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악의를 선의로 맞서는 믿음 - 창세기 50:15~2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6-27 17:55
조회
11425
2021년 6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악의를 선의로 맞서는 믿음
본문: 창세기 50:15~21



성서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해맑게 그려진 인물을 꼽는다면 아마도 요셉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인물이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게다가 용모도 빼어났고, 특별히 사랑받는 사람이었다고까지 창세기는 전합니다.
사실 요셉 이야기는 그 이전에 나오는 전형적인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야기와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배경도, 이야기의 전개방식도 다릅니다. 그런데도 이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고, 이어지는 출애굽기와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조상들의 이야기와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의 결론이자 동시에 그 핵심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인물,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요셉의 행적은 창세기 신학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삶을 들여다볼까요? 창세기에는 요셉의 이야기가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간략하게 그의 일대기를 돌이켜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요셉의 이야기는 일관된 경향이 있습니다. 요셉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계속해서 궁지에 몰립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 죽음의 위기에 처합니다. 죽음의 위기상황에서 구출되어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가서도 유사한 상황은 반복됩니다. 주인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는데, 거꾸로 요셉이 유혹자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폐기되지 않은 매우 중요한 물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어째서 어려움에 처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시로 던지는 물음입니다. 성서에서 그러한 물음의 또 다른 주인공을 든다면 욥이 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성서는 늘 그와 같은 물음의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이 어째서 고난을 겪는지 묻는 데서 성서의 뭔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셉은 그런 물음을 안고 살아가는 한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항상 궁지에 처한 요셉의 상황은 늘 쉽사리 곤경에 처하는 사람들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 점에서 요셉은 그렇게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누군가를 배제해야만 자신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희생자가 된 사람이 요셉이며, 그 요셉은 그 통념 때문에 벼랑 끝으로 몰리는 모든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궁지에 내몰릴 때마다 그 상황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킵니다. 여기에 요셉 이야기의 묘미가 있고, 그가 위대한 인물이 되는 사연이 있습니다. 여기에 또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흔히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전기가 마련되지 않아 안타까워합니다. 물론 자신에 불리한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바꿔놓는 재주를 가진 비범한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보는 소위 출세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야말로 ‘역전’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신에게는 유리하지만 자신을 궁지로 몰았던 사람에게는 불리한 상황을 만드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항상 그 점에서 확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상황으로 바꾼다는 점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상대에게 불리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궁지에서 헤어 나오고 상대에게도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바로 그 요셉의 태도의 절정이요 대단원에 해당합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은 여러 차례 곡절을 겪었지만 화해하여 이집트에서 유복하게 살았습니다. 형제들은 이집트의 총리로서 요셉의 배려를 충분히 누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임종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불안해합니다. 아버지가 안 계셔 혹시나 요셉이 자신들을 해할까 두려워합니다. 형제들은 사실인지 아닌지 아버지의 유언까지 거들먹거리며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 하고 요셉의 종을 자처합니다. 요셉은 그 청을 듣고 눈물을 쏟습니다. 아마도 여전히 자기들의 생각과 행동에 매여 자신을 의심하는 형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안도시키며, 형제들의 악의마저도 선한 일을 이루는 계기로 삼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환기시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형제들은 악의를 품고 동생을 제거하려는 일을 저질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일을 선한 일을 이루는 계기로 바꾸어놓으셨습니다. 형제들과 화해를 이루게 하였을 뿐 아니라, 형제들로부터 배척당한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시어 기근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게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셉 이야기의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사실상 창세기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태초의 에덴동산을 벗어난 인간은 형제살해의 범죄를 저지르고 온갖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그 후손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형제들 사이의 갈등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어떤 면으로 보나 결코 모범적인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끊임없이 회의하며, 끊임없이 갈등과 불화의 상황 속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들을 돌보시고 아름다운 목적을 향해 인도하십니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의 손길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창세기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쭉 이어지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간의 현실을 압축하고 있는 동시에 인간의 진정한 희망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형제를 살해할 만큼, 인간 삶의 현실은 적대와 증오, 차별과 혐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배척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인간 현실의 철칙입니다. 창세기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간들의 갈등과 고통은 바로 그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악한 의도마저도 선한 일을 이루는 계기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철칙에도 불구하고 그와 전혀 다른 길이 있다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요셉은 그 희망이 결코 좌절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주인공입니다.
