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해방의 길, 자유의 길 - 이사야 40:1~8[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2-16 14:15
조회
18365
2018년 12월 1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해방의 길, 자유의 길
본문: 이사야 40:1~8



대림절 셋째 주일,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사야서 본문말씀을 나누게 될 때마다 환기하지만, 방대한 이사야서의 내용은 크게 세 시기를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다 멸망 이전의 상황, 바빌론 포로기의 상황, 그리고 바빌론 포로로부터 해방된 직후의 상황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기나긴 세월을 반영하고 있는 까닭에 이사야서는 한 사람의 예언자가 아니라 세 사람의 예언자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제1이사야(1-39), 제2이사야(40-55), 제3이사야(56-66), 통상적으로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 이해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두 번째 이사야의 선포 가운데 그 첫머리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대제국 바빌론이 쇠퇴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제2이사야는 포로된 백성에게 희망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 목소리가 외칩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았다 ... ”
여기서 ‘복역’은 ‘강제노동’이라고 새기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지는 개념입니다. 자신을 위한 수고가 아니라 원치 않게 타의에 의해 수고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구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힘에 매여 살던 삶, 그 삶이 끝났다고, 본문말씀은 선포합니다.

그 위로의 선포와 더불어 본문말씀은 새로운 구원의 길을 닦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주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주의 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길을 예비하라’는 표현은 제2이사야의 독특한 어법 가운데 하나이며, 오늘 말씀 이후에도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이 사실은 예언자가 살았던 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제2이사야는 바빌론 제국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가 길을 말할 때 그 길은 바빌론 제국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위엄을 자랑하는 반듯한 바빌론 도성에 나 있는 ‘큰 길’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를 중심으로 사통팔달한 도로망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단순한 지리적 형상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로마로 향한다는 의미, 로마의 재가를 받은 것만이 가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집중화된 로마의 권력을 상징하며, 로마의 세계지배를 상징합니다.
로마의 세계지배보다 훨씬 앞섰던 바빌론제국의 길은 그 선구 격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적용해 말하자면, “모든 길은 바빌론으로 통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바빌론의 길은 대제국 바빌론의 위용을 상징하며 바빌론의 세계지배를 상징합니다. 바빌론의 시가에도 그 길에 대한 찬사가 나옵니다. 그 길은 승리한 왕과 그의 군대가 개선행진을 하는 길이며, 그들의 신(벨)의 영광을 드러내 주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제2이사야가 말하는 길은 바로 그 길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나 제2이사야가 말하는 길은 바빌론의 왕과 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과 그 백성을 위한 길입니다. 광야에, 사막에 그 길을 내라고 했습니다. 도성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고향으로 향하는 광야의 길입니다.
바빌론의 길이 끌어 모으는 길이라면 광야의 길은 풀어헤치는 길입니다. 바빌론의 길이 지배자인 왕과 그 신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면, 광야의 길은 포로 되었던 백성과 그들의 하나님 야훼의 영광을 위한 길입니다. 한마디로 바빌론의 길이 지배와 억압을 상징한다면, 광야의 길은 해방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길로 끌려가면서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의 길은 치욕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마련될 광야의 길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영광의 길입니다. 광야의 길은, 이전에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해 걸었던 그 광야의 해방의 길이며 영광의 탈주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걸었던 그 모든 길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제2이사야는 그 길을 닦으라고 외칩니다.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케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야 길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놔도 언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광야는 사실 사막을 말하고 있는데, 그 사막에 언제 모래 바람이 불어와 자취를 감출지도 모릅니다. 그 광야의 길은 보도블럭이 깔린 도성의 길과는 전혀 다릅니다. 길 자체의 내구성, 그리고 수시로 손쉽게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편이성에는 전혀 미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꼭 닦아야만 하는 길입니다. 야훼 하나님과 그 백성의 영광을 위해서는 꼭 닦아야 하는 길입니다. 이사야는 그 길을 닦으라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보게 될 그 길을 닦으라고 합니다.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마침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할 것이고, 그 길을 길이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선언입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옛 선인의 시에서 경구로 알려진, 그와 같은 길입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를 통해 그 길을 닦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예언자는 “너는 외쳐라” 하는 소리에 놀라 묻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일종의 반문에 해당합니다. ‘지금 새로운 길을 닦으라고 하시는데,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반문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새로운 해방의 길을 닦으라는 장엄한 선포에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 말씀은 한마디로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시편에서도 반복되고(39, 40, 90) 욥기에서도 반복되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들만 떼어놓고 보면 확실히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포로로부터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새 길을 닦으라는 장엄한 희망의 선포에 이어지는 말씀치고는 다소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는 이 내용은 예언자가 반문하고 항변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꿈을 꾼들 무슨 소용 있겠느냐, 그저 한 순간 영화를 누리는 것 같지만 풀과 같이 사라져버릴 존재들에 불과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심정과 같은 처지에 있는 예언자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언의 말씀에서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이 탄식은 매우 독특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 탄식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 의미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거대한 제국의 위력 앞에서 도무지 어떤 희망을 기댈 수 없는 민초들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탄식은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련한 민초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다가왔던 바빌론 제국에도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역시 덧없을 뿐이라는 깨우침에 이르게 한 탄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탄식은 반전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울어야 할 때 제대로 울지 못하고, 애도해야 할 때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면 슬픔은 해소되지 못하고 병이 됩니다. 완전한 나락의 경험은 가장 높은 하늘을 바라보는 계기가 됩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에서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고 세계를 새롭게 인식한 것과 같습니다. 지금 예언의 말씀에서 탄식은 그와 같은 반전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탄식은 이렇게 끝맺음 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사람들이 체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난관에도 불구하고 새 길을 닦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체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난관 가운데서도 결코 체념하지 않고 새 길을 닦는 사람들의 의지와 실천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갓 인간이 만들어놓은 굴레에 매여 신음하는 처지였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며, 그 굴레는 벗어던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성서의 모든 희망의 선포가 그렇듯이 이 선포 역시 근원적인 희망을 말합니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가 사라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우리를 탄식하게 만들더라도 하나님의 의가 이뤄지리라는 희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끈질긴 믿음의 선포입니다.

