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오늘의 교회를 돌아본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2-09 19:09
조회
2592
* 새길교회  <새길이야기>  2012년 봄호 “오늘의 교회”란  원고입니다(20120128).


오늘의 교회를 돌아본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십수 년 전 서울 강남의 한 대로에서 운전하던 차가 고장났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기 시작했다. 평소 그렇게 많아 보이던 공중전화 박스는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한 여름 뙤약볕까지 내리쬐고 있는 터라 곧바로 목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공중전화도 찾아야겠지만 우선 목이 급했다. 가게를 찾으려 하니 역시 보이지 않았다. 차가 고장 나 속이 타는 상황에서 당장 긴급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전화도, 갈증을 해결할 음료수도 구할 수 없었으니 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근처 아파트단지에 들어가 겨우 가게와 공중전화를 찾아 사태를 해결하였다. 평온한 상황에서 돌이켜보면 사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겠지만 당시로서는 사막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필요한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풍요롭고 번화한 도시 한 가운데서 사막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기억은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다.

마치 그런 상황일까? 심심치 않게 상담을 받는다. 신앙상담과 함께 마땅한 교회를 찾는 상담이다. 전화로, 이메일로, 때로는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상담을 해 온다. 상담해 오는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도 다양하다. 커피숍보다 교회가 더 많다는데, 외국인들이 볼 때 가장 경이로운 풍경 가운데 하나가 즐비한 교회 십자가 탑일 정도로 교회가 많다는데, 마땅한 교회를 찾기 위해 생면부지의 목사에게 상담을 해 오는 사연이 무엇일까?

물론, 그렇게 갈급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아나서는 이들이 비율로 따지자면 정확히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가 많은 사회에서 새로운 교회를 찾아나서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오늘 한국교회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 주는 중요한 징후임에 틀림없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것과 함께 교회내에서 이른바 ‘수평이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오늘 한국교회의 실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하나의 현상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기존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이들이 의미있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교회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교회상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교세확장을 곧바로 전도 내지는 복음화로 이해하는 시각에서는 답보상태에 있는 한국교회의 위기현상의 한 형태로만 보이겠지만, 교회의 질적인 발전과 성숙을 통한 진정한 복음화를 기대하는 시각에서는 오히려 그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여주는 현상으로 인식될 수 있다. 바로 이 엇갈리는 시각이 교차하는 기로에 오늘 한국교회가 서 있다.


2.

먼저 많은 이들이 기존교회에 대해 충성을 철회하고 새로운 교회를 찾아나서는 사연을 생각해본다.

교파를 막론하고, 또는 이른바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한국교회 교인들은 대개 공통의 교회생활과 신앙의 기반을 갖고 있다. ‘언덕 위에 작은 예배당’, ‘교회 종소리’... 교회가 시골에 위치해 있든 도시에 위치해 있든, 규모가 크든 작든, 실제 종소리를 울렸든 아니면 차임벨을 울렸든, 과거 교회는 대개 그런 이미지로 그려졌다. 언덕 위라는 이미지가 말하듯 뭔가 특별한 영역이지만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는 존재로서 교회를, 사람들은 경험하고 각인하였다. 그런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인지 역사적으로, 실체적으로 분석하자면 더 많은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 교회는 새로운 문물을 전파하는 통로로서 시대를 선도하기도 했고, 위기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고단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사람들이 정성을 쏟는 구심 역할을 하기도 했고, 어린이와 청소년 및 젊은이들의 문화센터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러 측면에서 ‘어머니 교회’로서 역할을 맡았다. 어떤 교회든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배경 속에서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키워왔다. 그런데 그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아예 교회를 떠나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고, 앞서 말했듯 새로운 교회를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기존교회를 떠나는 이들에게는 저마다 동기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대개 공통된 몇 가지 이유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기존교회가 신앙의 성장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교회에서 믿음은 거의 맹신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교회에서는 신앙에 관한 근본적 물음이나 다른 의견이 허용되지 않는다. 기존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것은 믿음 없는 행위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흔히 한국교회의 반지성주의 또는 근본주의 신앙으로 일컬어지는 현상이다. 인간 정신의 발전은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 곧 끊임없는 물음의 과정을 통해 이뤄졌건만 교회에서는 그것이 금기시된다.

