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 사건에 동참하는 교회 - 골로새서 3:12~1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5-15 22:24
조회
3117
2022년 5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 사건에 동참하는 교회
본문: 골로새서 3:12~17



몇 주 전에 이어 다시 골로새서 말씀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옥중에 있는 동안 소아시아지역의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상업도시, 특별히 직물산업이 발달한 도시로 알려진 골로새의 교회는 사실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고 바울에게서 복음을 전해 받은 에바브라에 의해 열매를 맺은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교회들에게서 공통된 바와 같이 이 공동체 안에도 잘못된 믿음으로 인한 진통이 있어서 이에 대해 올바른 해법을 제시하고 권면하는 것이 그 기본내용입니다. 바울의 친서라기보다는 바울의 사상에 정통한 제자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입니다. 교회가 직면한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바울의 입장을 지키면서도 다소 보수적인 색채를 보여주고 있는 서신입니다.

다소 보수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요?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교회의 존립, 하나의 현실적 실제로서 교회 공동체의 내적 질서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왜 보수적일까요?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루시고자 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특정한 하나의 조직 또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존질서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혁명적 이상주의라고 할까요?
그렇다면 교회의 시대 선구인 바울은 어땠을까요? 교회 공동체들이 형성되고, 그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직접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바울이었지만 그래도 바울에게는 예수로부터 이어지는 종말론적 신앙의 색채가 강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연속성이 두드러졌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 바로 앞의 11절 말씀입니다.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의 친서인 갈라디아서 3:28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용인될 수 없다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초기 교회는 그 뜻에 공감하고 그 뜻을 현실에 실현하려는 공동체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발을 딛고 있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 안에서 교회는 그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수시로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 관심은 교회의 직제 형성과 일정한 조직화의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바울 후기 서신들이 기록될 즈음에는 그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그 점에서 일정한 보수성을 띠게 됩니다. 교회의 변절일까요? 아니면 불가피하게 한계를 지닌 인간의 실존적 정황일까요? 그 물음을 안고 본문말씀에 접근하려고 합니다.

