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준비 안 된 부모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9-02-23 10:39
조회
3116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75번째 원고입니다(090223).


준비 안 된 부모


큰 녀석이 원하던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의 흥분을 한 순간에 싸늘하게 만드는 사태가 있지 않은가? ‘살인적’이라고 해야 할까? ‘천문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등록금이 문제였다. 드디어 살 떨리는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어차피 손에 쥐고 있는 돈이 없으니 학자금융자를 통해 등록하는 수밖에 없었다. 애비의 이름으로 융자를 내고, 온라인상으로 몇 자 툭툭 두들기고 나면 등록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 학생 본인의 이름으로 학자금융자를 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학생이 미성년자인 경우 양친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또한 은행창구에서 양친 가운데 한 사람이 학생과 대동하여 융자를 신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흘밖에 안 되는 등록 첫날 오후 늦게야 알았다. 부랴부랴 은행으로 달려갔더니 이번에는 시간이 문제였다. 융자승인이 나면 당일 오후 네시반 이전에 온라인상으로 본인이 처리해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정작 융자를 신청하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이미 네시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다음날 처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하루종일 강의가 예정되어 있었고, 집사람 역시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다음날로 미루기도 곤란했다. 신입생이라 등록절차가 자칫 잘못되면 합격자체가 취소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도리 없이 강의해야 할 곳에 양해를 구하고 은행 문 열자마자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마음이 급해 너무 일찍 은행에 간 바람에 또 기다려야 했지만, 부모가 동반해서 처리해야 할 절차를 마친 후 나머지 절차는 본인에게 맡기고 강의장소로 떠났다. 그리고 강의 도중 쉬는 시간마다 어려운 금융용어로 난감해하는 녀석의 물음에 응답하며 처리를 거들어 마침내 등록절차를 마쳤다.


강의도중에 그 일이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강의를 받는 분 가운데 두 자녀를 이미 대학에 보낸 한 어머니가 말하기를, ‘준비 안 된 부모’란다. 돈을 미리 준비하든지, 아니면 그 절차를 미리 숙지하고 준비해서 아이가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해야지 그럴 수가 있냐고 일갈했다. 띵!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준비 안 된 부모로서 자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한껏 꿈을 부풀리고 낭만을 즐길 기대감으로 차 있어야 할 젊은이를 성년의 문턱에서 채무자의 족쇄부터 채우는 이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하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다. 이래저래 심각한 교육 현실에 그런 사태까지 겪고 나니 마음이 심히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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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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