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길 잃은 양떼에게 바른 길을 - 마태복음 9:35~10:10[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7-21 13:43
조회
32789
2019년 7월 2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길 잃은 양떼에게 바른 길을
본문: 마태복음 9:35~10:10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보내시는 장면을 전하는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길 잃은 이들에게 진정한 길을 보여 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전합니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행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근본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먼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역사적 삶의 현장을 인상 깊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읍들과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유대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렇게 여러 행적을 펼치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가슴 찡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여러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보다 더 찡하게 전할 수가 있을까요?
사실은 참 인간다운 삶의 길을 가르쳤던 위대한 성인들이 가졌던 공통된 마음입니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갑자기 발견하게 되면 모두 놀라고 불쌍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며, 마을 사람과 친구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또한 그 원망을 듣기 두려워서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본래부터 측은지심, 즉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이끄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진화심리학에서도 말하기를, 인간문명의 원동력은 공감의 능력에 있다고 합니다. 이는 현대 과학의 결론이지만, 이 과학이 있기 전에 인류정신사의 위대한 성현들은 이미 그 진실을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성인과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몸소 그 뜻을 당신의 삶으로 구현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해타산에 맞춰 판단하는 버릇에 길들여져 있고, 그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실이 무척 안타깝지만,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생활고와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보시고, 목자 잃은 양처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사람다운 삶을 누리도록 하신 바로 그 행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와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그 안타까운 현실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고, 사람들이 그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본문말씀은 그렇게 부름을 받은 열두 사도의 이름을 거론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명이 무엇이었는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그들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다.”
제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은 한마디로 말하면 악하고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악하고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여 쫓아냄으로써 질병과 약함을 치유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귀신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화된 실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맑은 영을 흐리게 만드는 어떤 힘입니다. 성서는 이 더럽고 악한 영을 종종 사탄으로 말하는데, 그 사탄 역시 눈에 보이는 어떤 실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힘을 말합니다. 그것은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당연하게 여기는 어떤 통념이나 세계관, 그리고 그와 직결된 체제를 말합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의 표현대로 하자면 ‘구조악’을 말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온전히 대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 사람을 대할 때 이용가치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 고통을 겪는 사람을 볼 때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힘, 그것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말하면 악한 영의 정체입니다. 물신, 맘몬, 자본의 이익, 그것이 악한 영의 정체입니다. 사람들의 질병과 취약함이 바로 그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간파하시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제를 제자들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전한 데 이어, 아주 구체적인 권고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오히려 길 잃은 양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거라.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좇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 말씀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까지 한정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머지 말씀은 전체의 대의에 비춰 다 이해할 수 있는데, 언뜻 보기에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 그 첫머리에 등장합니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오히려 길 잃은 양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거라.” 하는 대목입니다. 이방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은 안중에 두지 않아도 좋다는 이야기일까요? 오직 유대인들만 구하라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이 유대의 전통을 중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방인을 향한 개방성을 차단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욱이 다른 복음서들도 명백히 증언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누가 10:33; 요한 4:4; 8:48; 마태 8:11; 28:16~20).
이 말씀에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에 관한 통념이 깔려 있습니다. 뭘까요?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지만 사마리아인과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할 백성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허를 찌르고 계십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지금 유대인들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할 백성이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자체로 길 잃은 양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길 잃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착각에 빠져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이들을 다급하게 돌봐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안중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사례가 있습니다. 19세기 독일 교회의 ‘내방선교’입니다. 서구 교회들이 한창 해외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을 19세기에 독일 교회의 선각자들은 내방선교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이미 기독교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내방선교라는 관념은 엉뚱하게 비칠 수 있었습니다. 내방선교를 주장했던 이들은 선교의 개념을 전혀 달리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영토적 확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진정한 육화를 뜻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이 내방선교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자본주의적 산업화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는 것이야 말로 선교의 급선무라고 본 것입니다. 바로 그 정신이 오늘 복지국가 독일 사회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현실에서도 절실히 필요한 인식입니다. 우리나라 밖의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눈을 감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의 취약함을 모르고 자신의 문제는 다 해결된 것으로 착각하면 오산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일종의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에서 벗어날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며, 사회적 취약계층과 소수자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오늘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바로 그 현실을 직시하는 데 기초하여야 합니다. 본문말씀 가운데 예수님의 이상한 말씀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과 함께 예수께서는 다시 강조합니다.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좇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
예수님 스스로가 이 땅에서 행했던 일을 고스란히 그대로 제자들에게 위임한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고스란히 위임된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합니다. 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건 없이 받았으니 조건 없이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갖는 진정한 개방성을 말합니다. 여행자에게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지니지 말고 다니라는 것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기라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서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공감하고 돕는 손길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에게는 바로 이 땅 위에서 하늘 나라를 이뤄야 할 사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길 잃은 이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는 몫, 그리고 함께 그 길에 나서는 몫이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과연 엄청난 그 일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지난 주간 성서연구 시간에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역시 우리들의 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와 서신서들이 일깨워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진실을 환기하였습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로 집약되는 하나님 나라의 의의를 함께 나눴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유사한 증언이 반복되고 있습니다만(특히 누가 17:20~21), 도마복음서를 보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데, 그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그 대미를 장식하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어떤 통념에 대한 몽둥이질이라 할 만큼 강도 높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뤄야 하는 사명의 진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도마복음 113절은 이렇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그 나라가 언제 올 것입니까?’ ‘그 나라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어 사람들이 볼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다(계시 21:22)고 한 것을 연상시킵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별도의 공간이나 별도의 시간으로 한정하는 인식을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실체화된 인식을 거부한 것입니다. 공간상으로든 시간상으로든 실체화하는 인식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저 세상도 아니요, 이 세상의 끝도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거나 언젠가 맞이하게 될 실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삶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살아야 하는 과제를 망각하고 엉뚱한 데서 하나님 나라를 찾으려 하니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말씀의 뜻도 그 뜻에 비추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름을 받은 것은 그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 가운데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 주고 그 길에 함께 나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길은 정의와 평화, 생명의 기쁨으로 충일한 삶입니다. 본문말씀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당부가 평화의 인사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마태 10:12 이하)을 주목해야 합니다. (* 한일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길도 마찬가지.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그 길을 방해, 정의 평화 생명의 관점에서 그 길을 찾아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기 위해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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