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거룩한 전쟁, 성서는 이를 옹호하는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2-13 12:02
조회
3238
* 이 글은 예전 썼던 글로 본 게시판에 올려져 있었으나(미간행), 이번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으로 곧 출간될 <교회가 알려 주지 않은 기독교 이야기>에 게재하기로 하여, 수정된 원고로 올립니다(예전 글 삭제).


거룩한 전쟁, 성서는 이를 옹호하는가?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어리석은 물음


성서는 전쟁을 어떻게 볼까? 사실 이 물음은 곧바로 난관에 봉착한다. 한 번 성서 본문을 볼까?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 2:4)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고 나서라.”(요엘 3:9-10)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모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반론적 의미에서 성서는 전쟁에 관한 일관된 견해를 제시하지 않는다. 성서의 전쟁관은 성서해석의 과정에서 확립되는 것이지, 본문 자체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해석의 문제로 들어가면 더더욱 복잡해진다. 어떤 기독교인은 ‘절대 평화론’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고, 또 다른 기독교인은 ‘거룩한 전쟁론’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는다. 또는 ‘전쟁 불가피론’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는 입장도 있다.

물론,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구약성서와는 달리 신약성서를 어떤 입장의 근거로 삼고자 한다면 문제는 조금 간단해진다. 신약성서 특히 예수에게는 전쟁을 옹호한다고 볼 만한 내용이 거의 없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절대 사랑을 가르친 예수가 털끝만큼이라도 전쟁을 옹호할 만한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생각하면 물음에 대한 답이 매우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게 간단한 것만도 아니다. 예컨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는 발언은 달리 생각할 만한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 발언이 결코 전쟁과 관련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폭력적 상황의 불가피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거룩한 전쟁론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까지는 어렵다 하더라도, 이처럼 폭력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근거를 찾자면 찾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신약성서를 근거로 한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전쟁관을 찾는다는 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물음을 그와 같이 던지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성서 본문에 관한 해석학의 문제를 이 자리에서 새삼 장황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어떤 사안에 관해서든 문자적 의미에서 성서적 근거를 들이대는 것은 항상 동일한 문제를 야기한다. 성서적 근거를 찾는다는 것은 어떤 사안에 대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성서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해석의 문제이다. 곧 본문을 통한 깨달음의 문제요 적용의 문제다. 이 점에서 “성서가 말하는 것만 말하고 성서가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태도는 어떤 입장을 표명하든 위험하다. 그것은 진실에 접근하는 태도가 아니라 도그마에 대한 신봉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와 관련하여 전쟁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아마도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소위 ‘거룩한 전쟁론’일 것이다. 또 다시 어리석은 물음을 던져 볼까? 성서는 과연 거룩한 전쟁을 옹호할까? ‘그렇다’고 답할 수도 ‘아니다’고 답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무모한 논쟁으로 미궁에 빠지기보다는 물음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문자적인 의미에서 성서가 옹호하니까 지지하고 성서가 옹호하지 않으니까 거부한다는 답을 내려는 물음이 아니라, 거룩한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사태의 의미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옹호될 수 있다면 어떤 점에서인가, 그것이 거부되어야 한다면 어떤 점에서인가를 따져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면에서 성서의 정신과 부합하는지 어떤 면에서 성서의 정신과 괴리되는지를 새겨야 할 것이다.    


