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복음주의 진영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쓴 소리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12-03 12:31
조회
3252
* <복음과 상황> 2012년 1월호 원고입니다(20111203).


복음주의 진영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쓴 소리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복음주의 진영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쓴 소리라?


한국 기독교의 개혁세력을 일컬을 때 종종 ‘쌍칼’로 비유되곤 한다. 기존의 “에큐메니‘칼’”과 새롭게 등장한 “에반젤리‘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이 비유를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해 왔다. 한국 기독교 안에서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운동의 선봉에 섰던 에큐메니칼 진영이 1987년 민주화항쟁의 결과로 형성된 이른바 ‘1987년 체제’하에서 현저히 힘을 잃게 되었을 때 복음주의로 표방된 새로운 개혁세력을 만났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운동이 기존의 에큐메니칼 진영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기독교 사회운동으로 등장한 까닭에 그 등장 초기에 양 진영은 별다른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으나 그 저변이 확대되면서 점차 양자가 일정부분 수렴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특집의 서두에 실린 정정훈의 글 “한국 복음주의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양자의 접촉과 수렴 현상이 제한적일지언정, 그것은 매우 의미있는 현상으로서 충분히 반길 만한 사태이다. 특별히 신자유주의 광풍 가운데서 일어난 한미FTA반대 대열과 촛불행진 등에서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의 활동가들은 자주 얼굴을 마주하였고, 기독교사회포럼 등에서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그것은 양 진영의 저변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쌍칼’을 쥐고 있는 형국을 반기고 있는 터에, 복음주의 진영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쓴 소리가 필요하다는 주문이 들어 왔다. 이것은 물론 진검승부를 해보자는 결투신청은 아닌 듯하다. 양 손의 칼이 과연 쓸 만한가 검토해보자는 것이겠다. 복음주의 진영의 사회운동은 벌써 무뎌져 쓸모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뼈아픈 평가를 제기하며 과연 그 평가가 적절한 것인지, 그 평가가 맞다면 어떤 활로가 가능한 것인지 조언을 해달라는 주문인 셈이다.

엉겁결에 그 주문을 받아들이고 말았지만, 받아들인 입장에서는 다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말 적절한 진단에 해당하는 신중한 조언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저 겉으로 두드러지게 보이는 점만을 지적하는 데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를 시도한 정정훈의 글이 미리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그 글의 내용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는 까닭에 에큐메니칼 진영의 쓴 소리라는 형식을 빌은 이 글은 그에 덧붙여지는 보론 정도로 임무를 수행해도 무방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매우 제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시선에서 던지는 조언이 스스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지적하는 효과를 지닐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2. 한국 복음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앞의 정정훈의 글이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역사와 현황 등 그 세세한 내용을 충분히 다루고 있는 까닭에 이 글에서는 눈에 띄는 몇 가지 현상만을 주목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한국 복음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그 정체성의 혼란에 있다.

우선 복음주의는 그 운동의 진영을 표상하는 개념으로서나 그 정신을 표상하는 개념으로서 모두 그 정체성이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 이 점은 에큐메니칼 진영과 대비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대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의 일치를 위한 교회의 일치”로 그 정신이 집약되고 있으며, 그 진영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협의기구와 지역 및 국가적 차원에서의 협의기구에 참여하며 그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교회 및 기독교인들로 그 실체적 범위가 대략 윤곽지어진다. 반면에 복음주의 진영은 세계적 차원에서 협의기구가 있지만 그 협의기구에 참여하는 교회나 기독교인들로 범위가 구획지어질 수 있는지 의문이고, 그 정신의 공유 측면에서도 경계가 분명하지는 않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뜻하고, 이를 전제하지 않은 기독교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실체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기구에 대한 참여 여부보다는, 예컨대 <로잔언약>의 정신에 동조하며 그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회 및 기독교인들로 그 범위를 크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논하는 복음주의가 한국의 복음주의를 말하는 것이므로, 특정한 역사적 배경에서 등장한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실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앞의 정정훈의 글이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NCC로 대표되는 진보적 기독교와 구별선을 명확히 그음과 동시에 소위 근본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보수적 신앙운동”으로서 한국 복음주의의 개략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정작 문제삼고 싶은 한국 복음주의의 정체성 문제는, 그 실체적 범위와의 관련성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실체적 범위를 전제로 한 그 운동 정신과의 관련성이 더 깊다. 알려진 대로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근본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보수적 한국 기독교의 모태 안에서 근본주의적 신앙의 한계를 넘어서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에큐메니칼 운동과는 구별되는 방식으로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구현하려는 운동으로 등장하였다. 바로 이 이중의 등장 배경은 현재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정체성 문제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배경 가운데서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어디에 방점을 두고 있을까 냉정하게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기존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나치게 세속적 이념에 영합한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한 대안이 되는 새로운 기독교운동을 제시하고자 한 데 기본적인 방점이 있지 않나 싶다. 물론 한국 복음주의가 오늘 한국 보수 기독교의 반사회적 행태와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저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조리한 한국 보수 기독교의 신앙 방식과 세계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한 공유를 자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반면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과는 다른 점만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복음주의의 헌장이라 할 만한 <로잔언약>이 탄생한 것이 세계교회협의회로 수렴된 현대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복음주의의 등장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였다.

