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상호 존중과 이해를 위한 바탕 - 고린도전서 4:1~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12-12 17:18
조회
7905
2021년 12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상호 존중과 이해를 위한 바탕
본문: 고린도전서 4:1~5



고린도교회는 아주 복잡한 교회였습니다. 성서 기록상으로 볼 때 가장 골치 아픈 교회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그래서 그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몇 차례 편지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남아 있는 두 편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고린도전후서입니다.
본문말씀은 교회 안에서 파벌로 인한 갈등의 상황에 대한 권고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어떤 파벌이 문제였을까요? 1장 12절에는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게바 파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한다고 합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했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3:4~8)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지도자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갈려 있는 교회 공동체의 상황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덧붙여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농원과 건축물에 비유한 다음 이어지는 말씀이 본문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신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4:1~2). 이 대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갈등이 사도적 지도자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유념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바로 앞에서 지도자들은 공동체 속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바로 그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며 그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종)이요 관리인으로 봐달라고 요청합니다. 일꾼과 관리인은 사실상 같은 의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고 밝히면서 일꾼보다는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를 지닌 관리인이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지도자들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아볼로를 명백히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까지 의식했을까요? 이 말을 하는 순간 바울이 베드로를 의식하고 있었을지 않았을지 궁금증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바울 이후의 상황에서 이 이야기는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음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관리인인 만큼, 그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을 맡겨준 분에 대한 신실성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아가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지, 지도자들의 그 밖의 어떤 요인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지도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맡겨진 일을 얼마만큼 신실하게 감당하느냐 하는 점에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도자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특정 지도자에 편향되어 있는 각자의 의견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자신이 어떤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평가되는 삶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4:3~5).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 의해서나 아니면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받는 것을 중요치 않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것도 삼간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임의적 판단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살짝 내비칩니다. 자신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초점은 설령 자신이 스스로를 거리낌 없다고 판단할 때조차도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판하시는 주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매 순간 판단하는 것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또한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이야기인가 하는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 자체가 전적으로 무모하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다만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 판단의 차원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떤 일에 대해 이런저런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때 우리는 저마다 양심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주장을 그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그 본뜻에 다가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가 거리낌이 없다고 느끼는 것조차도 전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주님의 뜻에 대한 신실성에 의해 확증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 신실성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지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마저 그저 주관적인 것 아니겠느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그 점을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것을 궁극적 차원에 내맡기는 태도를 취합니다. 5절의 내용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오실 때에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므로 아무것도 미리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순간 어떤 것에 대해 판단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 실존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매순간의 판단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설령 양심에 비추어 흠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할지라도 그것마저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판단과 입장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겸허히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찌 보면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요, 또한 동시에 너무나 빈번히 오용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평범하다는 것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강조되어 왔기에 익숙하다는 것을 뜻하고, 오용된다는 것은 그 말이 함축하는 뜻과는 정반대로 특정한 입장을 절대화하는 논거가 되어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주장하며 강변할 때 그것은 말씀의 뜻이 오용된 경우입니다. 너무나 빈번히 경험하는 사태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오히려 그와 정반대의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이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 상황, 인간들 사이에서의 갈등 상황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갈등의 실체가 뭡니까? 각자의 주장이 절대화되고 타협의 여지없이 충돌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면, 각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이 각자의 정당성만을 내세우며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판단의 최종 근거로 하나님의 뜻을 내세운 것은 각자의 주장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거리두기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이는 성찰의 여지를 두는 것이며, 역지사지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갈등해법을 위한 오랜 지혜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또한 오늘 본문말씀은 매우 상식적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교회가 인권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저 갈등의 해법에 지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진정한 인권의 실현을 위한 근본적인 지혜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인권은 달리 말하면 상호존중의 원리에 근거합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너 또한 소중하다는 것이 인권의 근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만의 독단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소중히 하듯 너 또한 소중히 하지 않느냐, 내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듯 너 또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믿음을 인간 상호간의 존중의 근거로 삼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인권의 배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권의 옹호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인권의 문제의식은, 신앙에 덧붙여지는 부록과 같은 세상사가 아니라 바로 신앙 자체의 요구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관심사가 됩니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첨예하게 인권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이를 위하여 헌신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함으로써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데 헌신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인권옹호를 위한 실천을 교회 안의 ‘인권파’의 관심으로 돌리는 것은 신앙 자체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복음에 대한 신실성은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 모든 인간 삶에 대한 존중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채 100일도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를 두고 많은 걱정이 앞섭니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제 국가에서 그 선거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한 중요한 하나의 계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더딘 걸음이 될지언정, 그래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신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국가 지도자가 선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분별해야 해야 합니다.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꾸준히 이뤄낸 민주공화국의 여정에 퇴행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군바리’의 나라에서 ‘검바리’의 나라로 퇴행해서야 되겠습니까? 특정한 이해관계에 매몰된 특정한 세력이 권력에 집중될 때 그 나라는 결코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범죄자를 심판하는 논리로 정상적인 국정운영은 불가합니다. 강압적 논리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갈등의 심화를 뜻한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사법적 판단은 복잡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모든 분쟁을 사법적 판단에 맡기는 사회는 결코 성숙한 사회일 수 없습니다. 상호 신뢰와 존중이 그 밑바탕이 되는 사회라야 성숙한 사회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매우 긍정적인 희망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4:5)
공정한 심판의 논리라면 잘잘못이 가려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긍정적 전망만을 내세웁니다. 단지 변증가로서 바울이 아니라 목회자로서 바울의 변모를 보여주는 어법입니다. 그 긍정적 예견을 접한 갈등의 당사자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며 동시에 자신의 진정성 또한 이해받게 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단순히 어느 한편이 이기고 지는 결과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서로의 진정성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결과에 대한 기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믿을 때, 서로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이루기를, 나아가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드는 데 헌신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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