2. 거룩한 전쟁


오늘날 ‘거룩한 전쟁’의 개념은 흔히 이슬람교와 관련하여 자주 논란이 된다. ‘성전’ 곧 ‘지하드’는 사실 이슬람 세계 안에서도 중요한 논란꺼리이다. 이교도에 대한 정복전쟁을 성전이라 부른가 하면, 처음부터 그 위험성을 우려한 이슬람 신학자들은 그 의미를 방어적 전쟁에 국한해 사용할 것을 역설하며 그것이 정당성을 갖는 기준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또한 근현대 이슬람 신학에서는 그 의미를 군사적 행위로서보다는 진리를 향한 투쟁 또는 노력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법률적인 추론과 해석을 뜻하는 ‘이즈티하드’가 ‘지하드’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개념이라는 것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이슬람 세계에서 많은 저항세력이 성전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슬람 세계 안에서 모든 전쟁이 성전으로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현대의 기독교 세계에서 ‘거룩한 전쟁’, ‘성전’을 공개적으로 외치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다. 9.11 테러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외쳤다가 거센 비판에 부딪힌 경우는 있다. 그만큼 전쟁을 거룩하다고 부르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 못지않게 기독교 세계 안에서도 ‘거룩한 전쟁’에 관한 논란은 지속되어 왔다. 또한 오늘날 이슬람의 경우처럼 수세적이기보다는 공격적인 성전을 옹호해 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배적인 기독교 세력은 거룩한 전쟁을 당연한 소명으로 여겨 왔다.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결합은 전쟁을 하느님의 일로 성화해야 할 필연성을 배태하였고, 그 이후 역사는 그것을 사실로 입증했다. 역사상 가장 극명한 사례는 십자군 전쟁이다. 그것은 명백히 서방 세력이 이슬람 세계를 포함한 동방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전쟁은 그 이름이 증명하듯 거룩한 전쟁으로 불리웠다. 군사적으로 패퇴하였으나 문명적 전환의 기회를 누린 서방 기독교 세력은 근대 이후 더더욱 광범위하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그 때에도 정복전쟁은 성전으로 미화되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 베르나르(St. Bernard: 1090~1153)는 이렇게 설교했다: “그리스도의 전사로서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싸우기를 바란다. 적을 살해하였다고 죄책감을 갖거나 혹은 자신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죽이든지 죽임을 당하든지 어떤 죽음도 주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서구 사회에서 국가와 교회가 제도상 분리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결코 분리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식민지 침략전쟁을 바라보는 기독교의 시각 이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전쟁을 정당화기 시작할 때 파급될 수 있는 우려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도 옹호될 수 있는 전쟁의 조건에 관하여 심각하게 검토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불의한 전쟁’과 ‘의로운 전쟁’을 나누어 그 기준을 분명히 했다. 불의한 전쟁이란 이웃나라를 정복하여 지배하려는 전쟁으로, 의로운 전쟁은 훼손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당한 목적과 방법을 사용하여 수행하는 전쟁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진지하게 숙고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도도 그 의도대로 적용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단자들과 저항세력을 진압하는 데 그 ‘의로운 전쟁’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루터가 입에 담기 어려운 끔찍한 언어로 농민 반란군을 진압할 것을 역설했을 때에도 그의 뇌리 가운데는 그와 같은 정당화가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3. 야훼의 전쟁


이와 같은 지배적 기독교의 전쟁관은 나름대로 확고한 성서적 근거를 갖고 있다. 소위 ‘야훼의 전쟁’ 개념이다. 예언서들에서 이 개념은 점차 종말론적 성격을 띠게 되었지만, 성서에서는 특정한 하나의 원형을 갖고 있다. 바로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 과정에 관한 최근 구약학의 연구결과는 매우 다양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성서의 표면 줄거리는 분명히 야훼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민족에 대한 정복 전쟁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줄거리를 따라 보면 수적으로나 뭘로 보나 열세에 있던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방민족들을 물리친다. 그들이 군사력에서 월등히 앞선 이방세력을 물리친 것은 전적으로 야훼 하느님 덕분이라고 믿은 데서 야훼의 전쟁 개념이 형성된다. 군대와 무기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이방군대를 물리쳤다는 신앙이다. 그렇게 이방 족속을 물리친 이스라엘은 독특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헤렘’이라 불리는 이 독특한 의식은 사람을 남김없이 살육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전리품마저 깡그리 소멸시키도록 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족속에게 유혹받을 수 있는 요소를 철저하게 단절한다는 뜻을 지닌 의식이었다. 거룩한 전쟁은 바로 그와 같은 야훼의 전쟁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의 상황을 만난다. 성서적 근거를 찾는다고 할 때 이와 같은 성서의 전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서구의 지배적인 기독교의 전통은 그 전승을 그대로 사실로 믿고 그것을 동시에 하나의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성서의 문자가 전하는 상황을 다른 상황에서도 직접적으로 대비해 적용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도 그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여호와의 증인의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제기되고 병역대체 입법안이 논의되었을 때 한기총 등 보수적 기독교 단체는 즉각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였다. 병역대체 입법안이, 사실상 여호와의 증인에 한정되는 특정 종교에게 특례가 될 소지가 있어 형평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견해였다. 거기까지는 소위 ‘정통’ 교회가 ‘이단’으로 간주하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의견개진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다며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신앙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했다. 이것은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신앙과 결합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일반적인 하나의 태도이다.

