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구제역 사태를 보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01-09 22:03
조회
2493
* <주간 기독교> 다림줄 11번째 원고입니다(110109)


구제역 사태를 보며


어릴 적 시골집에는 가축들이 많았다. 집 본채 외양간에는 제일 중요한 자산인 큰 암소가 있었고 별도의 축사에는 몇 마리의 작은 소들이 있었다. 마당 한켠 우리에는 돼지가 있었고, 툇마루 밑에서 밤을 보낸 닭과 오리들은 낮이면 마당을 휩쓸고 다녔다. 소는 농사에 없어서는 안되는 노동력이었고, 돼지는 적절한 때 가계자금에 기여하였고, 닭과 오리는 낳아준 알로 내 학비에 보탬이 되어 주고 마침내 가족을 위하여 자기 몸을 내줬다. 저마다 가축으로서 소용되는 용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놈들이 언젠가는 처분되어야 하는 운명을 기다리는 단순한 소모품은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거두고 길렀지만, 이놈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돌보는 일은 어린 나의 중요한 몫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 놈 한 놈 그 표정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덩치가 큰 소는 말할 것 없거니와, 그만그만해 보이는 닭들이 어쩌다 이웃집 닭들하고 뒤섞여도 분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비록 가축으로서 그 소용에 따라 처분될 운명을 지녔다 해도 이놈들이 집안에 있는 동안은 교감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어쩌다 팔리고 처분되어 볼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서운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겉잡을 수 없는 구제역 사태로 무려 100만 마리 이상의 소와 돼지들이 한꺼번에 살처분되는 상황을 보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소와 돼지의 구제역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어떤 방역대책도 무용한 상황이 된 데다가 이제는 조류 인플렌자까지 확산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살처분만이 유일한 방안이 되고 있다. 실로 끔직한 ‘대학살’이다. 인간은 그렇게 잔인한 동물인가 싶어진다. 인간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처하지만 실은 다른 존재의 고통에 대해 그토록 둔감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싶어진다.


사태가 그 지경이 되다 보니 곳곳에서 자성이 일어나고 있다. 방역시스템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밀집사육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정부 차원에서는 산업진흥 방편의 축산업정책 기조가 방역과 환경, 그리고 동물복지 기준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도 한다. 모두 나름대로 일리 있는 대책이 되겠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축산물을 공산품처럼 생산해내는 공장식 사육 시스템 자체가 변화하지 않으면 대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농산물과 축산물을 마치 공산품처럼 생산하고 소비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삶의 방식, 그런 삶의 방식을 정당화하는 인간의 문명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를 우리는 지금 겪고 있다.


성서 창세기와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것들을 인간의 먹을거리로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먹을거리를 엄격히 제한한다. 그것은 한 생명의 영위가 다른 생명의 죽음과 희생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질서 자체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함축하고 있다. 오늘의 사태는 성서의 이 교훈을 새삼 일깨워준다. 그러고 보니 새삼 떠오른다. 내 어릴 적에 집에 그렇게 많은 가축들이 있었지만, 정작 고기를 먹은 것은 명절날이나 그 밖의 잔칫날뿐이었다. 그 삶의 방식이 주는 교훈 또한 되새겨야 할 일이다.


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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