명백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의를 갖고 상대를 해하려는 일들이 벌어지는데도 더 이상 악순환이 지속되지 않고 선한 결과로 귀결될 수 있는 사연이 무엇일까요? 성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만일까요? 그렇게 믿는 것은 그렇게 믿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악의를 갖고 행동하지만 그 악의가 무력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렇게 믿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행했던 통념에 매여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제들을 보고 요셉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자신이 사태의 종결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지금 다른 가능성 없이 형제들이 매여 있는 통념을 따라 자신이 똑같이 행하리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기대하라는 뜻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인간 자신들만의 의지대로 관철될 수 없는 세계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더욱이 명백히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그것도 나쁜 영향을 끼치는 행위를 하게 될 때,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선회시킬 가능성은 늘 있기 마련이고, 그 악순환이 종결되고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이 가능한 것은 그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며, 그 믿음의 실현이 실제로 모든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 점에서 그 놀라운 일을 감당하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성서가 오늘 우리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진실 때문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철칙이라고 믿고 있는 그물망으로 짜인 질서를 뚫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새로운 인간이 다시 탄생하리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이 세계와 지금 인간을 결코 이미 완결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창조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지금 그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작심하고 한국전쟁과 관련된 두 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영화로, 하나는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 또 하나는 터키 영화 <아일라>(2017)였습니다. 모두 한국전쟁 고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진실을 알려주는 영화들입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전쟁시 북쪽 정부가 고아들을 동구 사회주의 국가에 맡겨 보호를 부탁했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그 때 아이들의 양육을 맡았던 폴란드 선생님들과 기억의 현장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내심 충격이었고, 그 아이들은 북쪽의 아이들만이 아니라 남쪽의 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습니다. 북쪽이 맡겼다가 데려갔는데, 남쪽에서는 아무런 대응도 없었다는 이야기는 더 충격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전쟁으로 잃어버린 부모를 대신했던 이국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유대였습니다. 60여년이 지난 시점(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에서도 아이들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더불어 눈시울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픈 의도가 개입되었을 수 있지만, 맡겨진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이들 사이에서는 그 이데올로기와 체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상처의 연대’라고 표현했던, 인간과 인간으로서 유대와 교감, 신뢰가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아일라>는 전쟁의 참화 가운데서 살아남아 터키 참전 군인에 의해 구출된 한국 소녀의 터키식 이름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은 영화입니다. 충격으로 언어를 잃어버리고 자신을 구해준 병사를 시종일관 따라다니는 아이와 병사의 유대가 인상적입니다. 아이는 병사의 귀국길까지 따라가기를 원하지만, 어쩔 수 없이 터키군이 전쟁고아를 위해 세운 ‘앙카라학교’에 맡겨져 이별하고, 결국 세월이 흘러 60년이 지나 상봉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실제 상봉장면을 전하는 다큐멘터리 화면과 함께. 이 영화에서는 국가주의적 배경은 전면에 부각되지 않지만, 그런 배경과 상관없이 역시 인간과 인간의 유대와 교감을 깊이 느끼게 해준 영화입니다.

전쟁의 비극, 그리고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인간애를 확인하면서, 무엇이 과연 인간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긴 이야기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을, 생명이 생명을 과연 어찌 마주해야 할까요? 그렇게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그렇게 사랑의 유대를 이루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가로 막는 것들을 철폐하고 선의와 신의, 사랑으로 마주할 수 있는 세계를 향한 믿음을 따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 다른 거추장스러운 것은 필요 없습니다.
워낙 강고한 장애물들, 곧 제도와 편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깊이 헤아리고 그에 따르는 어떤 노력을 동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것을 분별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반공주의 적대의 논리를 신앙으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신앙으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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