님의 선교’론에 입각해 현장 중심의 선교활동으로 이후 노동운동과 지역주민운동/도시빈민운동, 농촌/농민운동에 기여할 기틀을 마련.

2) 1970년대 초반 민중 문제의 폭발: 70년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분신 사건 / 71년 9월 파월 노동자 임금 체불에 대한 항의 분규 / 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 71년 8월 광주대단지사건 / 평화시장 등 영세상인들의 조세저항운동 / 동아일보를 필두로 한 언론자유 운동  / 재야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 / 사법파동 / 교수 자주선언 등 각처에서 개발독재에 항거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 선거가 치러져 신민당이 근소한 차로 공화당을 압박하자 박정권은 위기감을 느끼고(71년 10월 위수령 발동) 이후 유신체제로 돌입.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는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각계(신학생 / 교회청년회ㆍ연합회 / 목회자 / 연합기관 / 선교단체 / 교단)에서 대사회적 활동에 참여. 특별히 70~72년 사이 기장교단의 혁신적 조처들은 이후 기장 교회의 기틀이 됨: 70년 55회총회 ‘교회와 사회위원회 설치’/ 71년 56회총회 ‘사회선언지침’ 채택/ 72년 57회총회 ‘신앙고백선언서’ 채택 -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대사회 발언과 참여를 위한 공식적 근거로 제시: “교회의 사회선언은 어디까지나 사회 속의 민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민중의 것, 민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다만 그것을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부정ㆍ불의ㆍ사회악 등에 대결하며 몸부림치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현하는 데 예언자적인 외침을 하게 함과 동시에 참여적 용기를 갖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3) 유신체제의 등장과 기독교의 저항

위기감을 느낀 박정권은 결국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소위 ‘10월유신’을 단행하여 삼권분립과 견제와 균형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유신헌법을 공포( 10.27 비상국무회의 / 11.21일 국민투표). 이것만으로도 부족하여 계속되는 긴급조치 발동. 이후 유신헌법은 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암살되기까지 한국사회를 구석구석 지배.

그러나 이러한 극악한 공포정치의 상황에서도 학생들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은 쉬임없는 저항운동을 전개(헤아릴 수 없는 사건과 저항들...).

1973년 4월 남산부활절 사건 /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 “우리의 말과 행동의 확고한 기초는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 메시아 왕국의 포고자이신 예수, 민중 속에서 활발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성령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눌린 자와 약한 자와 가난한 자의 최후의 옹호자임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에서 악한 세력을 심판하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주 예수가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신 것을 믿는다. 메시아 왕국은 악한 세력을 꺽고 재산 없는 자와 거부당한 자와 짓밟힌 자의 안식처가 될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령이 새로운 역사와 우주를 창조하며 또한 각 개인을 부활하고 성화할 것을 믿는다.”/ NCC의 인권선언 / 장준하 선생을 중심으로 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74.1.8. 10일만에 30만 돌파)-긴급조치 발동 / 1974년 민청학련사건-국제적 압력으로 긴급조치1.4호 해제 / 자유언론실천운동 / 74년 7월부터 목요기도회 / 11.27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 오글 목사 추방 / 김지하 재구속 / 75년 인혁당사건 관련자 사형 / 시노트 신부 추방 / 75년 5월 긴급조치 9호 발동

*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과 정교분리를 내세운 기독교 세력이 대규모 집회를 계속: 71년 김준곤 목사 주도의 대학생선교회(CCC)의 ‘민족복음화운동’ / 73년 5월 한경직 목사 주도의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 9월 세계오순절 대회 / 74년 8월 CCC 주도 ‘엑스플로74’ 등등 / 조찬기도회/ 74년 11월 김종필 총리의 로마서 13장 발언 -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으로 대응

4) 긴급조치 9호와 국민적 저항

정상적인 통치방법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긴급조치를 남발하여 국민들을 구속하였으나(사회안전법/ 민방위법/ 방위세법 / 교육관계법 - 학도호국단 설치...), 이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결국 정권의 붕괴를 자초.

긴조 9호 이후 민주세력은 한 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나, 76년부터 역시 교회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저항에 나서기 시작(박동선 사건 / 카터의 인권외교). 이전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및 천주교 등 교계의 기도회 등을 선두로 저항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노동자 농민의 문제가 곧바로 정치문제화되는 경향: 76년 함평고구마사건/ 77년 2월 방림방적 체불 / 78년 2월 동일방직 오물사건. 또한 유신정권의 부패(78년 3대스캔들: 현대아파트특혜분양/ 교사자격부정발급/성낙현추문)로 급격한 민심이반. 정권의 탄압은 오히려 민주세력을 강화. 76년 3.1민주구국선언(윤보선 김대중 문익환함세웅)/ 78.12. 10대 총선에서 신민당 1.1%승리 / 79년 3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 5월 오원춘 사건 / 8월 YH무역노동자 사건/ 부마항쟁/ 10.26.        


3. 민중신학의 형성

70년대의 이와 같은 ‘사건’ 하나하나마다 기독교인들의 참여는 계속되었고, 그 사건에의 동참, 그리고 그로부터 이루어진 민중운동의 성숙과정에서 분명한 신학적 입장으로 형성된 것이 민중신학이다.    


4. 7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 문제

그러나 대다수 많은 기독교인들의 뇌리 가운데는 이상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기독교인의 두드러진 참여보다는 이른바 ‘심령대부흥회’로 대표되는 교회의 부흥운동과 그로 인한 성장의 경험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교회부흥운동은, 중간대목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재권력이 빚어낸 상황을 무마하는 효과를 가진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 그것은,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당시 피폐해진 민중들의 심성을 치유하는 적극적 기능 또한 갖고 있었다. 곧 급격한 기존질서의 와해를 경험한 사람들이 새로운 안식처로 교회를 찾게 된 측면이 있다. 이것이 교회의 외적ㆍ양적 성장을 가능하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생각할 때 외적 성장에 앞서 내적 성장 곧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에 더 주목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70년대 한국교회는 확실히 세계교회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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