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노무현, 전태일, 예수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9-06-02 00:16
조회
2953
* 가톨릭 인터넷언론 <지금여기> '우리신학 이야기' 칼럼 원고입니다(090530).


노무현, 전태일, 예수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1.

아마도 다들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지난 5월 23일 아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그저 어안이 벙벙하고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물론 그렇게 당혹스러운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떠올랐다. ‘이명박이 노무현을 죽였구나!’ ‘오죽했으면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길을 택했을까?’ ‘그렇게 죽음으로써만이 스스로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 ‘정작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가는데 그나마 국민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다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며 한국 정치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다시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서 짐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람들에게 체험되었을 때가 그랬을 것이다. 빈 무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던 것처럼, 그의 숨소리와 그의 목소리의 부재는 거꾸로 이 땅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 있는 그의 존재를 확인해 주기 시작했다. 누구도 쉽사리 예기치 못했던 전 국민적 추모열기가 일기 시작했고 다들 가슴에 품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많은 사람의 기대를 안고 대통령이 되었지만, 정작 대통령으로서 정책을 펼쳐나갔을 때 그 뜨거운 기대감에 미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좌절감을 느끼고 실망감을 가졌던 현실에 비추어보면 놀라운 일이다.


2.

정치가로서,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은 어쩌면 실패자였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주류세력이 비난하는 것처럼 어설픈 정치를 펼치려 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바보’처럼 정도를 걷고자 했던 그의 뜻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할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이다. 현실정치의 냉혹함이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현실적 조건이 그의 의지를 옥죄고 그의 뜻을 굴절시킬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위력은 현실정치가로서 쉽게 넘어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절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전쟁에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의 열매를 낚아채간 재벌과 보수언론 역시 쉽게 넘어서기 어려웠다. 재벌의 압박에 그의 뜻은 굴절되었고 보수언론과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불화를 겪었다. 이 때문에 그는 대통령의 지위에 오르고서도 현실정치가로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위력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누구인지 알기에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너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지지자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했다고 본 탓일까? 대통령 노무현을 좌절시킨 그 모든 세력의 등에 편히 올라 탄 이명박 정권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노무현의 존재를 아예 지워버리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편하게 풀어줬던 검찰은 이명박 대통령의 손아귀에 꽉 잡혀 그나마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바보 노무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고 그의 양심의 한계마저 시험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애초부터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향유하기를 즐겼던 사람이라면 그 한계상황에서도 버티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쳤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총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임기 기간 내내 그 거센 국민적 저항마저도 버텨냈던 전두환은 ‘꿋꿋하게 버티지’ 그렇게 가셨느냐고 했다. 그러나 ‘바보 노무현’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자신의 존재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노무현은 자신이 이미 ‘타살’당한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최고 권력의 지위에 올랐던 사람으로서는 설마 그럴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훌쩍 내던지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삶과 죽음이 한 가지 아니냐’는 그의 유언의 한 대목은 해탈에 경지에 이른 깨달음의 언어라기보다는 십자가 위 예수의 절규에 가까워 보인다.


