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령이여 오소서, 우리 가운데! - 로마서 8:1~1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6-05 18:53
조회
5810
2022년 6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성령이여 오소서, 우리 가운데!
본문: 로마서 8:1~11



성령강림절 첫 주일 우리는 다시 로마서 8장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무려 21차례나 영에 관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8장 후반부의 성령의 탄식에 대해 그 뜻을 나눴는데, 오늘은 그 서두로서 성령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주는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말씀을 집약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간단히 줄여 말하면, 육신에 속한 생각의 귀결은 죽음이지만 성령에 속한 생각의 귀결은 생명과 평화라는 것입니다(6절).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육신을 지녔지만 그 한계를 넘어 성령의 뜻을 성취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진실을 압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진실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정죄 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생명을 누립니다(1절).

본문말씀의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그 맥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 맥락은 역사적 상황과 동시에 본문의 문맥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바울은 특별히 로마서에서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두드러지게 내보이지만, 본문말씀은 그저 심각한 신학자의 골똘한 사변이 아닙니다. 당대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황 가운데서 진정한 삶의 길을 역설하고자 한 것입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자기를 소개하고자 하는 뜻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당대 로마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육이니 영이니 하는 이야기가 그저 추상적인 인간학을 구성하려는 신학자의 사변이 아니라 바로 당대 로마 그리스도인이 처한 현실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의 문맥을 보자면 처음부터 율법과 대비되는 복음의 의의를 역설하고 있는데, 역시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의(義)와 인간의 인의(認義)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받느냐, 그것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모두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에 따라서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자격과 업적의 기준을 내세우며 의인을 자처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서신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차별도 용인될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본문말씀은 바로 그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진정한 삶의 길을 보여주셨기에 그 진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어떤 정죄도 있을 수 없다는 희망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 보장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 진정한 삶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느냐, 성령께서 그 삶을 보증해준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보증해주시는 진정한 삶에 대한 선포는,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께서 장차 인도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선포했던 것과 상통합니다(요한 14:26).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8:2~6)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동안은 성령의 보증이 절박하지 않았지만, 직접 삶을 나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성령의 보증이 절박해졌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길을 알지만, 과연 그 길을 따르는 믿음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사람들은 늘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실 테니 염려 말라고 한 것입니다. 생명을 보장하는 길을 따를 수 있도록 기운을 불어넣어준다는 선포입니다. 그것이 본문말씀의 요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난해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사실 난해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편견 때문에 헷갈리는 사태입니다. 본문에서 끊임없이 대비되고 있는 영과 육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영은 생명이요 육은 죽음이라는 말 때문에 육신은 부정의 대상이 되고 오직 영혼만이 긍정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영과 육을 별개의 실체로 이해하는 이원론을 따라서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과 육은 몸이 지닌 양 측면을 표상합니다. 로마서 8장은 명백히 몸의 속량, 몸의 해방을 말하고 있습니다(23절). 서신 곳곳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내듯이 몸은 부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영육을 온전히 구원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육이 대비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영은 내 몸이 생명을 보장받는 길을 택할 가능성을 표상하고, 육은 내 몸이 죽음에 이르는 길에 매여 있는 현실성을 표상합니다. 인간의 실존입니다. 선한 길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 길을 따르지 못하고 이해관계에 매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악을 행하거나 그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곧 육의 현실이요, 죽음입니다. 살아 있으나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와 법칙에 매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수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그 현실적 속박은 훨씬 크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옛말에 ‘서울 가면 눈 뜨고 코 배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함축하는 뜻과 같은 사태일 것입니다. 제국을 지탱하는 논리와 상식을 따르지 않으면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자본주의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긴장 가운데 살아가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생명의 길을 저버리지 않고 따르는 길로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우리 가운데!’ 이렇게 절실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에 이르는 육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영을 따르는 삶의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특기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육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을 따르는 길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인간과 정반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육을 지닌 만큼 죽음의 길, 죄의 길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영을 갈구하면서 다시 그 영을 따르는 삶의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 것은 일종의 순환논법이지만, 다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영을 따라 선한 길에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만 불린 게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불린 사실을 우리는 새삼 환기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은, 진실로 참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다시 우리와 함께 하는 현존방식입니다. 예수의 정신, 예수의 기운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는 방식입니다. 육신 가운데 분명히 드러났지만, 이제 그 한계를 뛰어넘어 모든 이들의 삶 가운데 현존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그 영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역시 그 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11절) 그리스도인은 그 영의 분별력이 우리 삶 가운데서 빛나도록 분투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현존 가운데서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삶이 되도록 애쓰는 삶입니다. 그것은 본문말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의 때문에 생명을 얻는 삶”(10절)이요, 비켜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삶(31절 이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할 때, 그리스도의 정신, 그리스도의 기운이 우리와 함께 할 때 성취되는 삶입니다.

그 실체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 때문에 영의 현존은 너무나 심각하게 곡해되어 왔습니다. 아니면 그저 교리적 틀 안에서 건조하게 이해되어 왔을 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 그 영의 현존을 가장 생동감 있게 전한 이 가운데 한 사람이 12세기 플로리스의 요아킴(1145~1202)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철학이 지배적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봉건적 질서를 뒷받침하는 세계관으로 분명하게 자리하게 되었을 때, 요아킴은 또 다른 역사철학으로서 성령의 제3시대론을 펼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천년지배를 교회의 시대와 동일시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요아킴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도래라는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여, 역사를 성부, 성자, 성령의 시대로 구분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시대구분은 종교 교리적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사적 통찰을 함축했습니다.
첫 번째 성부의 시대는 아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으로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제약당하며 노예제도의 강요된 노동과 봉건제도의 규정을 받는 율법시대라 보았습니다. 두 번째 성자의 시대는 우찌야 왕으로부터 1260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율법의 지배가 사라졌지만 교회의 위계질서와 성직자가 모든 사람을 위해 신적인 것의 현존을 대신하고 있는 타율의 시대라 보았습니다. 세 번째 성령의 시대는 6세기 베네딕트 수도원의 창시로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시대로서, 사람들이 국가의 권위에도 교회의 권위에도 더 이상 매이지 않는 자율의 시대라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요아킴의 역사철학은 그리스도교적 역사 이해의 종합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여러 차원에서 새겨볼 수 있지만, 핵심적인 초점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섭리를 역사적 운동과 변화 가운데서 이해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의미심장하게 평가하였습니다. 새 시대는 낡은 시대 가운데서 배태된다는 것도 위대한 통찰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초점은 인간사회의 속박과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의 제3시대 전망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나라에 대한 이상을 고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전망을 통해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질서를 부단히 상대화시키고 더 나은 세계, 마침내 현실의 모든 속박을 벗어버리고 인간이 진정한 자율성을 누리는 세계를 그리도록 이끌었습니다. 그 사상은 이후 교회와 세계,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많은 역사적 운동에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현존을 갈구하는 것은 어떤 심리적 열광 상태에 빠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삶, 피조물의 진정한 생명을 제약하는 모든 굴레를 벗고 진정한 삶,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열망을 뜻합니다. 지금 주어진 정치ㆍ경제ㆍ사회적 현실을 운명의 족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속박을 벗어나 투명하게 정의를 이루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 믿음 안에 살아갈 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28절)는 진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의 교회가 그 진실을 믿음으로 세상 가운데서 진정한 희망을 전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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