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계속되는 죽음 앞에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9-06-13 15:50
조회
3005
* <천안신문> 종교인칼럼 20번째 원고입니다(090611).


계속되는 죽음 앞에서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의 충격과 애도의 여운이 채 가시시도 않았는데 또 다시 충격적인 죽음의 소식을 접했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강희남 목사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으로 오늘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서자는 취지의 유서를 남긴 채였다.


돌이켜보건대 이 땅의 민주화의 과정에는 수없이 많은 죽음들이 있었다. 4.19와 5.18, 그 밖의 여러 정치적 폭력에 의한 희생만이 아니다. 절박한 호소와 함께 진실을 외치며 자결의 길을 택한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있었다. 멀리는 1970년 전태일의 죽음에서부터 수년 전 농민 이경해의 죽음, 그리고 최근 5월에는 화물노동자 박종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누가 죽음을 미화하고 싶을까? 학생과 노동자들의 자결이 줄줄이 이어지던 한 때 한 시인이 외쳤던 것처럼 ‘죽음의 굿판을 치우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죽음 앞에 가혹하게 그 외침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죽음들은 당사자의 의지나 선택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오늘 그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 죽음으로써 절박한 현실을 토로하고 진실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 당사자들에게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누추하게 느껴지고, 죽음으로 호소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기에 그 안타까운 죽음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현실을 넘어서는 일은 바로 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넘겨진 과제일 수밖에 없다.      


어떤 죽음이든 그 무게의 차이가 있을까마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들의 죽음은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관계요로에 호소할 수단도 힘도 갖지 못한 이들이 절박함을 호소하기 위해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달리 널리 알려진 자신의 지위와 목소리를 갖고 있는 이들마저도 그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징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숨 막히는 현실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 아닌가?


남북관계는 극도로 경색화되어 불안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고, 경제 살리기의 장밋빛 기대와는 달리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심각한 생존 위기의 궁지로 내몰리고 있다. 게다가 국민들의 언로마저 하나둘씩 차단당하고 있다. 인터넷 언론은 규제를 당하고 있고 시민들의 광장도 막히고 있다. 설마 정권교체 1년 남짓만에 이렇게 심각한 살풍경이 벌어질 수 있을까 미처 예상치 못했던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전반적 위기 상황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죽음은 그 숨 막히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기에 연이어지는 죽음 앞에 ‘죽음의 굿판을 치우라’고 외치기보다는 ‘더 이상 죽이지 마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죽음의 메시지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살아 있는 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의 전부는 아니다. 끊임없이 죽임을 강요하는 현실에 역행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스스로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살아 있는 이들이 감당해야 할 진정한 몫이다. 그 삶의 실현이야말로 타인을 배제하고 급기야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현실을 부끄럽게 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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