그러나 사실상 마찬가지로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신앙의 경향이 농후한 여호와의 증인은 전혀 다른 성서적 근거로 전쟁에 반대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그 근거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상무기인 총을 들지 않는다. 국가의 명령에 대한 거부도 아니고, 처음부터 국가의 폭력 장치인 군대에 대한 거부도 아니다. 살인 무기에 대한 거부이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상황을 놓고 보면 기독교인으로서 마음이 착잡해진다. 아예 여호와의 증인이 국가권력의 폭력적 성격, 군대의 폭력적 성격에 이의제기를 하고 그 폭력집단에 가담할 수 없다고 한다면 더 좋을 법하다. 하지만 현재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렇게까지 나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생명존중을 가장 분명하게 일깨우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 나름의 방식대로 철저하게 지키려는 뜻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인이 정당화되는 전쟁의 상황과 그 계명의 모순을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해결하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그 상황보다 우선한다고 보면 해결 못할 바도 없다. 정반대로 기독교가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선 기독교인들은 그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까? 종군 목사나 신부가 전투행위에 참가할 수 없다는 원칙은 들어 봤어도 기독교인 병사가 총을 쏘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데도 모종의 해석 장치가 작동할 것이다.


4. 기독교인으로서 윤리적 선택


결국 성서적 근거를 모색하는 것은 해석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서로 모순되는 본문을 들이대며 갑론을박하기보다는 성서가 전하는 전쟁 상황 자체를 진지하게 재해석하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기독교가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보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전쟁을 반대하는 논거를 성서에서 구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아예 그러한 내용을 특수한 역사적 상황으로 돌려버리는 방식도 가능하다. 고대적 유습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적 신관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던 시절의 흔적일 뿐이라고 일축해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나오는 많은 유습들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일점일획도 잘못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성서에 나오는 고대 유대인의 풍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는 않다. 사실 이러한 해석은 어떤 입장에서든 이미 많은 부분 수용되고 있다.

그렇게 해석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면 성서가 전하는 야훼의 전쟁에 대해서 얼마든지 달리 이해할 수 있다. 성서가 증언하는 해방의 사건 맥락에서 그 전쟁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관한 여러 가설 중 하나는 사회혁명설이다. 단순한 군사적 정복이라기보다는 ‘히브리’로 불리는 하층민의 반란과 혁명이 중요 동인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렇게 보면 표면의 지배적 진술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벌인 전투는 종족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계급투쟁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히브리인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전쟁이 된다. ‘군사력’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대비되는 전투 상황 묘사는 그와 같은 해방전쟁의 성격을 말한다. 그것은 군사적ㆍ물리적 지배력에 맞서 민중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정당성의 대결을 함축한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진멸하는 ‘헤렘’의 관습도 잉여재산의 사적 점유를 방지하는 방책이 된다. 그것은 평등한 공동체를 위협에 빠트리는 요인을 근원적으로 허락하지 않으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모든 재물을 진멸할 뿐 아니라 사람마저 진멸하는 그 잔인함은 오늘의 관점에서 도저히 용인되기 어렵다. 성서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따라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다만 잔인한 그 ‘헤렘’의 법칙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한다면 평등한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의도, 바로 그 점일 뿐이다.    

물론 이렇게 야훼의 전쟁을 공세적인 정복전쟁이 아닌 지배의 폭력에 대항한 해방전쟁으로 본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방전쟁이라 하지만 그것 역시 폭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잠깐 우회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입장에서는 그저 한 테러리스트의 폭거로 봤고, 안중근 자신과 독립을 염원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독립전쟁으로 여겼다. 지배의 폭력에 대항하는 해방전쟁은 이렇게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말 그대로 전쟁이 거룩하다고 인정될 수 있는 한계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이다.

그러나 거룩한 전쟁이 말 그대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보다는, 오용되거나 남용된 상황이 두드러지는 것이 문제다. 전쟁이라는 폭력적 상황에 거룩함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데서 오는 필연적 귀결일까? 해방전쟁이라 해도 유사하다. 인민해방군이 어느 새 인민을 억압하는 군대로 전락하는 사례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모든 시도가 무모하니 내 안의 폭력부터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도 한다. 지배의 폭력이든 저항의 폭력이든, 그것은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킬 뿐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폭력성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간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성을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제거하는 과제는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노력이 현실로 존재하는 지배의 폭력에 대한 방어책은 또한 되지 못한다.

결국 전쟁에 상황에 대한 지지와 거부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한 도그마로 해결될 수 없다. 누구인들 평화를 원하지 않을까? 그러나 엄연히 갈등이 존재하고 또한 극한의 전쟁의 상황이 끊이지 않는 현실이 문제다. 그 현실에서 전쟁의 상황에 대해 입장을 결정하는 것은 어떠한 선택이 해방적일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구체적 행위에서 완벽한 선택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여러 가지 행위들 가운데서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을 순간순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선택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기를 거부하는 신앙의 전망을 늘 유념해야 한다. 나아가 진정한 삶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근본 뜻을 언제나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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