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령의 탄식, 기막힌 세상 - 로마서 8:26~3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5-29 15:51
조회
6212
2022년 5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성령의 탄식, 기막힌 세상
본문: 로마서 8:26~30



로마서 자체가 장중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특별히 8장은 아주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는 피조물의 탄식과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8:18~25). 극도의 비탄과 극도의 환희, 절망적인 현실과 희망적인 미래가 교차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계의 현실을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희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다른 문맥에서는 물론 사도 바울 서신에서도 중복되지 않는 이 심오한 말씀은 우리를 심각한 물음 앞에 서게 합니다.
본문말씀은 크게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성령께서 탄식하며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주신다는 것(26~27),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협력을 통해 선이 이뤄진다는 것, 그것은 곧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28~30)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단락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성령의 탄식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성령께서 탄식하는 상황,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요?
바로 앞의 내용(8:21~23)에서는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기 위해, 모든 피조물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들도 몸의 해방을 고대하면서 신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내용과 직결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를 돕는다고 합니다. 종살이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고, 온전한 몸의 해방을 갈구하지만 어찌할 줄 모르고 탄식하는 하는 것이 우리의 약함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삶이 따라주지 않은 현실이라고 할까요? 게다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복음서보다 앞선 서신이 기록될 당시 사도 바울이 미처 주의 기도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명백히 고통은 실재하는데, 어찌 호소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신음하며 탄식하는 상황입니다. 기막힌 상황, 숨 막히는 상황입니다.

그 기막힌 상황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더불어 탄식하십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기막힙니다.^^ 우리말로 ‘성령’으로 번역된 ‘프뉴마’, ‘루아하’는 곧 ‘기’(氣) 또는 ‘숨’으로 번역되어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성령마저도 탄식하는 상황은 곧 기막힌 상황이요, 숨 막힌 상황입니다. 성령의 탄식은 그 상황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탄식을 하나님께 전하는 매체가 됩니다. 기가 통하는 상황이요, 숨이 트이는 상황입니다.
모든 탄식이 그렇듯 성령의 탄식 또한 그 소리 자체로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이라고 하였는데, 그 본래 의미는 ‘말할 수 없는’ 또는 ‘말 없는’을 뜻합니다. 통상적인 언어와는 다른 언어, 오히려 비언어, 비어(蜚語)에 가깝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언어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그러니까 인간과 피조물의 탄식이 성령의 탄식을 통하여 그 의중이 하나님께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신비한 언어현상으로서 방언을 유념한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지만, 사도 바울은 방언을 성령을 받은 표징으로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소통하기를 권장하고 있는 점에서(고전 14장) 그 특수한 언어현상으로서 방언을 유념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바울이 보기에 그 방언현상 자체가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약함을 나타내는 징표였기에 그 현상을 유념했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가장 절실하게 이해하는 방식은 신음이요 절규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출애 2:23~24) 이처럼 백성의 탄식과 신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표현은 성서에서 익숙한 표현입니다(출애 6:5; 시편 78:11; 사도 7:34). 한마디로 나의 의지만으로는 어떤 돌파구를 열 수 없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외치는 절규입니다. 그것은 통상적인 언어적 형식을 취하지 않았지만,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언어로 미처 표현하지 못한 그 뜻을 성령께서 공감하고 하나님께서 알아듣습니다. 그 절규를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 탄식과 신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뜻입니다.

