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생명에 관한 단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0-01-11 14:36
조회
3324
*<주간 기독교> 다림줄01(100111)

[ <주간기독교> '목회단상' '생명의노래'에서 '다림줄'로 난을 바꿔 칼럼 계속 연재합니다.]


생명에 관한 단상


요한복음의 한 대목(요한 8:48~59)을 보면 유대인들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께서는 일관되게 당신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당신의 권위는 거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따라서 당신의 말을 따르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유대인들은 흥분하여,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죽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예수를 보고 더 심각하게 공박한다. 예수께서는 정말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소리로 응수한다. 당신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고 아브라함은 당신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다고 선언한다.


무슨 이야기일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너무 쉬운 답변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한 분이므로 태초부터 계셨으니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와 같은 교리적 이해를 넘어서,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생명에 관한 놀라운 진실을 말하고 있다. 태초의 하나님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님 그 자신, 그리고 생명 자체의 심원함을 말한다. 간단히 생각하자면, 우리의 생명은 단순히 1~2대에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생명,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이든 예외 없이 머나먼 근원을 갖고 있다. 생명 하나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 생명의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은 그 생명의 진실을 알고 있고 그 진실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하나의 계보의 시조로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다. 아브라함이 예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다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서 희망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참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 진실을 깨닫고 그 진실을 체득하고 있다면 사람이, 이 땅의 뭇 생명이 어떻게 보일까? 한마디로 생명의 소중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누구 하나 잘못되면 모두가 잘못된다는 심정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불가피한 희생의 논리는 설 자리가 없다. 경제성장을 위한 무차별적 개발이 이뤄질 수 없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일자리의 차등이 있을 수 없고, 법질서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소중한 개인들의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일년이 다 되도록 차가운 냉동고에 갇혀 있던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뒤늦게서야 평안한 땅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께서는 지금도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다.


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


* <천안신문> 종교인칼럼(100114)

[위 내용을 약간 수정하여 <천안신문> 송고한 원고입니다]


생명에 관한 단상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일년이 다 되도록 차가운 냉동고에 머물던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뒤늦게야 평안한 땅에 안겼다. 내내 용산참사의 현장을 지켰던 시인 송경동의 시가 마음을 울린다. 우리 사회의 힘없고 억울한 이들이 벌이는 생존투쟁의 현장에 늘 함께 한 그인지라 경찰서에 드낙거리는 일이 잦은데, “혜화경찰서에서”라는 시에서 그는 통화기록을 들이대며 자백을 강요하는 으름장에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다.


“내 과거를 캐려면 / 최소한 저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 /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 저 바닷가 퇴적층의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 /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 이게 뭐냐고”


힘없는 사람들 목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성장만능주의, 개발만능주의 현장에서 그에 저항하여 싸우는 시인의 익살에 담긴 심원한 생명에 대한 통찰에 절로 탄복할 수밖에 없다.  


성서 요한복음의 한 대목(요한 8:48~59)을 보면 유대인들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예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께서는 일관되게 당신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당신의 권위는 거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따라서 당신의 말을 따르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유대인들은 흥분하여,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죽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예수를 보고 더 심각하게 공박한다. 예수께서는 정말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소리로 응수한다. 당신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고 아브라함은 당신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다고 선언한다.


무슨 이야기일까? 기독교인들은 너무 쉬운 답변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한 분이므로 태초부터 계셨으니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와 같은 교리적 이해를 넘어 생명에 관한 놀라운 진실을 말하고 있다. 태초의 하나님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 그 자신, 그리고 생명 자체의 심원함을 말한다. 간단히 생각하자면, 우리의 생명은 단순히 1~2대에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생명,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이든 예외 없이 머나먼 근원을 갖고 있다. 생명 하나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 생명의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은 그 생명의 진실을 알고 있고 그 진실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하나의 계보의 시조로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다. 아브라함이 예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다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서 희망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참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 진실을 깨닫고 그 진실을 체득하고 있다면 사람이, 이 땅의 뭇 생명이 어떻게 보일까? 한마디로 생명의 소중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누구 하나 잘못되면 모두가 잘못된다는 심정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불가피한 희생의 논리는 설 자리가 없다. 경제성장을 위한 무차별적 개발이 이뤄질 수 없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일자리의 차등이 있을 수 없고, 법질서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소중한 개인들의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이 겨울 한파보다 더 차가운 사회적 냉기가 가득한 오늘 생명의 진실, 생명의 소중함을 새삼 절감한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