본문말씀은 매우 긍정적인 덕목으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자세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본문말씀의 범위 내에서는 어떤 부정적 언급도 없고 전적으로 긍정적인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 맥락을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잘못된 믿음으로 인한 진통이 골로새교회 안에 있었고 이에 대해 올바른 해법을 제시하고 권면하는 것이 골로새서의 기본내용입니다. 3주 전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2:8이하가 전하는 말씀을 보면 골로새교회에는 어떤 ‘철학’이 문제 되고 있습니다. 잘못된 철학으로 신앙의 혼란이 생긴 상황에서 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본 서신의 뜻이고, 본문말씀은 바로 그 맥락 안에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허황된 것에 매여 옳으니 그르니 하는 분란에 빠지지 말고, 진정으로 인간을 자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본문말씀에서 제시되는 덕목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될 뿐 아니라 동시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것으로 권면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것은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 태도를 말합니다. 철저하게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를 용납하는 인간관계의 기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신의 저자가 어째서 이런 권면을 해야 했을까요? 골로새교회 안에서 저마다 믿는 바에 따라 자기주장에 사로잡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서신의 저자는 이 권면을 통해 각자의 입장을 상대화할 것을 요구하며, 거기에서 교회 공동체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신은 그 말씀으로 그치지 않고 더 근본적인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상대에 대한 용납의 윤리를 실천하는 여러 덕목의 밑바탕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덕목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동기이자 동시에 덕목의 발현 형태입니다. 타인을 대할 때 최소한 교양 있게 예의를 갖출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은 겉치레 예의를 넘어서 근원적으로 인간 자체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이 있으면 나머지 덕목은 저절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문말씀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 가운데 있을 때 가능하다고 역설합니다.
서신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삶 가운데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례로서 예배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삶 자체가 그렇게 기쁨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중심에 있고, 아름다운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감사하는 삶, 그 삶은 진실로 겸허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삶은 자기를 뛰어넘는 근원적인 은혜를 기억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겸허한 삶입니다.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는 삶,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삶은 이를 통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공동체의 윤리를 일깨우고 있는 서신을 두고 어째서 보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공동체의 내향적 윤리로 좁아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공동체 내의 내향적 윤리라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은 도달하기 어려운 윤리적 이상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수적이 되는 것은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서 혁명적 이상의 실현을 대체하는 경향을 띠게 될 때입니다. 이 땅에서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교회 안에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로, 그 희망이 축소되는 경우입니다.
초기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이 개인적 덕성을 강조하고 그 덕성을 통하여 공동체의 내적 관계를 규율하고자 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 현상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것이 정말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변화를 포기하는 것과 결부되었다면 명백히 퇴행현상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변화에 대한 희망 가운데 스스로 그 희망을 선취하는 윤리로서 몫을 하였다면 그것은 여전히 종말론적 신앙, 혁명적 이상주의와 연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어떤 길을 걸었을까요? 주류 교회는 전자의 길을 따랐다면 소수의 교회는 후자의 길을 따랐습니다. 주류교회가 자기만의 아성을 쌓는 데 몰입했다면 소수의 교회는 그렇게 단단히 구축된 성벽을 뚫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생동성을 드러내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 우리 교회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는 더 긴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의 가치가 이 땅 위에 온전히 펼쳐지기를 갈망하고 있고, 우리가 그 과정에 동참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광주민중항쟁 42주년을 맞이하여 그 뜻을 기리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정부의 공식 명칭을 따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주일로 불리지만, 지난 제106회 기장총회에서는 공식적인 신학 문서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광주민중항쟁’으로 명명하였습니다. 단순히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국가의 정치체제에 곧바로 수렴되는 정치적 민주화라는 협소한 의미보다는 부당한 권력체제에 저항한 주체를 드러내고 따라서 그 지향점을 암시하는 민중항쟁이 적절하다고 본 것입니다. 사실 이 개념으로도 충분할지는 의문입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의 중대한 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렇게 기억되는 것만으로는 모자랄 만큼 놀라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찬탈하고자 하는 군부에 의해 인간이 완전히 비인간화되는 살육의 만행이 저질러졌으니, 그것은 눈뜨고 볼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평생 죄책감을 지닌 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참담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에서, 그렇게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기에 이후 숭고한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알고 움직였습니다. 더 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멀쩡한 사람이 ‘폭도’가 되고 ‘빨갱이’가 되어 죽음을 맞이했던 그 비극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고 싸웠습니다. 온 몸을 내던져 나서지 못한 사람들은 주먹밥을 해 나르고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대치상황이 바뀌면 곧바로 살인 악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흘 굶은 계엄군 병사들에게까지 밥을 건네주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내놨습니다. 싸우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놨습니다. 누가 강요하고 지시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무자비한 비인간적 살육에 그렇게 맞섰습니다.
‘주먹밥과 피의 공동체’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사건의 실체를 충분히 드러낼 수 없기에 ‘절대공동체’라 하기도 합니다. 1980년 5월 18~27일 열흘간의 광주를 달리 적절히 표현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합니다. 외부와 연락과 지원이 완전히 끈긴 광주는 ‘바위섬’과 같은 운명에 놓였지만,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나간 그 밖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무너진 그 공동체는 죽지 않았고 끊임없이 우리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너와 내가 하나 되었던, 가장 숭고한 인간성이 실현된 그 사건으로서 절대공동체는 끊임없이 우리를 그 사건 가운데 다시 불러들입니다.
우리가 그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그 사건 앞에 우리 자신을 열어두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인간이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힘 앞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고 나설 수 있도록, 심지어 자신을 버리는 순간이 닥쳐도 두려움 없이 나설 수 있도록 부르는 요청에 우리 스스로를 열어두기 위함입니다. 시인 김준태는 그해 6월 2일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아아, 광주여 광주여 /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 무등산을 넘어 /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교회는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그 뜻을 세상에 구현하고자 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그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받은 공동체로서 우리만의 자기만족을 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가 그 사건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980년 광주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재연된 그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의 기념식, 하나의 의례로 그칠 수 없습니다. 삶의 결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 한 시간의 만족 행위로 머무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위에 형성된 교회의 뜻을 새기며,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그 삶이 온 땅에 구현되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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