그런 맥락에서 등장한 복음주의의 정신을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근거로서 복음을 내세우고 그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정체성이 문제다. 복음주의가 말하는 정체성은 고정불변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본질주의의 한계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최고의 가치에 ‘주의’(ism)을 붙일 때 대개의 경우 그 최고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최고의 가치를 특정한 이념으로 제약시키고 마는 함정에 빠지는 숱한 사례들을 볼 수 있는데, 복음주의 역시 그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복음주의 진영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표방하며 고유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세상에 대한 책임적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지만, 여기서 표방되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기본 전제들이 신앙적 담론의 수준에서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의 신앙의 명제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동일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믿음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오늘 한국 보수 기독교의 문제가 발생했다고만 평가할 수 있을까? 그 믿음을 표현하는 전제들 자체가 ‘신앙 따로, 삶 따로’의 태도를 타파하는 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 복음주의 신앙의 명제들이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에 충격으로 다가가지 않은 사연을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들이 특정한 이념으로 제한되고 특정한 삶의 태도를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은지 깊이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함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지만, 그 복음은 변화하는 세상의 역사 가운데서 끊임없이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복음의 성육신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점에서 그 복음을 구현하는 기독교 신앙은 매우 역동적인 정체성을 형성해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규범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단순한 세속화가 아니라 복음의 지평을 확대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한국 복음주의가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견지하고 있다면,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차별성보다도 근본주의적 한국 기독교와의 차별성을 더욱 강력하게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한국 복음주의는 사회윤리에 대한 인식이 박약하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가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있다는 지적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가 사회윤리에 대한 인식이 박약하다는 지적은 뜻밖의 평가로 보일지 모른다. 복음주의가 사회윤리에 대한 인식이 박약하다는 것은 사회적 관심 자체가 박약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윤리와 구별되는 의미에서 사회윤리는 그 나름의 고유한 인식과 실천방식을 함축하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가 사회윤리에 대한 인식이 박약하다는 것은 개인윤리와 구별되는 사회윤리적 인식과 실천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빈약하다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인의 실천 문제를 생각하는 데서 현대 기독교 신학이 도달한 사회윤리의 지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사회윤리는 라인홀드 니버가 말했던 바와 같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모순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니버가 그 점을 지적했을 때 문제의식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어떤 사회가 도덕적으로 성숙한 개인들로 구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힘의 지배를 받는 현실이 문제였던 것이다. 니버는 이 문제의식에서 개인적인 관계에서처럼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인 설득과 조정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집단들 사이에서 정의를 이루는 방식은 일종의 강제력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방식을 ‘정치적’인 것이라 일컬었다. 이것은 개인윤리와는 다른 사회윤리의 차원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니버가 말한 ‘정치적’인 것의 차원은 오늘날 사회제도적 차원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서 사회가 불의하다면 그 불의를 정당화하는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으로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는 현대 기독교 사회윤리의 인식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개인윤리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윤리와는 구별되는 사회윤리의 인식과 실천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또는 공동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자체만으로 사회윤리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제도의 맥락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적 실천을 지향하는 고유한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 복음주의가 사회윤리 의식이 박약하다는 것은 바로 그 문제의식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삶의 태도 변화, 그리고 그 변화된 삶의 태도 변화에  따른 사회적 책임을 구현하는 방식이 대개 개인주의적 방식에 제한되어 있는 경향이 농후한 것 같다. 복음에 대한 순종, 그 순종의 결과로 도달하는 각 개인의 성화는 강조되지만, 사회의 구조와 제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매우 취약한 전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복음주의 진영에 속해 있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평가는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최근 에큐메니칼 진영과 공동보조를 취하는 복음주의 진영의 활동가들의 경우에는 제도적 차원에서의 실천의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거니와 복음주의 진영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희년운동 또한 그와 같은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진영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지도층의 담론 및 복음주의 진영의 인식기반이 되는 서적 등에서는 사회윤리적 접근보다는 개인윤리적 접근의 경향이 농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경향은 복음주의 진영의 실천의 지평을 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성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로 한국 복음주의는 제약된 인식지평 탓에 스스로 실천지평을 제약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한국 복음주의의 정체성의 혼란과 농후한 개인윤리적 접근은 결국 복음주의가 목적하는 바 사회적 실천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제약요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말해, 정정훈의 글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최근 들어 한국사회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현장이었던 용산 남일당 투쟁, 홍대 두리반 투쟁, 대우한진중공업을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 명동 마리, 제주 강정마을” 등의 현장에 복음주의자들의 실천활동은 미치지 못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새겨볼 일이다. 열거된 현장들은 ‘시민운동’과는 구별되는 ‘민중운동’의 현장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민중운동은 시민운동에 앞서 등장하였다. 분단이후 한국사회의 여러 사회운동들은 줄곧 민중운동으로 일컬어져 왔고, 그것은 분단이후 한국사회의 사회적 실천의 성격을 함축한 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민중운동은 주로 억압적인 국가에 대항한 것이었다가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본격화된 이후부터는 억압적인 국가와 자본에 대항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민중’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정치적ㆍ법적 의미에서 ‘시민’적 요구를 관철시키는 과정을 경유해야만 했다는 점에서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것은 억압적인 국가에 대항하는 자율적인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한 한국사회의 특수성에 기인하였다. 한국사회에서 시민이 등장한 것은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였다. 민중운동이 열어젖힌 공간 안에서 비로소 시민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1987년 체제의 형성과 함께 그 체제의 한계 안에서 민적 권리의 확장을 겨냥하는 시민운동과 그 체제의 한계를 넘어 민중의 삶의 권리를 보장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중운동은 그렇게 분화됨과 동시에 판세의 역전을 동반했다. 이러한 판세 가운데서 복음주의 운동이 민중운동의 현장에 다가서지 못했다는 것은 그 실천지평이 시민운동의 한계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 점에서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유통기한은 다했다”는 정정훈의 평가는 전적으로 지당하다.

