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성서배경사 제17강 "고대 이스라엘의 통일국가에 대한 고고학적 쟁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0-07-03 00:23
조회
3574
천안살림교회 수요성서연구 <성서배경사>

17회 “이스라엘 통일왕조에 대한 고고학적 및 역사학적 논란”

최형묵 목사 / 2010년 6월 30일  


고대 이스라엘의 통일국가에 대한 고고학적 쟁점


1. 문제의 쟁점


성서 고고학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통일국가에 관한 문제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 문제와 함께 가장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통일국가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매우 풍부하지만, 그 풍부한 기록과는 대조적으로 고고학적 증거는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풍부한 성서 기록과 빈약한 고고학적 증거의 대조되는 성격 탓에 이 시대에 관한 이해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입장으로 나뉜다. 하나는 최대주의(maximalist)의 견해요 다른 하나는 최소주의(minimalist)의 견해다. 최대주의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통일국가에 대한 성서의 기록이 역사적 핵을 담고 있다고 보는 반면 최소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관한 성서 전승에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어느 편이 옳을까?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속단하기 어렵다. 우선 성서 해석학과 성서 고고학의 차이를 전제할 필요가 있다.

성서 해석학은 성서 기록이 담고 있는 역사적 핵, 본문 전승들의 다양한 층위 및 그 기록과 편집 과정, 완성된 본문의 신화적 구조 및 문학적 구조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는 가운데 성서 본문 기록의 의미를 밝히는 매우 복합적인 과정이다. 이 점에서 성서 고고학은 성서 해석을 돕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다시 말해 성서 해석학은 고고학적 증거의 유무에 따라 그 진위가 일거에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역사비평학 성립 이후 현대 성서학이 성서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들이 어떤 역사적 핵을 담고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고고학적 증거는 무시할 수 없는 해석의 중요한 하나의 고려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서 기록 자체의 역사성을 탐구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신화적 진리로서 성서 기록을 주목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려는 입장 또한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고학적 증거가 해석의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요컨대 성서 해석학은 오늘날 발전한 성서 고고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성서 고고학이 추구하는 사실 증거에 대한 해석을 넘어서는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 고고학은 초기에 성서의 역사, 문학 비평, 또는 해석에 도움이 될 만한 유물 증거를 밝혀내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지만, 오늘날에는 그 자체의 목적을 지닌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발전해가는 추세에 있다. 그 까닭에 더 이상 성서 고고학으로서보다는 일반 고고학의 한 분야로서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으로 불리고 있는 실정이다.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은 성서의 본문 기록을 입증해 주는 보조적 역할보다는 성서 기록을 넘어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물을 밝혀내고 그에 기초하여 역사를 재구성 내지는 재해석하는 과제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성서 기록은 거꾸로 발굴된 유물의 성격을 규명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보조적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요컨대 오늘날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으로 불리는 분과 학문은 성서의 기록을 넘어서는 보다 광범위한 역사의 재구성을 목적으로 하는 셈이다. 성서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유물의 맞대응에 근거한 순환론적 추론의 정당성 자체가 왕왕 문제되는 까닭도 현대적 의미의 성서 해석학과 성서 고고학이 각기 다른 목적과 방법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여전히 ‘성서 고고학’이라는 개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은, 성서의 기록과 직결된 고고학적 증거의 규명이 성서 해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고고학적 증거 자료가 성서 해석의 진정성을 확보해 주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고 보는 입장에만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고학적 증거와 성서 기록의 심각한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불일치가 뜻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주목하는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성서 해석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 사실의 부재를 통해서도 새로운 의미의 차원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 상황을 유념할 때, 고대 이스라엘의 통일국가에 대한 최대주의자들의 입장과 최소주의자들의 입장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성서 본문 기록의 확실성을 신뢰하는 입장이 성서 본문의 해석이 단지 고고학적 증거로만 그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극단적 태도에 빠지지 않고, 반대로 고고학적 증거 규명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입장이 고고학적 증거가 부재하다는 것으로 성서 기록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극단적 태도에 빠지지 않는다면, 두 입장의 대결은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것으로 보인다. 성서 본문 기록이 사실 재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한, 그 기록은 사실 관계와 조응할 수도 있고 정반대로 모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고학은 성서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규명하는 데서 아직 너무나도 많은 미지의 영역을 남겨 두고 있다. 그러므로 열린 가능성을 전제하고 현재의 탐구 성과를 살펴보는 일은 흥미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성서 기록이 전하는 다윗-솔로몬의 고대 이스라엘 통일국가 개요를 살펴 본 다음 현재의 고고학적 성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결론 삼아 그 남은 과제들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2. 고대 이스라엘 통일국가에 관한 성서 기록의 개요