3.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현실정치의 법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놀라운 일만큼이나 놀라운 일이 다시 벌어졌다. 아직은 모르겠다.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일과 실패한 대통령을 추모하는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놀라운 일인지는 아마도 훗날의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두 가지 일이 모두 하나의 일관된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화산맥과도 같다. 잠시 잠잠했던 화산이 다시 폭발하는 현상과도 같다.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한결같이 ‘바보 노무현’이다. 고속도로를 뚫고 경제를 성장시키고 하는 것과 같은 치적이 아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의 ‘바보짓’이다. 그는 정치인들이 그저 숨쉬듯 행하는 술수 대신에 옳다고 믿는 대로 정면돌파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유력자 뒤에 줄을 서기보다는 언제나 약자 편에 서고자 했다. 그는 현실을 적당히 무마하기보다는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그는 권위주의를 내버리고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애썼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현실정치에서 도무지 기대하기 어려운 꿈을 가지고 현실정치에 뛰어들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그를 ‘바보’라고 불렀을 때 다들 그와 같이 ‘바보’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오늘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탄식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어떻게 지켜낼 수 있었단 말일까? 그것은 그가 끝까지 ‘바보’가 될 수 있도록 다같이 ‘바보’가 되는 길을 통해서였다. 그가 ‘바보’로 불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 다시 말해 현실에서 도저히 실현불가능해보이지만 꼭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위해 함께 싸워야 했다는 것을 말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은 그러지 못했다는 뜻 아닐까? 바보가 되기보다는 어느 순간 영악한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버린 자신들에 대한 반성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인간 노무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에 대한 표현임에 틀림없지만 또한 동시에 냉철한 정치적 각성에 대한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정도를 걷고, 약자 편에 서고, 진실을 밝히고, 민주주의를 세우고,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어쩌다 맞이하는 선거철에 한 표 찍어 누군가를 밀어주고 그에게 그 모든 일을 맡기는 것으로는 될 수 없다는 각성이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저마다 그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성이다.        

오늘 뜨거운 추모의 열기는 바로 그 각성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그 가슴 속에 그 각성이 함께하고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부활의 사건이다. 그 추모의 마음이 진정으로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되살려 놓은 것이라면 그것은 틀림없는 부활의 사건이다.


4.

우리는 1970년 11월 13일 한 노동자 곧 전태일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 때 사람들은 그 죽음을 예수의 죽음이라 일렀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진실을 깨닫고자 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깨달음에서 당시 민중의 고난을 대변한 민중신학이 형성되기도 했다.

예수의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태일의 죽음 또한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한국사회에는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피땀 흘려 일을 했고, 그렇게 피땀 흘려 일한 결과 한국의 경제를 일궈냈지만, 정작 그렇게 피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빈곤의 악순환 사슬에 매여 있는 현실을 사람들은 비로소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 사건은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를 일깨웠고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도도한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은 그 사건을 잇는 화산맥이었다.

‘바보 노무현’이 등장한 것도 그 화산맥을 잇는 것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물결 속에서 노무현은 등장했고, 마침내 그 민주화의 열망으로 국민의 최고 대표에 이르게 되었다. 그 권력의 지위가 녹록치 않았고, 결국은 ‘대통령을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결과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스스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 권력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인간 노무현은 그 권력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을 내던짐으로써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 진정한 자기를 되살려내어 그와 더불어 꿈을 꾸었던 사람들 가운데 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전태일이 만든 조직이 ‘바보회’였고, 노무현의 애칭이 ‘바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40년 세월의 간격, 노동자와 대통령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간격만큼 크지만 그 두 사람은 ‘사람 사는 세상’의 자리, 평범한 사람들의 낮은 자리에서 하나로 만났다.

오늘 그의 죽음을 보며 예수의 죽음을 떠올리고, 동시에 그와 함께 꿈을 꾸었던 사람들 가운데 그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을 보며 예수의 부활을 떠올리는 것은 과연 불경스러운 일일까? 오늘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이 예수가 겪은 죽음의 절대적 비극과 부활의 절대적 희망에 감히 견줄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바보 원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비슷한 일들을 바로 지금 이 땅의 현실에서 실제로 겪으며 그에 견주는 것은 결코 불경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는 기회이다.

뻔히 죽을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가야만 했던 예수는 진짜 바보다.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 때문에 권력자들의 미움을 샀고 그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권력자들의 추악함을 들춰냄으로써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다시 살아나셨다.

오늘 우리는 그 역사의 반복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는 죽음의 비극으로 마음 아파하지만 끊임없는 부활의 사건으로 희망을 바라본다. 부활의 희망은 죽음의 비극을 넘어선다. 진짜 바보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이들이 이 땅의 현실에서 죽음의 비극을 넘어선 부활의 희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닐까?


* <뉴스앤조이> 게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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