복음주의 운동이 그렇게 실천의 지평을 스스로 제약하고 있는 데에는, 앞서 말한 사회윤리 의식의 박약이 영향을 끼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정체성의 혼란이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근본적인 제약요인으로서 정체성의 혼란 문제를 다시 거론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복음이라는 최고의 가치에 ‘주의’를 붙일 때의 함정을 지적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궁극적인 고백의 차원이요 확신의 차원인 복음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구체화할 사회적 대안으로서 이념과 정책 등의 차원을 구분하지 못하는 한계에서 비롯된다. 복음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궁극적인 차원을 함축한다. 그 궁극적 차원이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현실에서 펼쳐지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한 보편적 가치규범이나 이념 또는 더 구체적으로 사회적 제도나 정책 등의 매개를 필요로 한다. 간단히 말해 복음의 육화는 궁극이전의 방편들을 통해 구현된다. 이 점에서 세속의 가치규범이나 이념은 무조건 배척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과연 어느 것이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적극적인 검토대상이 되어야 하고 필요할 경우 선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복음주의는 그 차원을 간과하고, 복음 그 자체 또는 기독교적 세계관 그 자체가 투명하게 이 세계에 실현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믿음의 결과는 복음을 또 하나의 이념, 곧 ‘복음주의’라는 이념으로 등치시키는 역설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그 이념의 실체는 개인주의의 한계와 주어진 제도 안에서의 개량이라는 한계에 갇힌 것이 되고 말았다. 복음 자체가 그대로 실천원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복음을 사실상 특정 이념으로 전락시킨 결과를 빚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주의의 위기는 여러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정체성의 근거를 확보하는 방식 자체부터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3.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의 공통 과제


제한된 지면상 더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유감이지만, 오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렇게 쓴 소리를 해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에큐메니칼 진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에서 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주어진 과제에 충실했을 뿐이다.

오늘 한국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진영 또한 이미 오랜 위기의 늪에 빠져 있다.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등장 시점 자체부터 에큐메니칼 진영의 위기는 시작되었고, 아직까지도 그 위기를 돌파할 묘안은 뚜렷하지 않은 상태다. 한국사회에서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양 진영 모두의 공통과제이다. 또한 복음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지니는 가운데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을 펼치는 목적에서도 양 진영은 서로 다를 바 없다.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스스로의 뼈아픈 진단이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큰 자극이 되고 어떤 혜안을 던져주기를 기대해본다.*


* 각주가 달린 원문을 첨부합니다.
첨부파일 : 복음주의운동.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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