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얼굴을 가린 모세 - 출애굽기 34:29~3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1-30 16:54
조회
6484
2022년 1월 30(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얼굴을 가린 모세
본문: 출애굽기 34:29~35



본문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낯선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대의 종교적 표상을 담고 있는 이야기를 얼른 봐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을 대하면 먼저 아리송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종교적 관례와 그 표상에 관한 약간의 이해와 더불어 말씀의 전후문맥에 대한 이해를 동반한다면, 본문말씀이 매우 단순명료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얼굴에 광채가 나는 모세가 백성들 앞에 나설 때 얼굴에 수건을 두름으로써 그 광채를 가렸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단순한 사실에 본문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핵심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함축하는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본문말씀의 맥락을 환기해보겠습니다. 본문말씀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두 번째 계약을 맺고 백성 앞에 나타난 장면입니다. 두 번째 계약을 맺은 사연이 무엇 때문입니까?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그 지도자 모세가 이미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하나님이 안 계신다 생각한 백성들은 금송아지로 신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계약의 말씀을 돌판에 새겨 나타난 모세는 격노하여 그 돌판을 백성 앞에 내던져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할 수밖에 없게 된 사연입니다.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참회한 모세는 다시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과 마주하고 말씀을 받아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돌판에 새긴 말씀의 요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통상 십계명으로 알려진 말씀이지만, 출애굽기 기록으로 보면 이미 십계명은 백성이 시내산에 이르러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20:1~17), 다만 이 장면에서는 다시 돌판에 그 요체를 새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 형식으로 되어 있지는 않고 그 요체와 상응하는 핵심적인 말씀들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거주하게 될 땅의 사람들과 계약하지 말 것과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른 종교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배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풍요의 신, 다산의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 곧 물질적 축복을 지상의 가치로 아는 삶의 방식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초점입니다. 만들어진 신은 진짜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교절을 지킬 것을 새삼 확인하고 있습니다. 첫 곡식을 바치는 무교절은 본래 농경민족의 절기였습니다. 농경민들에게 누룩을 넣지 않는 빵을 먹는 것은 일체의 옛 곡식과는 상관없는 새 곡식으로 식량을 삼는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무교절이 이집트로부터 해방을 기리는 유월절과 결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교절의 의미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 새로운 백성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처음 태어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확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안식일은 철저히 지켜져야 했습니다.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안식일은 꼭 지켜야 했습니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새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계명에 이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방식을 간략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사십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그 계약의 말씀을 돌판에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 앞에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돌판을 들고 나타난 모세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광채가 나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어근은 ‘뿔’을 나타내는 말의 어근과 같아서 라틴어 번역본은 모세에게 ‘뿔이 났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서양에서 뿔이 난 모세를 나타내는 작품이 많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광채가 나다’ ‘빛이 나다’로 새기는 것이 옳습니다. 어쨌든 모세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백성들은 그것을 보고 감히 모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하던 말을 다 마치고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은 부연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지만 백성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고대 종교의 관례를 보여주고 있는 이 이야기의 의미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신과 그 대리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고대 종교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이 대목에서 유일하게 등장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신의 사제가 가면을 쓰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감추고 신의 대리인으로서 위엄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의 영광을 인위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신의 후광을 그렇게 가시적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신과 인간을 가교하는 비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 그렇게 신의 영광의 아우라를 인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같으면 내면의 빛이 얼굴로 드러나기를 추구하겠지만, 고대 종교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확실하게 인위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런 관념의 세계에서 사제의 가면은 신의 대리인이라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입은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고, 마침내 사람들이 알아보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서 그 빛을 가리기 위해 수건을 두릅니다. 광채를 인위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광채를 가리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고대의 관습인 사제의 가면에 대한 이스라엘의 재해석, 성서의 재해석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입은 것을 과시하며 백성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그것을 과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춤으로써 백성과 친근하게 교감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마치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사회 무교절의 의미를 해방의 새 역사를 뜻하는 유월절의 의미로 전환한 것과 똑같은 방식의 의미의 전유입니다.