1970년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재판을 받던 한 분(김명수 목사)은 판사의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악~!”하는 외마디 괴성을 질렀습니다. 그 괴성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현실, 말도 안 되는 재판을 향한 항변이요, 인간으로서 정당한 외침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 장례식장에 울려 퍼진 문익환 목사의 조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조사의 내용도 없이 그저 “전태일 열사여!”에서 시작하여 수십 명의 열사 이름을 외친 후 마지막으로 “이한열 열사여!” 외치고 단에서 내려갔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기존의 문법을 벗어난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현란한 언어보다 더 절실하게 당대의 현실을 고발하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일깨운 탄식이었습니다. 그 절규가 있었기에 그나마 오늘 한국 민주주의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 절규를 하늘이 들어주시고, 하나님께서 들어주셨기에 한국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더불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꿰뚫어 알아들으신다는 것은 그와 같은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렇게 진솔하게 자신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을 느끼고 탄식하는 것만으로도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는 피조물의 탄식은, 그의 세계인식을 뜻합니다. 인간의 잘못된 역사로 훼손된 피조세계의 현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고통의 신음 가운데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 당대보다 오늘 현실에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그 인식은 그저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후반부는 그 강렬한 희망을 선포합니다. 성령께서도 그렇게 아파하시고 하나님께서도 그 고통의 의미를 알고 계시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나만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다고 느꼈지만, 그래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탄식은 서로의 마음을 연결해줍니다. 그 예민한 세계인식은 서로의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나 요즘 텔레비전 안 본다.”고 말하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아는 것과 같습니다. 너와 나의 마음이 통하고, 그것이 하늘의 하나님과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협력하여 선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말씀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였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무개는 선택받고 아무개는 선택받지 못했다는 예정론을 이끌어내고 싶어 하는 해석들이 있지만, 본문말씀의 뜻은 그와 같은 예정론을 말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하나님을 사랑을 이루는 사람(8:31이하 참조)은 하나님의 계획하에 일련의 구원의 여정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배타적 예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고, 성령께서도 탄식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해방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배타적 구원의 논리로 좁혀버리는 것은 그 뜻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실은, 성도들이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닮고 결국 그 아들을 맏이로 하여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기도에서 ‘아빠’ 곧 ‘아버지’로 불렀던 그 믿음과 상통합니다. 혹 사도 바울이 주의 기도를 몰랐다 하더라도, 그 역시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8:15).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피조물이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전망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미래 전망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과거형입니다. 완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과의 자녀관계,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매형제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자유인으로, 또한 더불어 서로를 아끼며 존중하는 삶 가운데 그 구원이 실현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삶을 선취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껴갈 수 있겠느냐 하는 다음 구절(8:31이하)에서 바울의 그 확신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분명한 진실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합니다. 어떤 금기를 따르는 것이 신앙의 본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며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의 삶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데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기막힌 현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느꼈던 시대보다 더 기막히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그 현실을 그야말로 예민한 감성과 통찰력으로 기막힌 현실로 인식했지만, 오늘 현실은 그야말로 온 세계가 무한한 욕망의 제국으로서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습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의 제국이 생태적 순환을 파괴한 것은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의 빈부격차와 차별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패권의 욕망은 전쟁을 야기하고 온 세계 사람들의 두려움과 생활고를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그 두려운 상황을 막아내고 보다 나은 세계를 지향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은 국가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업자득, 사람들이 헛된 망상에 빠져 있으니 그런 정부가 구성되고 그렇게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세계적 위기 상황과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그 위기를 부추기는 방향(외교, 경제 정책 전반)으로 나아가는 것도 문제요, 국민이 반분된 상황에서 협치의 의지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 표방한 공정과 법치에도 어긋나는 일들을 서슴없이 벌이고 있는 것(관저와 집무실 변경, 국무위원 임명절차, 인사검증부서 설치)도 문제입니다. 이전 정부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들 또한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다. 저마다의 동등한 인권을 보장하여 사회적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미뤄지고 있고, 며칠 전에는 노동쟁의 행위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는 법률이 다수 의견(5:4)에도 불구하고 정족수 1명이 모자란다 하여 합헌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심의 10년만의 결론입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 절대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는 노동권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는 사태입니다.
젊은이들이 삶의 희망을 기대하지 못하고 답답해하는 현실, 공연히 자신의 무능 탓으로 돌리며 절망하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반영해주는 정치세력 또한 마땅치 않아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 기막힌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새깁니다. 성령께서 더불어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와 더불어 탄식한다는 진실은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며 용기의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를 지탄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하늘의 뜻을 구현하는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헛된 것을 ‘배설물’(빌립 3:8)로 여기고 진정한 삶을 누리며, 마침내 모든 피조물이 기쁨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 삶을 이루고, 그 삶을 널리 펼쳐나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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