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고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0-04-19 10:29
조회
2729
* <주간 기독교> 다림줄 네번째 원고입니다(100419).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고


그리스도의 고난, 곧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고난과 그 죽음의 고난을 딛고 일어선 부활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에 해당한다.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모순에 담긴 진실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이다.


이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 의미는 자명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에게 그 진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자신들이 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다시 산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경험한 바도 없고, 따라서 죽음의 의미도 헤아릴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부활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부활 자체에 대해서, 또는 부활의 형태에 대해서 구구하게 말했다. 부활이라는 것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 사람이 죽었다 부활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부활하는 것이냐 말이 많았다. 바울은 이에 대해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딱 한 마디로 줄여 말한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


아마도 바울은, 사람들이 부활을 죽었던 시체가 소생하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을 답답하게 느꼈을 것이다. 삶, 죽음, 부활 등등을 문자 그대로 일차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을 답답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선포한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육체적 차원에 한정해 말할 것 같으면 한 번 숨넘어가면 끝인데, 어떻게 날마다 죽을 수가 있을까? 죽음과 부활이 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 말은 정반대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한다. “나는 날마다 다시 삽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거듭난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날마다 거듭나는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는 항상 모순된 현실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현실이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현실 또한 있다. 내 안에 누군가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독침과도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능히 누군가의 상처를 치료해 줄 만한 고귀한 마음 또한 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있으며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이끄는 것도 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곧 “나는 날마다 죽고 나는 날마다 거듭납니다.” 하는 것은 매 순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거부하고 삶으로 이끄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멀쩡한 강물에 삽질을 해대며 “4대강 살리기”라 한다. “나는 매일 죽습니다” 하는 말에서 “나는 매일 되살아납니다” 하는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면, “살리기”라는 말이 감추고 있는 “죽이기”의 실상을 깨닫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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