유대교 랍비들의 성서해석에 관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신성모독을 범할 때까지 물음을 던진다고 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믿고자 하는 진리를 철저히 탐구하는 정신으로서, 결코 불신의 행위가 아니라 털끝만큼이라도 남아 있을 수 있는 의심의 소지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진정한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기껏해야 목사의 독단 또는 교권의 독단에 지나지 않은 것이 진리로 옹호되고 그에 대한 맹목적 순종만이 강요되는 교회의 풍토에서 성찰의 여지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신앙의 성장 또한 가로막힐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의 신앙만이 강요되는 풍토에서 성숙한 성찰적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두 번째는 교회가 시대를 선도하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여기서 시대를 선도한다는 것은 통속적 유행을 따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옭아매는 관습과 제도, 풍토를 극복하고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과거 교회가 새로운 문물의 통로가 되고, 젊은이들의 소통의 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전반에 그러한 기풍을 일으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예컨대 정치제도 또는 사회문화적 기풍과 관련하여 과연 오늘의 교회가 사회를 선도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아주 단적인 예를 꼬집어 말하자면, 오늘날 장로교의 당회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교회의 정치적 구조는 개별교회 단위에서 총회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권위주의적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교회는 평신도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점에서 획기적인 전환의 성격을 띠었다. 회중의 대표로서 장로를 뽑아 교회정치의 책임을 부여한 장로교회는 확실히 새롭게 싹튼 근대정신을 반영하였다. 그렇게 교회는 회중 대표의 정치참여를 보장함으로써 대의제에 기초한 공화정의 선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제 정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정치 현실에서 대의기관은 민의를 대변하는 장치라기보다는 소수의 독과점 세력의 권력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점적 군주제에 비해 상대적 진보성을 지녔던 대의제는 이제 그 적실성을 검토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 까닭에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려는 방안이 다각적으로 모색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구조는 요지부동이다. 교회 회중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성의 대표권은 그 정치구조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고, 젊은 층의 대표권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언젠가 교단 총회의 장면을 인터넷 생방송으로 지켜 본 적이 있는데, 청년의 대표권 보장 문제가 안건으로 상정되어 잠시 열띤 토론이 이뤄지는가 싶었는데 한마디의 발언으로 토론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칼빈의 장로교 정치원리가 뭐냐? 그것을 뒤흔드는 논의가 말이 되느냐?’ 그 한마디였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가 그런 권위주의적 풍토를 지속하는 한 시대를 선도할 수는 없다. 그런 교회가 어떻게 사회에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고 젊은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세 번째는 오늘의 교회는 공공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근래 들어 한국교회 주류세력은 마치 이익집단처럼 자기주장을 펼치며 행세하는 경향을 농후하게 띠고 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쟁점마다 한국교회 주류세력은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며, 사안마다 스스로의 기준을 절대적 기준인 양 내세웠다. 예컨대 주5일근무제, 양심적 병역거부, 출판물과 영화 등 예술 작품 문제, 사립학교법, 차별금지법 등에 관한 태도에서 자기이해에 민감한 태도를 보였고, 세계적 차원에서도 논란된 해외선교 문제와 관련해서도 자기중심적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최근 한 대형교회가 공용도로마저 사실상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건축을 진행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교회의 이런 양상은 스스로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고, 따라서 소통능력의 부재를 드러내주고 있다.

