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운명에 맞서는 자유 - 요나서 3:1~1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6-26 14:41
조회
5780
2022년 6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운명에 맞서는 자유
본문: 요나서 3:1~10



요나서는 성서 안에서 매우 독특한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언서로 분류되어 있지만, 전기적 소설과 같습니다. 다른 예언서들이 예언자의 선포를 중심으로 하는 반면 예언자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예언자가 그 시대에 활동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고 훨씬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주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 전성기를 무대로 하고 있는데, 사실은 주전 5세기 전후 곧 포로기 이후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분리주의 또는 배외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에 그와 대립되는 보편주의를 내세운 것이 요나서의 주요 메시지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저작 룻기와 상통합니다.
성서 안에서 욥기가 매우 독특한 책으로 후대에 여러 각도에서 관심거리가 되고 영향을 끼친 것과 비슷하게 요나서 역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세계 안에서 매우 다양한 해석을 낳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초점은 성서적 예언의 기본 성격입니다. 이 책은 예언자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예언서와 구별되지만, 더 결정적으로는 예언의 성격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다른 예언자들의 선포는 대개 그대로 실현되지만, 요나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오히려 요나의 예언은 성서 예언의 진정한 뜻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본문의 내용을 환기해보겠습니다.

요나서의 첫 머리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아시리아의 도성 니느웨로 가서 예언을 선포하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제국 아시리아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지도 모르기에 그것이 마땅치 않은 요나는 배를 타고 정반대 방향인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결국 풍랑으로 바닷물에 빠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을 지내면서 돌이킨 후 다시 세상으로 나옵니다.
본문말씀은 그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돌이킨 요나를 보고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예언을 선포할 것을 다시 명하십니다. 그 명을 받은 요나는 니느웨로 향합니다. 그 도성은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략 지름이 60킬로미터 이상 되는 규모입니다. 실제 발굴 결과는 5킬로미터 정도인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도시로 인식되었습니다. 요나는 그 사흘길이나 되는 도성에 당도하여 딱 하룻길을 걸으며 예언을 외쳤습니다.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그 한마디였습니다.
요나의 예언이 무척 무성의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흘길 되는 도성에서 하룻길만 다닌 것도, 다른 예언이 죄악상을 열거하며 돌이킬 것을 선포한 것과 달리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는 말만 외친 것도 마지못해 선포하는 요나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단 한 가지 진지한 대목이라면 최소한 돌이킬 수 있는 기간을 사십일로 선포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이 무성의한 예언은 거꾸로 예언자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발 망해라!’ 하는 기대입니다.
그 간결한 예언을 받은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참회하였습니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선포한 예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반면 이방 제국의 도성 니느웨를 향한 예언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사람들은 금식을 하고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서 참회하였습니다. 가장 높은 왕에서부터 평범한 사람들, 심지어는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 묘사는 명백한 재난 예고가 타당성을 지닐 때 사람들이 취한 행동을 묘사한 아시리아의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 재난이 거두질 때까지 왕은 권좌에서 물러나 있어야 하고, 또 그 재난은 짐승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내용이 아시리아의 종교문서들에 등장합니다.