다윗-솔로몬의 통일국가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매우 풍부하다. 성서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이 시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은 신명기 역사에 해당하는 사무엘상 8장부터 열왕기상 11장, 그리고 역대기 역사에 해당하는 역대기상 3장부터 역대기하 9장에 이르기까지 병행되어 있다. 이 기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지만, 이 시대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족적 구조와 지도력은 시대의 위기를 견뎌내지 못하였다. 인접 국가들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중앙집중화된 통치 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기원전 11세기 4반세기말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최초로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아마도 10년에서 20년 정도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북쪽과 길르앗, 그리고 유다의 이스라엘 지파들은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통합되었지만, 그것은 불안정한 통일이었다. 사울 통치 막바지까지 팔레스타인의 많은 부분, 곧 해안지역의 블레셋, 북쪽 계곡과 평야의 가나안 사람들의 거주지, 요르단 동편의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통제 밖에 있었다. 그의 통치는 바로 이들과 네게브 지역의 아말렉 사람들과의 계속되는 전쟁과 갈등으로 특징지워졌다.

사울이 죽고 난 다음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대략 기원전 1,000-965년까지 통치하였다. 그의 왕국 형성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북쪽 지파들과는 분리되어 있는 이방인 주거지인 여부스 사람들의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이었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성”이 되었고, 다윗 왕조의 본거지가 되었다. 다윗 왕조는 400년 넘게 지속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치하에서 민족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성서의 전승을 따르면, 다윗은 전쟁과 확장 정책으로 네게브에서 북쪽의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그 판도는 블레셋 사람들의 해안 평야 지역을 제외하고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동쪽의 대부분과 시리아의 일부, 그리고 페니키아 해안의 일부를 포괄하였다. 이 왕국은 전통적인 관료제에 근거한 혁신적인 국가기구를 통해 통치되었다.

성서의 전승은 다윗을 전사요 위대한 국가의 창시자로 전하고 있지만, 화려한 건축 사업을 주도한 것으로는 전하지 않는다. 그 과제는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남겨졌다. 솔로몬은 다윗의 정책과 영토의 대부분을 유지하였다. 솔로몬의 통치 시기는 경제적 번영과 행정적 재조직화의 시기였다. 성서를 통해 볼 때, 솔로몬의 광범위한 무역망은 실루기아와 이집트를 포괄하였다. 새로 개발한 엘랏만의 에시온게벨 항구를 통해 남부 아라비아(시바 왕국)와의 무역도 활발했다. 솔로몬은 페니키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 두로와의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무역활동과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풍요롭게 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의 통치는 강제노역을 포함한 세금 부과 체제를 갖고 있었기에 그 체제하에서 북쪽 지파들의 불만이 쌓여 갔다. 결국 솔로몬이 죽은 다음 왕국의 북부와 남부의 분열은 불가피했다.          


3. 고대 이스라엘의 통일국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성서의 기록이 역사적 핵을 담고 있다는 보는 입장에서는 그 기록이 고고학적 증거들로 입증될 수 있으리라 보고, 초기의 일부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들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지만 다윗-솔로몬의 통일왕국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다윗-솔로몬 통일왕국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발굴 시도가 쉽지 않았다. 오랜 세월 존속한 도시로서 여러 시대에 걸친 유적과 건축물들 및 주택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윗-솔로몬 통일왕국에 대한 고고학적 입증은 성서 기록이 언급하고 있는 다른 지역들에 대한 발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가 미미한 상황에서 성서기록에 대한 최소주의적 입장에서는 다윗-솔로몬 왕조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들까지 제기되었다. 심지어는 다윗 왕의 실존 여부까지 의심되기도 했다. 다윗 왕은 아서 왕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견해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1993년 여름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 텔 단에서 고대 유물의 파편이 발견됨으로써 다윗 왕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란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후대 사람들이 깨뜨려서 건물의 받침돌로 사용한 현무암 기념비의 일부인 이 유물에는 “다윗 가문”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아람어로 씌어진 이 비문은 아람 왕의 이스라엘 침공사실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그 파편의 명문에는 아람 왕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 내용이 다메섹 왕 하사엘이 기원전 835년 무렵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공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는 성서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된 후에 일어났으며 그 결과는 양국의 무참한 패배였다. 이 기록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통치시대로부터 100년도 안된 시대에 다윗 왕조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한편 최근에 프랑스 학자 앙드레 르메르는 다윗 가문에 대한 유사한 언급이 기원전 9세기에 활동한 모압 왕 메사의 유명한 비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비문은 19세기에 사해의 동쪽에서 발견되었다. 이로써 다윗 왕조가 가나안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결과 논란의 초점은 다윗-솔로몬과 그 왕조의 실존 여부에서 그 규모와 성격에 관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과연 성서의 기록대로 고도의 중앙집권적인 국가이자 동시에 더 나아가 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아직 미미한 일인통치체제(chiefdom)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1) 사울 왕권의 고고학적 증거