심지어는 교회들 사이에서조차 공존공영의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 주는 사례들도 숱하다. 수천억 원을 들여 교회당 짓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웬만한 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셔틀버스를 운행함으로써 주변의 대다수 영세한 교회들의 존립 위기상황을 빚어내고 있다. 시장의 질서에서조차 통용되는 독과점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가 교회들 사이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실정이다. 시장의 상도(商道)보다 못한 질서가 교회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정작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교회들만이 아니라 영세한 교회들마저도 사실상 대형화된 그 교회들의 관행을 선망하는 가운데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생각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기존교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존교회에 몸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족관계, 또는 규모의 논리를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 인적 관계를 쉽사리 떨치기 어려운 현실 때문에 그 잠정적 타협상황은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가 더 추락하는 한편 덩달아 구성원의 고령화가 진행될 즈음에는 그 인적 관계가 힘을 잃게 되고, 머지않아 아직 위기를 체감하지 못한 대형화된 교회의 위기는 현저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뻔히 예측되는 그 위기상황은 미봉책으로 타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금 그 위기가 감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기존교회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선 이들의 행보는 그 대안의 발걸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3.

그렇다면 이제 대안적인 교회의 방향을 탐색해야 할 차례이다. 대안적인 교회의 시도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고, 교회간 수평이동은 대안적인 교회의 기반을 더욱 강화시켜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현실로 존재하는 대안적인 교회상,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할 대안적인 교회상은 어떤 것일까? 우선은 앞서 지적한 기존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이 그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대안의 방향을 시사한 만큼 간략히 그 의의를 재삼 확인하는 수준에서 그 내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맹목적인 신앙의 강요로 신앙의 성장을 저해하는 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묻고 깨닫는 성찰적 신앙이 가능한 교회로의 변화를 뜻한다. 의심받지 않은 진리가 지배하는 현실은 숨 막히는 현실이다. 중세기의 교권의 지배, 현대의 전체주의 지배가 그 단적인 예이다. 하느님 나라의 지상적 구현으로서 교회 공동체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숨을 쉴 수 있어야 하고, 그 자유로운 영혼들이 함께 찾아나가는 진리의 길이 보장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시대를 선도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앞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권위주의적 정치구조를 하나의 예로 들었지만, 사실은 경제적 삶의 방식, 그리고 문화적 삶의 기풍 전반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이윤추구가 최고의 지배적 가치가 되어 있고, 정치권력과 생활문화 등 전반이 오로지 그 가치에 종속되어 있는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시대를 선도하는 교회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전쟁과도 같은 일상의 삶의 현장에 나서기 위해 전의를 불태우도록 거드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되어버린 그 일상적 삶의 방식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이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전파하는 교회의 본질적 역할이다.

세 번째로 사실상 이익집단이 되어 있는 교회에서 공공성을 회복하는 과제는 교회의 뼈아픈 각성과 함께 구체적인 교회내부의 구조변동을 동반하는 과제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기중심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동일성의 원리는 매우 강고하게 자리한 하나의 경향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그것만이 유일한 법칙이라면 인간의 삶, 인간의 문명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낯선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 방식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그 관계를 규율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구성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지금까지 존속 가능했다. 더욱이 기독교 신앙은 절대 타자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들 사이에서의 공평한 관계를 형성하는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신앙을 전제한다면 현실의 사회적 구성원의 일부로서 교회는 마땅히 당대 사람들의 삶을 규율하는 공공성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폐쇄적인 체제를 지향하는 데서 소통 가능한 개방적인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 그 과제는 현실의 교회를 유지하는 구조 전반의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의 대안을 생각하자면 더 많은 과제들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앞서 말한 하나하나의 과제들만 하더라도 그와 관련하여 검토해야 할 더 많은 세부적인 과제들을 안고 있다. 하지만 개략적인 방향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 대강의 과제를 생각해본 셈이다. 이미 적지 않은 교회들이 대안적인 실천을 지향하고 있고, 그 시도들은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넘어서는 희망의 새싹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대비하고자 한다면, 오늘의 위기상황을 깨닫고 대안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으는 일이 지금 절실하다.  


* 타임스코리아에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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