오늘 사회를 지배하며 사람들을 옭아매는 법칙과 제도는 어떨까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질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굴곡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길을 바로 펴서 제대로 된 길을 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단절되었던 남북의 철도가 이어지고 남북이 통하고, 마침내 섬 아닌 섬으로 있어 왔던 한반도 남쪽이 명실상부하게 드넓은 대륙으로 통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철의 실크로드에 이어 아시안 하이웨이(AH)까지 연결된다면 어디서든 기차를 타고, 어디서든 자동차를 몰고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지른다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짜릿해집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그 기대가 순식간에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안타깝지만, 우리를 더더욱 안타깝게 하는 현실 한 가운데 우리는 모두 탄식하고 있습니다.
두 달 전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고 외쳤던 젊은이 김용균씨가 지난 11일 새벽 태안화력발전소 켄베이어 벨트에 끼여 죽음에 이른 사건을 접하고, 우리 모두는 비통한 마음에 젖어들었습니다. ‘위험의 외주화’, 목숨이 걸린 위험한 직무는 모두 비정규직에게 맡겨진다는 경악할 만한 사실에 통탄해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년 세월호 참사 인원의 6배에 달하는 인원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KTX가 선로전환 장치 부실로 전복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는 안전업무를 담당하는 기본인력조차 태부족인 것이 모든 분야의 실상입니다. 1년 넘게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파인텍 노동자들이 아직 땅을 밟지도 못하고 있는데, 지난 12일 엘지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통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자기들 세비 올리는 데는 일사천리 만장일치를 본 국회의원들은 경제민주화 입법에는 단 한 건도 손대지 못하고 올해를 넘기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을 몰라서 문제입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길을 내야 할지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파국에 이르지 않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길을 내야 할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굴곡을 유지해야 득을 보는 사람들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세상이 꼬여 있어야 득을 보는 사람들이 완강하게 버티기에 평탄한 길을 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우리 사회에 놓인 굴곡을 깎아내려 평탄한 길을 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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