다윗-솔로몬 왕조가 확인된 만큼 그 전사에 해당하는 사울 왕권의 존재와 그 성격을 규명하는 것 또한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울 왕권의 고고학적 흔적은 매우 빈약하다. 성서에 사울 왕의 수도는 기브아로 전해지고 있다. 일찍이 올브라이트는 그 장소를 예루살렘 북쪽으로 7Km 떨어진 텔 엘풀로 동일시하고, 그곳에서 요새의 망대 일부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 전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밖에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 등의 산지와 이즈벳 사르타와 같은 유적들에 대한 조사와 발굴이 이뤄졌는데, 언덕 꼭대기에 있는 농경지, 작은 촌락, 노천 예배소와 같은 것들이 확인되었다. 남쪽으로 유다 북부 지역에는 정착촌이 훨씬 더 드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원전 11세기 블레셋 지역에 해당하는 아스돗, 텔 게리사, 텔 미크네(에그론), 아스글론 등의 발굴 결과는 당시 도시문명이 번창하였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


2) 다윗 왕권의 고고학적 증거

다윗 왕권과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 역시 빈약하고 모호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윗 왕의 도성이었던 예루살렘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예루살렘의 오벨(Ophel) 남쪽에서 발견된 큰 규모의 고고학적 파편들이 다윗 왕의 궁궐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논란 가운데 있고, “여부스인의 경사로”로 알려진 돌계단의 연대 또한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윗 왕권을 보다 확실하게 입증하는 유물로 주목받는 것은 가나안 도시들의 파괴 흔적이다. 므기또의 지층 VIA나 텔 카실의 지층 X 등은 번성하던 가나안과 블레셋의 도시들이 화재로 파괴된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증거들이 다윗 왕의 공격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방어벽과 원형의 주거 흔적을 지니 키르벳 다와라, 또는 중앙의 열린 공간을 중심으로 주거지를 형성한 텔 브엘세바의 지층 VII 등과 같은 작은 촌락들 또한 다윗 왕의 통치 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헤브론과 유다의 산지 등의 유적은 “정착 역사에서의 급진적인 발전”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 시대 문제는 논란 중에 있다.

이상과 같은 발굴 결과의 미흡함 때문에 다윗 왕 시대에 국가의 성격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회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대규모 군대를 비록 단기간일지라도 전쟁터에 배치하는 데 필요한 부와 인력, 조직 수준을 나타내는 흔적 역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러난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적은 유다의 주민들이 이웃의 몇몇 지역을 기습공격할 인력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조직적인 국가의 면모는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최근에 발굴된 키르벳 케이야파(Khirbet Qeiyafa)는 다윗 왕국이 상당한 수준의 국가 규모를 갖추었다는 것을 예측하게 해 준다. 성서 기록에서 유다 왕국의 전략적 요충지 가운데 하나인 사아라임으로 추정되는 키르벳 케이야파는 2005년에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2007년과 2008년에 본격적으로 발굴되었는데, 큰 규모의 석조 요새로 둘러싸여 있다. 이 유적은 상대 연대로 보면 철기 IIA 시기에 해당하고, 탄화된 올리브 열매에 대한 측정을 근거로 한 절대 연대로 보면 대체로 다윗 왕 시기(대략 기원전 1000-965년)에 해당한다. 그 성벽의 규모는 200,000톤의 돌을 필요로 할 만큼 크다. 이와 같은 규모는 중앙집중화된 정치조직의 힘과 권위, 곧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단일 주거층으로 된 이 유적은 연대에 관한 논란의 소지 또한 적어 다윗 왕 시대 제법 규모를 갖춘 국가의 존재를 강력하게 입증해 주는 증거로 주목받고 있다.  