아시리아의 왕은 선포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그들이 뉘우치는 것을 본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기로 했던 재앙을 거두어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이를 본 요나가 못마땅해 하자 하나님께서 요나를 일깨우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4:11)
한번 내리기로 한 재앙을 틀림없이 내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의 옳음, 당신의 일관성을 입증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목숨을 보존하는 데 있습니다. 이는 일찍이 에스겔이 선포한 예언과도 그대로 통합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에스 33:11) 성서 예언의 진정한 뜻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니느웨 도성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예언이 겨냥하는 뜻이 구현된 너무나 분명한 사례에 해당합니다.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참회와 결단을 촉구하는 예언의 참 뜻이 성취된 사례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서의 예언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고대 세계에서 예언은 대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예고하는 성격을 지녔습니다. 반면에 성서의 예언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운명의 전환을 요청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필연의 세계 안에서 고난의 운명을 감내하며 받아들이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 고난의 운명을 극복하고 자유의 세계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뜻을 지닙니다. 그리스 비극도 운명과 싸우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성서의 예언이 그리고 있는 만큼 숙명을 벗어나는 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바이킹>은 그리스도교화하기 이전의 북유럽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라마 자체는 픽션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단서로 한 만큼 그 세계의 묘사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오늘날 가장 문명화된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세계가 그렇게 잔인하고 노골적인 폭력의 세계였다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7~8세기는 우리 역사로는 삼국시대인데, 문명화 수준에서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 드라마는 적나라한 삶의 배경으로서 신앙의 문제 또한 중요한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예언자의 예언은 반드시 실현됩니다. 어떤 영웅도 거기에서 비켜나가지 못합니다. 그것이 고대세계의 예언의 성격입니다. 사실 오늘날 점쟁이의 점술에 의존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에서 기대되는 예언의 성격도 다르지 않습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까지도 요승들의 예언에 솔깃해하는 상황이니 더 말할 것 없습니다.
성서의 예언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분별하고 그것을 바로 잡을 길을 찾도록 결단을 요청하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이 길밖에 없다는 숙명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길과 저 길이 있는데 어느 길을 택할 것이냐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의 길을 선택하라는 요청입니다. 필연의 왕국, 숙명의 세계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의 나라를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이로부터 진정한 윤리가 가능해집니다. ‘저마다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회심의 결단은, 숙명이라 여겨진 현실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자기 욕망의 세계에 갇혀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자신에게 복이 되는지 저주가 되는지만 따지는 태도와는 다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곧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인지 판단하고, 그 길을 택하라는 것이 성서 예언의 진정한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요나의 기적’(마태 12:38~42; 마가 8:11~12; 누가 11:29~32)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 말씀이 함축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자기 세계에 갇혀 자기에게 유리하고 불리한 것에만 몰입해 있던 요나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보편적인 구원의 세계에 눈을 돌린 사건, 그것이 요나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요나의 세계관의 변화를 뜻할 뿐 아니라 세계 자체의 변화를 뜻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변화는 세계 자체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아시리아가 과연 제국의 법칙에서 벗어났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요나서가 그리고 있는 것은 그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입니다. 요나서는 그렇게 변화가 이뤄지면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기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한 예수님의 선포는, 그 자신의 삶과 제자들의 삶으로 구현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십자가에 매달려 무기력하게 죽음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로마세계의 신들에 대한 숭배를 대체하였을까요?
로마세계 사람들에게 그 세계는 완벽하게 신들에 의해 재가된 세계였습니다. 그 세계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곧 신들의 뜻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화신인 황제를 숭배하고, 여러 신들의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바치며 자신의 복을 비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각자에게 어떤 회심도,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의문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봉쇄했습니다. 오직 운명을 따르는 순종만을 요구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세계의 사람들이 도저히 신이라 할 수 없는 한 사람을 따르며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별명은 무신론자였습니다. 로마인들의 기준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존재의 축에도 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가르침,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기며 따르는 사람들은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운명에 맡기고 사는 사람들과 달리 설령 십자자의 고난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그 고난을 겪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연약한 이들을 돌보는 그 삶을 실천했습니다. 진정한 인간을 발견했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은 운명을 강요하는 폭군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하는 분이었고, 마침내 고통을 이겨내고 기쁨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로마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 칸트가 말했던 유명한 정언명령입니다. 일찍이 성서의 세계, 그리스도교의 세계에서 빛난 그 빛이 새롭게 빛을 발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만 행동하면 세계는 갈등과 불화, 고통 속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는 욕망의 각축과 갈등, 고통만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내가 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통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렇게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서로 행한다면 세상은 정의롭고 평화로워집니다.
오늘 우리는 특정한 세력에게는 유리하지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일들이 국가정책으로 서슴없이 내걸어지고 시행되고 있는 사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주술과 푸닥거리는 요란한데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절절한 외침과 기도는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결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닌 경제법칙이 마치 자연법칙처럼 강요되고 있습니다. 그 법칙을 벗어나면 나라가 망할 듯 주문이 요란합니다. 국정 최고책임자는 정부를 기업과 같은 것으로 아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은 현자라기보다는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얼치기 점쟁이에 가깝습니다. 거기에 휘둘리는 국가정책이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과연 어떻게 살 것이냐, 과연 어떤 사회를 원하느냐 분명하게 묻고 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아니오!’를 외치며, 바른 길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거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세계를 일궈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