이 진실은 이 이야기 하나로만 표현된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아주 집요하고 일관되게 그 뜻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주권과 그 백성간의 관계에 관해 성서는 일관된 강조점을 갖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고대 사회에서 신의 주권은 지상의 권력에 대한 후광으로서 그 이념적 지지기반이 되었습니다. 지상의 통치자가 신의 대리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지상의 권력에 대한 후광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을 제한하고 백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근거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이야기(사사 6~8장),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아비멜렉의 이야기(사사 9장), 사무엘의 이야기(삼상 8:4~17) 등 숱하게 많은 이야기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불의를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권자라는 것을 성서는 집요하게 강조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권력의 제한과 균형을 찾는 방안으로서 삼권분립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고, 인권을 보장하는 근거로서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모세 이야기는 성서가 집요하게 전하는 그 진실의 또 하나의 원형이 될 만합니다. 오늘 이야기에 앞서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잘못을 범했을 때도 모세는 같은 입장에 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백성을 심판하는 입장에 설 수 있었지만, 오히려 백성의 편에 서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입장에 섭니다. 그 참회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을 때 모세는 다시 하나님 앞에 나서 말씀을 받는 역할을 맡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얼굴을 가린 모세, 그 모습은 신의 영광을 도용해 백성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끝까지 백성의 편에 서서 그 백성과 하나님을 가교하는 역할을 맡는 지도자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진실하게 소통하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성서일과에 따라 주어진 오늘 본문말씀은 시기적으로 절묘합니다. 선거 때마다 제기되는 쟁점이기는 하지만, 종교와 정치의 문제가 새삼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특정후보가 무속에 기대는 현상, 역시 특정후보를 두고 목사들이 서슴없이 안수기도를 하는 행위가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음험한 정치적 욕망이 종교의 이름으로 치장되고 있는 사태이며, 이는 정치와 종교의 부적절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주적 헌정질서를 따르고 있는 사회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정치와 종교가 무관하다든지, 종교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든지 하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인 역시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믿는 입장에서 세상에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행위로서 정치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단적으로 말하면 정치의 종교화, 또한 정반대로 종교의 정치화를 배제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거나 간섭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 한편 반대로 종교가 정치권력에 기대어 특권적 지위를 향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속에 기대는 현상이 함축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신비한 종교적 아우라를 억지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바람직한 사회를 향한 정책적 비전을 만들기 위해 종교적 지혜를 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엉뚱한 주술적 믿음으로 혹세무민하는 것이며, 이로써 시민적 책임의식에 입각한 정치적 선택행위를 흐리게 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치인 스스로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특정 정치인에게 다짜고짜 안수를 해댄 행위는 종교인, 곧 그 해당 목사들이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역시 종교인으로서 적절한 조언을 함으로써 도움을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특정한 종교적 예식으로 행해져야 할 일을 마땅히 그런 자리도 아닌 자리에서 했을 때 그 숨겨진 저의가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들 마음대로 도용해 끌어 왔을 때, 그들의 숨은 야욕은 거꾸로 그 정치권력에 기대어 자신들이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데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양 측면에서 정치와 종교가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그 양 측면의 문제가 한 후보자를 둘러싸고 집중되고 있다면 해당 후보자와 그를 둘러싼 세력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서의 독특한 관점이지만 심지어 제정일치 시대에서조차 권력에 의한 종교의 오용 가능성을 억제하고 있거늘, 오늘날 정교분리 원칙이 상식으로 공유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정치인이나 종교인 모두 권력의 욕망이 아니라 민주적 시민의식을 그 밑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을 그 근거로 합니다. 그 신앙적 근거에 입각해 오늘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가치를 지향해야 하고, 우리 사회의 정치가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 되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자 동시에 책임있는 시민으로서 바른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지난 주간 한국기독교교회협의에서는 그 선택기준을 제안하였습니다. ‘생명 안전’ ‘주권 재민’ ‘한반도 평화’ ‘사회 평등’ ‘생태 정의’가 그 기준입니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만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동시에 사람들 가운데서 진실로 겸허하게 공의를 이루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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