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뜻 - 요한복음 12:44~50 [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2-30 14:27
조회
31197
2018년 12월 3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뜻
본문: 요한복음 12:44~50



성탄 둘째 주일이자 동시에 2018년 송년주일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오신 의미를 새기는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께서 공적 생애를 마감하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공적 생애의 의미를 스스로의 말씀으로 정리하고 있는 일종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의 기록자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께서 스스로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밝혀 주는 말씀입니다.
한 주일 전에 탄생의 의미를 새겼는데, 한 주간 지나서 공생애를 마감하는 말씀을 나누게 되었으니 너무 비약한 것일까요?^^ 예수님 당대 연대기를 생각하면 그렇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의 시점에서는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통째로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그 연대기의 거리감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요체를 파악하자면 매우 간결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첫머리에서부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로고스가 싸르크스가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가난하고 찢긴 몸으로 그렇게 가난하고 고통을 겪는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사랑을 이룬 예수의 삶을 하나님의 현시화로 전제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그 진실을 다시 한 번 간결하게 집약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4~46)
사람들 가운데서, 그것도 가난하고 찢긴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일화하는 가운데 사랑을 실현한 예수 그리스도를 곧 하나님으로 인식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요한공동체의 신앙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그분의 삶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예수께서 그렇게 사신 삶의 뜻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당신께서 오신 뜻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다시 한 번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나를 배척하고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47~48)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분명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먼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뜻, 다시 말해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신 삶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명쾌합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 뜻이 어디에 있는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믿음의 진실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두려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 진실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지옥이 두려워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진실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인간의 몸으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써 우리는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신앙을 금기의 영역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영역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재난과 심판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유하기 위한 적극적 신앙입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선포는, 우리로 하여금 그 진실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과 더불어 선포된 말씀이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엄존하는 현실을 두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덧붙여진 말씀은 결국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배척하고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결국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말씀(49~50)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선포하는 그 말씀을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선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 또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의 다른 문맥에서 구원자이자 동시에 심판자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5:22; 8:16, 2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 또한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 두려움을 갖는 것 또한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하는 이 말씀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결국 심판을 인정한다면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삶을 사신 근본목적을 분명히 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앞서 그 뜻을 나눈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 진실로부터 근거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심판의 문제를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참뜻을 헤아릴 수 있는 열쇠가 요한복음 자체 가운데 있습니다. 유명한 요한복음 3:16 이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3:16~21)

이 말씀의 뜻을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 또는 구원과 심판의 의 현재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구원의 빛 안에 사는 사람과 심판의 어둠 가운데 사람의 동시적 현재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뜻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한 후에, 믿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것은 심판의 현재성입니다. “이미 심판 받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심판이 미래의 어떤 곳에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구원의 현재성을 다시 환기합니다. 행위 업적의 결과에 따라 먼 미래 어떤 곳에서 구원을 보장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구원을 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도 예수께서는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 그를 심판할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후보상과 관련된 문제일 뿐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진실을 곡해한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을 사후보상으로 여기는 데서 기독교가 타락하고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타락한 구조에 동참합니다. 중세 교회가 면죄부를 판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사후보상에 대한 거짓 약속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신도들의 순수한 헌신의 열정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성장하는데, 교인은 어떤 의미로든 성장하지 못하는 사연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후보상의 논리로 지금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 반면 교회만 살찌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바로 지금의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심판을 받을 것이냐 지금 내가 구원의 기쁨에 동참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심판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금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보상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지금 이 땅 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장차 받을 보상 때문에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그 자체로 기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지금 구원의 기쁨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지난 성탄절 JTBC 저녁 뉴스에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김용균씨 부모가 방송에 나와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그분들의 말투는 어눌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 뼈아프게 새기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인터뷰 말미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말했습니다.
“오늘 성탄절날입니다. 하늘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내려오셨잖아요. 그것처럼 정부에서도 우리 어둡게 이렇게 일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셔서 그 사람들 다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호소한 덕에 가까스로 지난 27일 국회에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 개정안은 보호대상의 확대, 원청 사업주의 책임 강화, 급박한 위험시 노동자의 작업 중지권 등을 핵심 쟁점으로 하였습니다. 그 쟁점이 함축하는 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개정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강구해야 할 바를 다해야 한다는 입장과, 비용이 들기 때문에 못한다거나 그렇게 사업주에게 책임을 물으면 범죄자가 증가하고 결국 경제가 망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대립하였습니다. 그 대립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통과로 해소된 것이 아닙니다. 그 대립 상황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입니까?
오늘 산적한 우리 사회 문제들을 놓고 그 해법을 찾지 못하는 정치현실을 두고 백낙청 선생은 일침을 가합니다. “한국당이 바뀌지 않았다고 개탄하는 사람도 많으나 나는 촛불 이후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이야말로 크게 바뀌었다고 본다. 국민을 속여서 집권하려던 정당에서 목전의 기득권 지키기에 안면몰수하고 골몰하는 정당으로 바뀐 것이다. 오히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덜 바뀐 것 아닌가.”(창비 주간논평 “하늘을 본 뒤 무엇을 할까?”, 2018.12.27)

구원의 빛 안에 사는 것과 심판의 어둠 가운데 사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을 분별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송년주일, 우리의 교회가, 우리들 저마다 구원의 빛 가운데 있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옷깃을 여미는 심정으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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