3) 솔로몬 왕권의 고고학적 증거

키르벳 케이야파에 대한 최근의 발굴이 이뤄지기 전까지, 오랫동안 강력한 국가체제로서 다윗 왕권을 입증할 고고학적 발굴이 미흡한 상황에서 솔로몬 왕권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 확인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아마도 다윗 왕국의 판도와 체제를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간주되는 솔로몬 왕국을 규명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솔로몬 시대 자체뿐만 아니라 다윗 시대까지도 간접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기간에 강력한 국가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솔로몬 시대를 규명함으로써 다윗 시대를 조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매우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확인만 할 수 있다면 예루살렘의 솔로몬 왕궁과 성전의 유물은 그 왕권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솔로몬 왕권의 유적을 확인하는 일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예루살렘 성전 산 아래 제2성전의 벽과 구별되는 다른 벽이 솔로몬 시대 성전의 벽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을 뿐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없다.

그러나 솔로몬 왕권의 증거로 간주되는 다른 유물들은 적지 않다. 다윗 왕권의 증거로 간주되는 유물에 비하면 솔로몬 시대의 유물은 매우 풍부한 편이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 왕은 므기또, 하솔, 게셀 등의 도시를 다시 세웠다고 했다(열왕기상 9:15이하). 고고학자들은 이 세 도시에 주목했고,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그 세 도시가 솔로몬 시대에 재건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므기또를 발굴한 미국 시카고대학 동양연구소는 지층 IV에서 발굴된 건축물을 솔로몬 시대의 마구간으로 단정했다. 솔로몬 시대의 증거는 야딘이 하솔을 발굴하면서 훨씬 보강되었다. 야딘은 이 도시에서 철기시대에 세워진 대형 성문을 찾아냈다. 그 성문의 구조는 양편에 세 개의 방이 설치되어 있어서 “육방성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야딘은 20년 전 발굴된 므기또의 성문 구조와 동일한 것을 확인하고, 솔로몬 시대를 입증하는 것은 마구간이 아니라 바로 그 특이한 성문 구조인 것으로 보았다. 야딘은 그것을 게젤에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현장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게젤 발굴 보고서를 뒤졌다. 20세기초 영국 고고학자 매컬리스트가 기원전 2세기에 지어진 마카베오의 성이라고 단정한 건물구조에서 므기또와 하솔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성문 구조를 확인했다. 야딘은 솔로몬 시대 예루살렘의 건축가가 도시의 여러 성문 기본 설계도를 그린 다음 그것을 각 지방에 보냈다고 주장했다.

야딘의 솔로몬 유적 발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60년대초 야딘은 므기또의 마구간 밑에서 아름다운 궁전의 유적을 찾아냈다. 이 궁전의 건축양식은 ‘비트 할라니’라 불리는 철기시대에 세워진 시리아 북부의 궁전형태와 같은 특징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야딘의 제자 다비드 우시쉬킨은 그것이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건축한 궁전에 관한 성서의 설명과 완벽하게 부합한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그것이 솔로몬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발굴의 결과들은 성서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확신을 깊게 심어 주었다.

이밖에도 솔로몬 시대를 입증하는 것으로 간주된 유적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사사시대와는 다른 형태를 보이는 주거지들과 요새들이 발견되었다. 강수량이 지극히 적은 네게브 지역에서의 주거지들 또한 발견되었다. 솔로몬 시대를 나타내는 지표가 될 만한 성문과 궁전의 발견, 그리고 광범위한 지역의 주거지들과 요새의 발견으로 솔로몬 시대의 넓은 국가의 영토와 강력한 국가의 성격은 한층 그 실체 규명에 다가선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 시대의 국가 규모와 성격의 규명은 바로 이전 다윗 시대의 국가의 규모와 성격 또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성서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단기간에 이뤄질 수 없는 지속적인 국가의 발전의 과정이라는 점에서도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 남은 과제


그러나 다윗-솔로몬의 통일국가를 입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여전히 논란 가운데 있다.

먼저 발굴된 유물들의 연대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와이트먼(G. J.  Wightman)과 핑컬스타인(Israel Finkelstein)은 전반적인 연대의 이동을 제안하면서 기원전 10세기의 유적이라 여겨지던 것들을 9세기로 끌어내렸다. 와이트먼은 사마리아에서 발굴된 토기 연대 측정에 근거하여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간주되는 유적들을 기원전 9세기 중반 곧 아합 왕 시대로 내려 잡고 있다. 핑컬스타인은 기념건축물, 요새, 기타 국가의 성숙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처음 레반트의 다른 지역에 나타난 시기와 일치한다는 논지에 근거하여 솔로몬의 시대로 추정되어 왔던 유물들을 9세기초에 속한 것으로 조정한다. 그렇게 새로운 연대를 제안함으로써 시리아의 비트 힐라니 궁전과 유사한 므기또의 궁전의 시차를 조정한다.

만일 이와 같이 새로운 연대를 적용할 것 같으면, 여전히 다윗-솔로몬 시대를 입증할 만한 유력한 유적은 존재하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당대의 국가의 규모와 성격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가 된다. 새롭게 제안된 연대가 다른 고고학자들에 의해 널리 수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논란의 상황은 여전히 발굴된 유물들의 연대가 확정하기에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연대 설정의 지표가 될 만한 유물을 발견하고 규명할 수 있을 때, 다윗-솔로몬의 통일왕국의 규모와 성격에 관한 규명 또한 더욱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고고학과 성서학의 기본 전제에 관한 논란이다. 키스 화이트램(Keith W. Whitelam)은 이른바 ‘성서연구 담론’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 담론’이라고 말한 학문적 작업의 복합적인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때문에 고대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무시당하거나 침묵당해 왔다고 본다. 그것은 성서연구의 관심 대상이 바로 오늘날 서양문명의 뿌리로 간주되고 또 그렇게 제시되고 있는 고대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이트램은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 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에서, 그 전제에서 벗어나지 않은 현대 성서학과 고고학이 철저하게 현대 국민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성서학과 고고학의 논거들을 들어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평가는 성서학과 고고학에 대한 정치적 평가라고 일축할 수만은 없는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이 성서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하고, 그에 따라 이스라엘의 기원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주장하려는 성격을 띠어 왔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서 고고학’이 아닌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이라는 인식 지평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경향은 여전히 강력한 것 같다. 그 점에서 화이트램의 주장은 일리가 있으며, 따라서 명실상부한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과 그에 따른 팔레스타인 전체 역사의 재구성을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같은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복합적인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문화 변동의 과정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솔로몬의 통일국가에 대한 규명 또한 그와 같은 복합적인 과정의 한 국면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해된다고 해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진정성이 훼손될 것이라 두려워할 까닭도 없다. 어차피 성서는 사실적 기록 그 자체가 아니라 복합적인 역사 과정 안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의 열망을 그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복합적인 역사적 과정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서 기록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더욱 실감나게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참고자료>  

Amihai Mazar, Archaeology of The Land of The Bible 10,000 - 586 B. C. E., 1990.

Edmund Leach, Structualist Interpretations of Biblical Myth, 신인철 옮김, 『성서의 구조인류학』, 한길사, 1996.

G. J. Wightman, "The Myth of Solomon", BASOR, 277/278(Feb.-May, 1990).

Hershell Shanks ed., Ancient Israel - From Abraham to the Roman Destruction of the Temple, 1999, 김유기 옮김, 『고대 이스라엘 - 아브라함부터 로마인의 성전 파괴까지』, 한국신학연구소, 2005.

Hershell Shanks, Baruch Halpern, William G. Dever, P. Kyle McCarter, Jr,, The Rise of Ancient Israel, 1991, 강승일 옮김,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 한국신학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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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성, 『김성 교수의 성서고고학 이야기』, 동방미디어, 2002.
전체 4
  • 2010-03-13 11:08
    종횡무진 두서없이 한 이야기가 이렇게 채록되었군요.^^

  • 2010-03-13 17:00
    정리 감사합니다 ㅎㅎ

  • 2010-03-14 23:11
    감사합니다~^^ 옆구리 팍팍 찔러 무임승차한 듯하지만...
    rn함께 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달래봅니다^^

  • 2010-03-15 10:12
    굴뚝같은 마음, 달래지 마시고 확! 불 질러 보세요~~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